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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으신 이의 눈
| 現代文보기 | 原文보기 | 성서조선 27 호 (1931年 2月 15日)
2월 8일 (일요일)
산상수훈 계속 공부. 제18회 강의로 주기도문의 서언을 강의하다.
2월 15일 (일요일)
주기도문 제2회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한 구절을 공부하다. 우주만큼 큰 진리를 적절하게 표현할 힘이 부족함을 느낄 뿐이다.
요즈음 괴로움과 외로움을 느낄 때가 가끔 있다. 그럴 때면 나를 위로해줄 형제를 주변에서 찾아 보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이 더 어려움 가운데서 힘들어함을 보고는 도리어 내가 위로를 해 줄 형편이 되고 만다. 몸이 아픈 사람, 부모님이 편찮으신 사람, 실직해서 괴로워하는 사람, 생활 방식이 급격히 바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 충실한 교사이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는 동맹 휴학에 참가하지 않고 신앙에 서서 싸우느라고 고통 중에 있는 어린 중학생도 있다. 각자 모두 당면한 입장에서는 산더미 같은 험한 길이요, 성난 파도 같은 고난의 바다일 것이다.
중학생이 중학생으로서 주위의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고 소신대로 길을 가려 한다는 것은 강대한 남부군에 선전포고하던 ’링컨’의 신념과 홀로 보름스회의에 출석하던 ’루터’의 용기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어른의 눈으로 볼 때에 중학생의 마음 씀씀이와 비장한 결심이 오히려 귀여울 뿐 아닌가. 저가 신앙에 서서 행하는 것은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과 같이 당연한 길을 가는 것뿐이다. 비장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저가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어린 병아리끼리 싸우다가 서로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한 우리 각자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형제에게 원한을 맺는 환란과 고민이라는 것들도 저 중학생의 처지보다 더한 것이 얼마나 될까. 높으신 이의 눈으로 보신다면, 우리의 한숨과 우리의 눈물거리들 중에는 별 것 아닌 바가 많을 것이다. 아니 그 전부가 그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