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에게 진주 (산상수훈 연구 12, 1932년 1월, 36호)
마태복음 7:6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밟고 돌이켜 너희를 물어 찢을까 염려하라.
제7장 이하에는 실제 문제를 위주로 하여 가르치신다. 1절부터 12절까지는 특히 '대인 관계'의 교훈이다. 첫번째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1~5)고 하여 품행이 단정하고 신앙이 돈독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을 깊이 경계하셨다. 둘째로 주의할 것으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하셨다. 언뜻 이 교훈은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과 서로 모순하는 듯하고 사랑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는 합당치 못한 감이 든다. 그러나 인생의 실제 문제로서 이 교훈이 필요한 것임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 한 절을 잘 해석하려면 우선 '거룩한 것'과 '진주'가 무엇이며 '개와 돼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거룩한 것'이라 함은 to hagion (the holy) 이니 원래 성전에 제물로 드렸던 고기나 빵을 일컬은 것이다(레 22:2, 렘 11:15, 학 2:12). 즉 하나님께 속한 것이란 뜻으로부터 하늘나라의 진리를 말한 것이다.
진주는 그리스도의 교훈 중에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삼과 같으니라"(마 13:45~6)는 비유로 보아서 천국 복음을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개'는 특수한 경우로는 그리스도가 가나안 여인, 즉 이방인을 개라고 칭한 때가 있었다(마 15:26). 바울은 육체를 의지하여 할례를 주장하며 영으로 예배하지 않고 어떤 산이나 어떤 회당에서 예배하여야 할 것을 고집하는 행악하는 일꾼들, 의식주의자들을 칭하여 '개들'(빌 3:2)이라고 불렀다. 또 요한계시록에는 장차 나타날 새 예루살렘에서는 '개와 복술과 행음한 자와 살인한 자와 우상에게 절하는 자와 거짓말을 좋아하여 지어내는 모든 자가'(계22:15) 성 밖에 있으리라 했다. 곧 하나님을 모르고, 진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헛된 것을 지어내는 것이 개의 중요한 성질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개는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할 뿐만이 아니다. 도리어 진리를 거스리고 돼지와 같이 진리에 대하여 반역하는 습성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개 의의 도를 알고도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1~2)
'개와 돼지'는 특히 타락한 신자, 배교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룩한 것, 진주, 개, 돼지 등의 의의를 알고 보면 이 한 구절에 포함된 교훈도 자연히 명료하여 진다. 진리를 사모함이 없고 귀에 거스리는 쓴소리를 감당할 수 없는 자에게 성의껏 충고를 주거나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룩한 것'과는 상극이 되는 개에게(출 22:30) 거룩한 것을 던지며, 보물과 어울리지 않는 돼지에게(잠 11:22, 15:12) 금반지를 주는 것은 쓸데없는 헛된 일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분노를 격발시키게 되는 수도 있다(눅 11:45). 이는 늘 목격하는 사실이다.
또한 동물학상의 습성으로 보아 돼지는 둔감, 탐욕, 더러움, 비열 등을 나타낸다. 돼지같은 자란 바로 세상 욕심에 몰두하느라 소득도 없는 진리니 복음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과 여유가 없는 속된 인간, 믿지 않는 자를 말함이다.
개는 감각이 예민하고, 행동이 빠르고, 포악하기도 하니 마치 배교자가 이미 경험했던 성서와 신앙의 지식으로 선량한 전도자를 조롱하고 역습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광경과 흡사함이 있다.
돼지는 믿지 않는 자, 개는 타락한 신자의 뜻으로 본다면 마태복음 7장 6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도 해석상의 한 방법일 것이다.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밟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돌이켜 너희를 물어 찢을까 염려하라"
그런데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진실한 충고를 하며 더우기 진리를 말하고 복음을 전하려 할 때에 과연 사람을 택하여 할 것인가, 또한 택한다면 무엇으로 개와 돼지를 구별할 표준을 삼을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바울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향기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나니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오"(고후 2:16) 하여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또 "도를 전파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온전히 힘쓰고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징계하며 권하라"(딤후 4:2) 하였다. 그리스도 자신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 16:15)고 명하였고 가나안 여인에게 처음에는 "아이들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하셨으나, 그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도 제 주인의 상 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하니 태도가 급변하여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1~28) 하여 그 대접이 달라졌었다.
그러면 우리는 신자로서 또는 전도자로서 실제에 들어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것과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교훈과의 모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첫째로 경솔하게 다른 사람을 개나 돼지로 결정하면 안 된다. 또한 판정할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하겠다. 가나안 여인도 하나님의 선민과 대립하는 뜻으로 개라고 불리웠으나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즉시 은혜에 참여함을 얻었다. 또한 개나 돼지에 속할 세리와 창기 등도 오히려 학자와 바리새 교인보다 솔선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 우리가 기준으로 삼고 따라야 할 일반 원칙은 역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성심성의껏 온전히 힘써 권할 것 뿐이다.
단, 덕을 원망으로 갚고(렘 6:10), 진리와 복음을 배척하며, 훼방하고, 농락하며, 모욕하며, 참람하며, 의를 말하는 자를 박해하는 종류의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그다지 희한한 바가 아니다. 특히 일단 기독신자가 되었던 자가 배교하고 타락한 후에는 인생 대학의 수업이나 마친 듯, 큰 진리나 깨우친 듯, 일종의 확신과 쾌감을 가지고 먹잇감을 기대하였다가 실망하고 역습하는 들개와 같이 '거룩한 것'을 주는 자에게 자만하며 반항한다.
이런 때에도 선을 행함에는 때의 유불리와 상대자의 선악을 가릴 것이 없다고 하여서 천편일률로 하는 것은 결코 진리에 충성된 바가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훈에 충실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을 파견할 때에 "차라리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시며 또 "아무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합당한 사람을 찾아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하셨다. 또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으니 그러므로 지혜는 뱀 같고 순함은 비둘기 같이 할 것이요 사람을 삼가라"(마 10장) 하셨다. 복음 전하는 일을 너무 열정적으로 무분별하게 하여 자기 자신이 모욕을 당할 뿐더러 하나님의 거룩한 것까지 유린을 당하게 하며 빛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 비록 형제를 사랑하는 진심으로 출발한 바일지라도 그것이 뱀의 지혜로움이 없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하심을 훼손하는 황송한 결과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도 이와 같은 불신 불순의 개와 돼지의 종류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저들을 대접하시는 방법에 따름이 가장 적합한 길이다. 이르시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그 정욕대로 더러운 일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다"(롬 1:24) 하였으니 믿지 않는 무리를 제어함에는 이보다 더 선한 길이 없고 예외가 없다. 이것은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방임함으로 혹은 다시 회개하고 구원에 참여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은 종종 세상에는 없는 기독교의 도덕율로 타인의 부덕을 책망하기에 급한 경향이 있다. 이럴 때에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교훈이 필요하다. 열렬한 신자는 종종 사람과 경우를 가리지 않고 오직 복음을 반복하여 힘차게 외치는 것으로 일이 되는 줄로 알기도 한다. 이럴 때에는 거룩한 것을 남용하지 말며 하나님의 존엄과 복음의 진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말라'는 교훈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