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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우리 태도
| 現代文보기 | 原文보기 | 성서조선 第 75 號 (1935年 4月)
현재 우리는 동네에 있는 장로교회에 출석하며, 그 건축비의 일부분도 부담하였고, 초청하는 곳이 있는 대로 서울 지역의 장로교, 감리교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도 하며, 때로는 사경회도 인도하면서 보잘 것 없는 힘이나마 기독교 교회를 돕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우리의 친구와 지우들도 혹은 감리교회에서 혹은 장로교회에서 혹은 성결교회에서 충실히 근무하며 돕고 있는 이가 적지 않다. 우리가 교회와 이렇게 지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요, 반가운 일로 안다.
과거에 우리를 가리켜 ‘무교회주의의 직계’라고 하고 본지를 일컬어 ‘교회를 파괴하는 기관’이라고 배격하는 이들이 있었을 때도 있었다. 이때에는 우리도 ‘무교회주의자’인 것을 자임하고 교회와 맞서 싸우고자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공박함이 없을 때에는 홀로 싸울 필요도 없을뿐더러 조선을 배우면 배울수록, 조선 기독교회의 내부 사정을 알면 알수록, 차마 싸울 수도 없거니와 싸워본들 별수 없는 것을 알았다.
우리에게는 정치적 권세도 없고, 다른 종교적 교권도 갖춘 것이 없다. 오직 ‘기독교 교권’이 스스로 자립하고자 한다. 그것마저 루터 시대의 로마 교권이나 영국 국교의 교권 같은 큰 세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30만 기독교도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사실 조선의 장로교 총회와 감리교 연회에서 오늘 당장 우리를 파문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목숨에 이상이 없을 것은 물론이요, 우리의 직업이나 신사로서의 체면에는 털끝만큼의 변화도 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조선 기독교회와 싸우겠다는 것은 마치 어린 소녀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용사와 다름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혹시 교회의 그릇됨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을지라도 교회를 상하게 하는 일을 즐기는 자는 아니다.
앞으로는 어떠한가? 어떤 이가 제의하듯이 함께 교회를 위하여 크게 역사하고자 하는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교회 그 물건에 대하여는 벌써 애정을 잃은 지 오래다. 물론 교회 안에 경애할 만한 신도들이 적지 않음을 안다. 때로는 독실한 장로와 목사도 아주 없지는 않음을 잘 안다. 우리가 교회를 아주 단념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성도들을 만나 서로 배우며 서로 위로됨이 있고자 함이다.
그러나 교회라는 덩어리가 되고, 교회정치라는 연극이 되고 본 즉 아주 실망이다. 이는 썩은 것이요, 망할 것이다. 저들은 재림하는 예수라도 다시 붙잡아 십자가에 거는 역할 말고는 더 할 것이 없는 자들이다. 실로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가? 우리가 만일 어떤 학교의 교장이 되거나 어떤 회사의 사장이 된다고 하자. 그는 벌써 자기 고유의 개성이나 신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학교나 회사의 전통과 인습에 묶인 인형으로만 움직이게 되는 까닭이다. 후원회, 동창회, 재단법인의 규약, 이사회, 평의회 등이 따르고 관례가 있고 전통이 없지 않으니 아, 슬프도다! 눈도 코도 뜨지 못할 지경이다. 마치 홍합의 사족이 바위에 딱 달라붙어 꼼짝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사회에서 무슨 조직체의 장(長)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신념과 지능을 발휘시켜서 그 혜택을 널리 나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그 기성단체 속에 예속시키며 동화시키며 옭아 묶여서 잡다한 귀신들의 식욕을 만족시키는 것에 불과한 일이다.
그러니 당대의 육.해군 대장이라도 일단 무슨무슨 정당의 총재로 취임한 후에는 군인정신을 상실한다고 세간에서 떠들지라도 이는 별로 기괴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으로서는 훌륭한 성도였던 이도 한번 직업적으로 교역에 종사한 후로는 아주 환장하고야 마는 실례가 한둘뿐이 아니다.
정당의 당원이나, 교회의 교역자들 전부는 아니겠으나 그 대부분은 먹이를 구하러 움직이는 자들이다. 이러하니 성자라도 거기에 같이 어울려서는 똑같이 되는 것을 면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거룩하고, 강단 위에 섰을 때에 천사 같아서 구구절절 청중을 감동시켜 마지않는 목사도, 강단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부터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거지의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온전히 삯군 노릇만 하도록 만들어 놓은 교회의 기관과 조직의 탓인 줄 안다. 이점에 있어서 교회라는 관념에서 세상과 우리는 판이하게 다르다.
근래에 이른바 ‘적극단’ 일당을 토벌하기 위하여 장로교, 감리교 두 기독교회가 분분하다. 그러나 이것도 주류와 비주류간의 싸움과 다름이 아니다.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고 성토하는 서울의 주류 쪽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세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지방으로 밀려난 비주류인 적극단 쪽에도 원인은 있었던 듯하다.
위험하고 교통이 불편하고 교육과 오락등 문화시설이 불비한 데보다, 안전하고 전차와 전기가 들어오는 등의 편의가 있고 대학교와 극장과 백화점 등이 즐비한 도시로 옮기고 싶어서 운동을 하는 것은 억제할 수 없는 사정이라고 한다. 소도시보다는 대도시로, 시골보다는 서울로, 작은 기관보다는 YMCA 중앙회 같은 풍족하고 부유한 곳으로 진출하고 장악하려면 필연코 세력이 있어야 한다.
세력은 끼리끼리 모여야만 만들어 지고, 작당은 전제적이라야 그 운용이 효율적이다. 이른바 적극단의 규약이 완전히 군대식으로 되어 있고 파시즘으로 되었다 하는 것은 교회가 그 발전할 데까지 발전한 것을 증명한 것뿐이다.
오늘날 조선 기독교계의 근본적인 기구가 잘 정비되기 전에는 아무리 적극단장 아무개 씨를 매장하고, 그 단체를 완전히 없애버린다고 할지라도, 또 다시 언제 제2, 제3의 적극단이 출현할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이런 이유로 우리는 비단 적극단 문제 하나에 대한 것만 아니라 현재 교회의 근본적인 조직과 일치할 수 없는 자이다.
그렇다면 왜 근본적으로 그릇된 기독교회인 줄 알면서 그 기독교회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교회에 출석하며 설교하며 또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느냐고? 모순이라면 명백하고 중대한 모순이다. 그러나 이 일에 관하여는 필자에게 반문하기 전에 4복음서를 정독하고,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모순부터 적발하라. 절대로 순결무구하여야 할 교회가 여지없이 부패하였을 때에 주 예수께 고난이 있었고 우리들에게는 비애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