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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면 망하리라
| 現代文보기 | 原文보기 | 성서조선 第 63 號 (1934年 4月)
양아버지를 따라 정처 없이 방랑하던 한 유태인 고아 소녀 에스더가, 당시의 최대 강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왕비로 선정된 지 얼마 안된 때의 일이다. 하만의 간교한 계략에 빠져 200여만 명의 이스라엘백성이 하루 아침에 멸망 당할 운명이 코 앞에 닥쳤다. 이 때에 여린 손으로 한 민족을 비극적 운명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은 과연 에스더의 ‘망하면 망하리라’ 하는 한 마디가 가지는 힘이었다.
에스더가 무릅쓴 모험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는 페르시아의 궁궐 법도를 봐야만 안다. 에스더는 적어도 ‘죽음’을 각오하고 모험한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 보름스(Worms) 회의에 참석한 루터, 남북전쟁을 선언한 링컨, 암흑대륙을 탐험한 리빙스턴 등은 다 에스더와 같이 ‘망하면 망하리라’는 기치를 내 걸고 생활한 사람들이었다. 그것 말고는 남보다 별다른 것이 없었으나 그것이 귀한 것이었다.
신자든 불신자든 구별 없이 현대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는 일’이다. 연금 제도, 보험 제도는 물론이고 자녀 교육, 기업 경영, 종교 생활 등이 결국은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땅 짚고 헤엄 치자’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과정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수영을 해보면, 땅 짚고 할 동안은 수영의 참 맛을 영원히 알 수 없다. 빠지면 익사할 위험이 있는 푸른 물결 위에서라야 비로소 수영하는 진정한 맛이 난다.
생물이 그 생명을 발육하며 종족을 유지함에는 ‘땅 짚고 헤엄치자’는 주의가 안전하기는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계들이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소리들은 들릴망정, 생명이 약동하는 기쁨의 노래는 생길 수 없다.
복어가 맑은 시내를 따라 거슬러 헤엄쳐 올라감과, 잉어가 폭포를 거슬러 뛰어오르는 일들은 위험하다면 실로 위험한 일이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이 강성할수록 폭포를 만났을 때에 용감하게 뛰어 오르지 않고는 참지 못한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을 요약하면 ‘망하면 망하리라’는 생활이 사실 그 전부이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모세가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군중을 거느리고 이집트를 나올 때, 저들은 후세에 우리가 읽어서 아는 바와 같은 신기한 기적이 의례히 있을 것을 미리 알고 행한 것이 아니다.
그저 망할 때 망하더라도 절대명령에 순종한 것뿐이었다.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등의 유태인 소년들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위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것은, 저들이 무슨 술법이나 꿈으로나 혹은 성령으로써, 사자 굴에서도 안전하며, 용광로에서도 무사히 구출될 것을 미리 보장받은 후에 감행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망하면 망할지라도 의로운 것,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일이면 감행하고, 땅 짚고 헤엄치듯이 안전한 일이라도 불의한 것은 거절한 것뿐이다. 그렇게 행동한 결과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으로 저희를 구출하셨다.
신앙생활이라 하여 점쟁이처럼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내다보거나 특별한 청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는 것을 잘하는 일로 아는 것은 대단한 오해일 뿐이다. 신앙생활은 사람의 눈을 속여 이상한 일을 해 보이는 재주가 아니라, 하늘 아래 큰 길을 공의롭게 활보하는 생활이다. ‘망하면 망하리라’는 각오로써.
망하면 망하리라! 죽으면 죽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