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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호 (만 14주년)
| 現代文보기 | 原文보기 | 성서조선 第 150 號 (1941年 7月)
창간으로부터 만 14주년, 제150호를 발간하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다. 그 호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조선 안에 이보다 더 많은 호수의 월간잡지도 있다. 창간 이래의 세월이 길어서가 아니다. 조선 안에도 이보다 더 긴 세월을 이어온 잡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창간 당시에는 14년에 걸쳐 150호까지 편집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또한 나 같은 이가 그 책임을 맡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일이다.
우리는 문필을 수련하기보다는 농사와 가축 기르는 데에 뜻을 두었었다. 신학을 연구하기보다 자연계를 상대하는 자연과학에 기울어졌던 자이다. 이를테면 ‘길가의 돌’이다.
본지 창간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아직 진정되지 않았을 때이다. 세계의 사상의 물결은 혼돈스러웠고 급하게 변하고 있었다. 조선 청년들의 사상과 행동이 또한 그 와중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런 시대이다.
이러한 자취를 가장 간명하게 기술한 것은 ‘국우(局友)’ 10권-20호(1934. 11. 15 발행)에 있는 ‘조선 사상운동 개관’을 참조하라. 여기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허다한 사상이 일어났다가 물러갔고, 별별 사상가와 운동가들이 오른편에 천 명, 왼편에 만 명 거꾸러지고 쓰러졌다.
따라서 무슨 주의, 무슨 운동을 표방하는 기관지도 우후의 죽순같이 솟아났었다. 그런 와중에서 처음부터 한결같이 오직 성서 한 책을 되풀이하여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회고할수록 실로 보통 일은 아니다.
기독교라고 하면 의례히 외국인의 보조를 떠올리게 되는 법이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푼의 보조를 받은 것이 없다. 오히려 외국인 선교사들의 방식대로 조직된 조선 기독교회에게 수많은 배척과 비방을 달게 받았다. 아무런 단체의 배경도 찬조도 없었다.
주필이라는 이에게 굳은 의지도 뛰어난 글 재주도 없었다. 적립된 자금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잡지가, 창간호로부터 150호까지 이르도록 인쇄에 필요한 실비에도 못 미치는 잡지가 계속 발간된 것은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힘으로 된 일은 아니다.
지금 우리의 눈이 하늘을 향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섭리의 손을 우러러 보고 그 이끌려 온 자취에 놀라며 두려워하며 찬송과 감사에 넘치는 것은 결코 종교인의 습관 때문이 아니다. 자연인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창간 당시의 동인 다섯 분, 특히 제15호까지 편집주임을 맡아서 복음을 전도하기 위하여 생식까지 하면서 분투하였던 정상훈(鄭相勳)에게 지대한 존경을 돌린다.
모든 영광은 주 예수께로, 욕된 것은 나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