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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道와 神道
| 現代文보기 | 原文보기 | 성서조선 第 71 號 (1934年 12月)
누가복음 15장 후반에 실린 탕자의 비유는 동서고금의 풍습과 시대의 차이를 막론하고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며 진동시키는 유명한 말씀이다.
성서의 다른 부분이 없어진다고 해도 이 비유의 예화 하나만 남으면 충분히 하나님의 우주 구제에 대한 커다란 경륜을 다시 보일 수 있다고까지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 부분을 자세히 토론하려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언급하여야 할 일이니 지금은 덮어두기로 하고 다만 그 한 부분에 담긴 진리를 음미하고자 한다.
탕자가 뉘우치고 “내 아버지의 품꾼이 많고 그 양식이 풍요하여 남되 나는 굶어 죽겠도다……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는 감히 아들이라 불리우지 못하리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사죄하기를 결심하고 돌아 왔다. 그 때에 아버지는 “거리가 아직 머나 보고서 불쌍히 여겨 달음질 하여 가서 목을 안고 키스하였다” 한다. 또 “종들에게 명령하여 제일 아름다운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 주고, 또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리라” 하며 무리와 함께 즐겼다.
이와는 반대로 탕자의 형 된 이는 열심히 노동하던 일터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그 광경을 보고 아버지께 항의했다. “내가 여러 해를 일하며 명령을 어긴 것이 없어도 산양 ** 한 마리를 나에게 주시어 내가 나의 친구와 더불어 즐기게 하신 것이 한번도 없었는데, 오직 이 아들은 오입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산업을 다 허비하였거늘 돌아 왔다고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고. 그리고는 집에 들어와 함께 즐기기를 거부하였다.
이 말씀에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과 형님의 의분이 분명하게 대립되었던 것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서 아버지의 애정과,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하기에 급급한다면 결코 본문을 충분하게 음미하는 길이 아니다.
아버지의 큼 때문에 맏형 된 자가 아주 작은 듯이 보이고 심지어 악한 자 같이도 보이나 결코 소인도 아니었다.
그가 항의하는 취지에도 명백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은 아버지 곁에서 살았다. 밤이 되면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아침이 되면 문안을 드리며 아들 된 도리를 다 했다. 조상 전래의 유업을 계승하여 가문의 성쇠와 영욕의 책임을 양 어깨에 짊어 지고 서려는 의식이 강렬한 인물이었다.
그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낭비하고 명성을 유린하여 늙은 아버지의 심정을 크게 상하게 한 것에 대하여는 용서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윤리적 준칙이 강렬한 선비였다. 함부로 화내지 않지만 일단 화가 난 이상에는 좀처럼 해소할 수 없는 장부의 심지를 소유한 위인이었다. 소인이 아니었다. 존경하고 두려워해야 할 맏형이었다.
이렇게 맏형의 진가를 여실히 깨닫고 난 뒤에야 그 아버지의 큼이 보통의 큼을 넘어 서는 것임을 안다. 형은 바르고 옳다. 그러나 아버지는 크고 높다. 형은 땅이고 아버지는 하늘이다. 아버지의 도(道)는 하나님의 도요, 형의 도는 인간의 도에 불과하다. 크도다 하나님의 도!
오래 전에 써 놨으나 기회가 없어 나누지 못한 "사랑"이라는 4회 분량의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의 후반 2회는 탕자의 비유 본문을 근거로 묵상한 것입니다.
제 견해 또한 김교신 선생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장자의 신앙에 대해 평가해 왔으나 그 의미가 정당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장자 신앙은, 행위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점에 가까운, 참 좋은 신앙입니다(김교신 선생의 설명처럼).(그러나 이것이 완성의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제 견해도 기회가 되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선각자의 좋은 견해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수 형제님의 추종불허 멘트(흑흑흑!!!!!!)를 보니 힘이 절로 솟습니다!
변함없는 맹활약을 기대하면서................샬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