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참 은혜인가?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는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1-5)
대부분의 신자가 “은혜”라고 하면 하나님에게 뭔가 좋은 것을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은혜의 정의가 아무 자격과 공로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전과 비해 크고 좋은 일이 생기면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자기는 아무 노력을 하지 않고 단지 기도만 했거나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도 얻게 되는 복을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 “하나님이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전혀 다른 각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선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하나님이 주신 것보다는 성도들이 오히려 드리거나 적극적으로 어떤 일을 한 것을 두고 은혜라고 했습니다.
물론 은혜는 분명 하나님 쪽에서 성도에게 먼저 베푸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이 됩니까? 성도가 하나님께 참된 은혜를 받았다면 또는 받은 은혜를 올바르게 해석했다면 반드시 드리고 헌신하는 모습으로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해 만약 그런 반응이 없다면 참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거나 받은 은혜를 묵살해 버린 죄를 범한 셈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도무지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히려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이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멉니다. 아니 아예 정 반대입니다. 오늘날 어느 누가 사람들로 큰 상처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겪고 혹은 회사가 부도났는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감사하겠습니까? 아니 시인이라도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초대교회 교인들은 한 술 더 떠 상식적으로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선 환난의 많은 시련이 닥쳤으면 괴로워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그것도 넘치도록 기뻐했습니다. 또 극한 가난으로 떨어졌으면 연보는 자연히 줄어들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풍성하게 넘치도록 드렸습니다.
요컨대 기쁨이든 연보든 넘쳤습니다. 자신이 주체 못할 정도로 기뻤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기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헌금도 자신의 힘에 지나도록 했습니다. 그것도 어느 누구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자원해서 말입니다. 비유컨대 부도가 나서 사업자금은 이미 완전 바닥났고 겨우 식구들 끼니 이을 정도의 돈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그마저 기꺼이 헌금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이해는커녕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을 것입니다. 상처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병들어 돈이 없는데도 기뻐 날뛴다면 완전히 미친 사람 아닙니까? 본문을 세상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꿔 봅시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넘치는 슬픔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보잘 것 없고 겨우 마련한 연보를 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자존심도 세울 겸 어쩔 수 없이 바쳤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비상식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었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께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현실의 가난, 핍박, 환난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환각제를 먹고 구름 위에 붕붕 떠다니듯 종교적 엑스타시에 몰입되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은혜의 정의대로 아무 자격과 공로 없이도 베풀어주시는 긍휼을 넘치도록 받은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성령이 충만하여 교회마다 성도마다 소망하고 붙들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만큼 나사렛 예수도 충만했습니다. 신자 개인의 현실적 안위와 형통은, 또 교회의 외적 성장은 전혀 충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였습니다. 대신에 그들의 가슴 속에는 오직 예수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분이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이요 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실제로 살아 자신들의 삶을 인도하는 인격적 절대자였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을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 받은 것은 인생의 온전한 전환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 어디서나 생생한 체험이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영혼이 충만해져 영생과 부활이 온전한 소망으로서 자기들 삶을 주장하는 권능으로서 역할을 다 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로 채워진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이 그들의 삶에 전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형편과 여건이 어떠하든 주위를 주님의 긍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더욱 불쌍히 여기며 예수님처럼 십자가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에게 무엇을 받았던 그 받은 것이 신자로 예수님의 보혈로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간절히 구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은혜가 아닙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신자가 은혜를 구할 때도 그런 간절한 소망을 근거로 해서 구해야 합니다. 물론 신자가 정말 완전히 죽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해주시는 은혜를 베풀 수 있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욱 감사해서 그분에게 모든 것을 걸고 헌신할 것 아닙니까?
지금 당신은 은혜다운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자기 생각 아니 정욕으로 그 질과 양을 정해 놓은 은혜를 달라고 빌지 않습니까? 은혜란 아무 자격과 공적 없이 주는 것인데도 열심히 비는 것을 공적 삼아서 그 보상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지는 않는지요?
1/11/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