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인가? 컵인가?(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2)
하나님이 아브람더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당신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했습니다. 당시로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생명마저 위태로운 순례 길에 나서라고 했으므로 그에 상응한 보상이 따라야 했습니다. 어디를 떠나기 위해선 기존의 곳이 안 좋아야 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곳도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기존의 곳이 안 좋아도 가야할 새로운 좋은 곳이 나타나지 않으면 계속 안 좋은 곳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가 떠난 곳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갈 곳은 큰 민족을 이루며, 이름이 창대케 되며,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큰 민족을 이루어준다고 했으므로 더 많은 친척이 생길 것이며 또 나중에 눈에 보이는 땅을 다 준다고 약속하셨으니까 본토보다 더 넓은 땅이 생긴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당연히 아비 집보다 더 번창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떠나온 곳에 비해 새로이 가는 곳에서 달라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아브람의 이주가 현실적 형편은 이전과 동일하거나 더 크게 형통하면서 장소만 바꾼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행로가 이전에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공간적 이주가 아니라 영적이주를 한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끄는 여정입니다. 새 땅은 하나님의 비상한 은총을 입어 세상 모든 민족 앞에 제사상 나라가 될 거룩한 족속을 이루기 위해 마땅히 필요했던 것뿐입니다.
그가 이전에 있었던 곳이 본토, 친척, 아비 집처럼 눈에 보이는 영역이었다면, 새로 가야할 곳은 큰 민족, 창대한 이름, 복의 근원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입니다. 새롭게 차지한 땅에서 이전보다 더 큰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언제 어디를 가든 그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창대해지고 또 후손도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가 하나님께 받은 복, 즉 새롭게 가야할 땅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아브람 혼자뿐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큰 민족을 이룸으로써 여호와 신앙이 자손 대대로 전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한 택한 백성으로 인해 모든 열방으로 당신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브람이 받은 복은 땅, 재물, 명예, 권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참 하나님을 전파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세움 받았던 것뿐입니다.
결국 그는 믿음의 순례 길을 가장 먼저 걸어간 자였습니다. 따라서 그 이후에 믿게 되는 모든 사람은 그를 본받아 물질적 가시적 영역에 붙들린 삶을 완전히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따르는 차원의 영적 이주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로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믿었으니까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받으리라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께 믿는 자로 세움 받는 복을 받았으니까 그 복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본문의 복의 ‘근원’에 해당하는 원어의 뜻은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비유컨대 복이 통과하는 파이프라는 것입니다. 파이프의 특성은 들어오는 대로 다 나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 담아 두는 컵과는 기능이 전혀 다릅니다. 또 잘 통과시키기 위해선 들어오는 곳에 비해 나가는 곳이 같거나 커야 합니다. 만약 반대로 되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는 복이 통과하는 파이프 대신에 복을 담아두는 컵이 되려고만 합니다. 자기 컵에만 채워달라고 합니다. 들어오면 나갈 줄 모릅니다. 복은 정체되고 더 들어올 곳도 없는데도 자꾸 더 부어달라고 합니다. 받은 복의 전체 양으로 따지면 파이프에 비해서 형편없이 작습니다. 그리고 일회성입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복을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야 겨우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미 받은 복들은 까마득히 잊어버렸습니다. 오래 전에 받은 복은 컵 밑바닥에 침전되어 썩어 갑니다. 도무지 그 복에 활력이라고는 없습니다. 어떤 생명도 숨도 쉬지 못하고 죽게 될 복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전혀 진행이 되지 않고 오직 자기 컵에 얼마나 많이 채우느냐 시합할 뿐입니다.
정말 어쩌다 자기 컵이 넘치면 할 수 없어서 남에게 나눠줍니다. 그것도 자기는 나눠 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니까 자연히 남들이 와서 주워가는 형국입니다. 하도 복의 근원이 되려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보다 못해 넘치게 해서 남들이 복을 받는 모습을 보여 주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싶어서 그렇게 해주었는데도, 자기 컵이 예쁘고 잘나서 그런 줄 착각합니다.
나아가 컵끼리 모여 누구 컵이 더 예쁜지 재고 있습니다. 심지어 갖고 있는 컵의 크기를 키우거나 개수를 늘리면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서로 그렇게 하려고 경쟁을 벌립니다. 교회 안에 파이프는 사라지고 그저 그런 컵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반면에 파이프는 어떠합니까? 복이 항상 통과하기 때문에 고여 있을 시간과 여유가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복은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복을 자기 것으로만 활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을 겨를이 없습니다. 자기를 통해 흘러나가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오히려 중간에 뭔가 막혀 잘 빠져나가지 않으면 고통이 생깁니다. 빨리 뚫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그래서 파이프가 양쪽으로 다 열려 있기만 하면 복은 계속적으로 흘러넘칩니다. 따로 새거나 썩을 틈이 없고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항상 적당하게 채워진 상태이므로 감사와 찬양이 끊이지 않습니다. 또 유체역학상 반드시 비워 있는 다른 쪽으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비우기만 하면 복은 오히려 충당되어집니다. 생명력이 넘치고 하나님의 일이 활발히 진행되며 열매도 맺습니다. 영원토록 복이 통과하는 문자 그대로의 복의 근원이 됩니다.
아브람이 도착한 새 땅도 우상 숭배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영역에서 얼마나 더 풍성하고 형통해지느냐의 싸움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것도 눈에 안 보이는 신은 불안해서 자기들을 위해 아무 것이나 깎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치성과 열심을 있는 대로 최고로 바쳤습니다. 많이 바칠수록 많이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컵만 넘치도록 채워 달라고 그것도 실체가 없는 허공에다 대고 부르짖는 곳이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람은 전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돌단을 쌓아놓고 그 이름만 부르며, 사실은 야훼라는 그 이름조차 너무 거룩해 직접 부르지 못하고 다른 이름으로 바꿔서, 경배했습니다. 주위 사람의 조롱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의 물질적 욕구만 채우려 들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풍요와 형통과는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이 인도만 바랐습니다.
그는 새 땅에서도 외톨이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이 최고 정성을 바쳐 신의 복을 얻어내려는 주위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소원했습니다. 현실에 채워주고 안 채워주고는 오직 그분의 주권에 맡겼습니다. 이방인들의 눈에는 그와 그가 믿는 신이 이상하거나 아니면 자기들과 자기들이 믿는 신이 이상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컵이 아닌 파이프였기 때문에 그분의 복이 자동으로 다른 이에게 흘러갔습니다. 심지어 아내를 팔아먹는 잘못을 두 번이나 범해도 참 하나님만 따르는 헌신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열방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아무래도 자기들 신이 가짜 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 컵입니까? 파이프입니까? 주위 사람에게 이상하다는 말을 듣습니까? 아니면 자기들과 같다고 합니까?
12/3/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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