영주권과 시민권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寓居)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창12:10,11)
인생의 행로는 구체적으로 의식하든 못하든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지와 같은 개인적 선호도에 따른 선택은 그 여파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삶의 전반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아주 심각한 선택의 고비도 때때로 찾아옵니다. 그럴 때는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분석해서 선택에 따른 결과를 예측해야 하며 또 그로 인해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책임은 당연히 본인이 져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사에는 장단점이 혼재해 있지 그중 하나만 있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특별히 심각한 인생의 고비란 본인 의도와는 무관하게 외부 상황에 의해 선택을 강요받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던 사전에 부정적 결과가 따르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측된 장점을 얻기 위해 단점은 얼마든지 감수하겠다고 미리 작정한 것이기에 더더욱 본인이 몽땅 책임져야합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간 결정이 바로 그런 선택의 대표적 예입니다. 그가 선택을 강요받은 상황은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안 땅의 심한 기근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굶어 죽어야 할 판국이었기에 곡물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럼 그 선택에 따른 예측 가능했던 장단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당연히 기근을 면하는 것은 장점이고, 예쁜 아내로 인하여 자기가 죽을지 모르는 것이 단점이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들어오기 전에 대책을 궁리했다는 뜻입니다.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을 당해 어쩔 수 없이 혹은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측된 단점을 어떻게든 피해보려 작정했습니다. 큰 단점 대신에 작은 단점을 취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자기 생명이 없어지느니 아내를 팔아먹고 거짓말하겠다고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가 사전에 예측하여 감수하겠다고 작심한 일을 두고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했다고 탓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예측한 대로 죽었겠지만 아내를 빼앗기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애굽에 내려가려고 작정했을 때부터 이미 모든 일은 나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치 그의 잘못을 변호라도 하려는 듯 기근이 들었다고 그것도 심한 기근이었다고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가 범한 잘못은 대체 무엇입니까? 아예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가나안에서 굶어죽어야만 했습니까? 현실적으로 그의 선택은 오히려 최선이 아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애굽에 “우거하려” 내려간 것이 근본적 잘못입니다. “우거”(寓居)라는 말은 그 땅에서의 신분과 권리는 전혀 보장되지 않고 단지 거주만 허락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거의 알기 쉬운 예를 들면 외국에 이민 가서 그 나라 시민권은 취득하지 못하고 영주할 자격만 얻는 것입니다. 먹고 살 수는 있되 신분의 보장은 받지 못합니다. 영주권자는 조금만 잘못하면 언제든 추방당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시민권을 취득하면 죄를 지으면 감옥은 가도 추방은 면합니다. 이미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취득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러 간 것은 순전히 기근을 피해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해서 잠시 피난 간 것에 불과합니다. 혹시라도 그곳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언제든 추방당하거나 죽음도 각오해야 합니다. 당연히 아내를 팔아먹을 각오를 미리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범한 근본적 잘못은 현실의 고난을 그것도 오직 먹고 사는 문제를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임시 대책으로만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인간사의 선택에는 나쁜 결과도 미리 각오해야 하는데 임시방편은 더더욱 단점이 많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외부 상황에 의해서 심각한 선택을 강요받을 때에 영원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영원한 해결책 또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영원한 해결책이란 거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시적인 장단점이 특별히 단점이 따라선 결코 영원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뜻을 따르는 선택에는 절대로 죄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죄의 냄새를 미리 맡을 수 있으면 아무리 위급한 경우라고 해도 그분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그래서 죄를 자기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고 저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차라리 당신이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죄악을 용납하지 않고 저주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가나안 땅을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도 바로 그 뜻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신자를 죄악으로 이끄느니 얼마든지 죽이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믿음의 자녀들을 이 땅에서 먹고 살 수 있도록 우거시키느니 즉 영주권을 주느니 차라리 영원한 시민권이 있는 하늘로 불러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가고자 선택했을 때에 이미 죄악의 냄새는 심하게 났습니다. 그는 충분히 그 냄새를 맡고도 기꺼이 임시방편을 선택했습니다. 냄새가 나는 순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고 가나안에 남아 있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럼 최악의 경우 하나님은 그를 그 땅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최초 조상이 최초의 순교로 그 믿음의 본을 보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 그를 하나님이 쉽게 순교시켰겠습니까? 최소한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보호해 주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기근이라는 힘든 상황이 닥치자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겠다는 그분의 영원한 약속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그로선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기에 어디서든 우거하는데 급급했던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인생은 이 땅에선 우거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 임시방편적 선택만 하고 그 삶을 마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아는 자는 먹고 사는 것보다는 그분의 거룩한 뜻을 이루려고 영원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전자는 이 땅의 영주권만으로 만족하려는 자라면 후자는 하늘의 시민권을 소망하며 사는 자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의미는 먹고사는 문제라면 죄악의 냄새가 아무리 나더라도 기꺼이 선택했던 자리에서, 생명을 걸고서라도 오직 하나님만 선택하는 자리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예측 가능한 죄악의 선택은 하지 않기에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질 이유가 전혀 없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에스더처럼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선택하여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완전히 일임하게된 것입니다. 이미 하늘나라 시민으로서의 모든 신분과 권리를 취득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2/18/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