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932년 3월, 38호)
창세기는 그 위치가 성서 전편 중에 제일 처음에 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이 그 명칭과 같이 모든 사물과 역사의 창조과 시작에 관한 기록이다. 우주 천체의 구성으로부터 그 안에 있는 생물과 인류, 죄악과 타락, 회개와 신뢰, 문화, 사회 등등 모든 것의 시작과 근원이 다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기독교도가 창세기를 알지 못하고서는 신약전서도 완전히 알기 어려움은 물론이다. 모름지기 건실한 우주관, 인생관을 파악하려는 이라면 창세기를 알아야만 그 지식의 완전함을 기할 수 있으리라.
18세기 이후에 온세상에서 창세기 1장처럼 무릇 지혜있고 학문있는 이들로부터 총공격을 당한 서적은 다시 없었을 것이다. 한때는 많은 학자가 모세의 무지함을 지적하고 성서의 창조설은 거의 분쇄되어 버릴뻔 하였다. 그러나 과학은 나날이 진보하였고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장족의 발달을 이루었다. 특히 지질학에 있어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전의 과학 가설들은 다시 전복되고 한동안은 매장된 줄로 알았던 모세의 창조설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고생물학계의 대가 퀴비에(Cuvier)는 말하기를 "모세는 이집트의 모든 지식으로 양성되어,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는 한 가지 우주 창조관을 후세에 남겼다. 그 창조관이 정확한 것은 놀라울만큼 날로 날로 증명된다. 창세기에서 생물이 차츰 차츰 창조된 순서를 가리켜 보인 것과 근대 지질학상 연구는 아주 일치한다." 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안다는 것은 신앙적인 이유 말고, 자연과학에 대한 흥미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러면 창세기는 난해한 과학서적인가. 물론 아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개인의 전기 아니면 민족의 역사로 되어 있다. 아담의 전기, 노아의 전기와 그 자손들의 역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및 이스라엘 12지파 조상의 역사 등이 창세기의 내용이다. 창세기 기자의 목적은 다른 나라의 애국적 역사가들이 하는대로 신화나 비유로 그 조국 역사를 장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 내용을 있는 그대로 편찬하려 하였다. 게다가 인류의 역사를 기술하려고 우주 창조부터 써내려 갔으니, 창세기는 가장 완성도 높은 역사서라 할 것이다. 웰스(H.G. Wells)와 같은 현대의 역사가가 이 필법을 모방하여 온세계에 놀라움을 주고 있음은 또한 이유있는 일이다. 창세기는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였음이 그 한 가지 특색이다.
역사라고 하여 꼭 무미건조한 것은 아니다. 가령 시조 아담, 하와 내외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보라(3장). 이것을 문학적 견지로 볼 때에, 누가 감히 이보다 완전하게 아름다운 지상낙원을 묘사할 수 있겠는가. 또는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를 위하여 하나님께 의인의 대속을 간청하는 것을 보라(18장). 그 절절한 음성이 지금도 읽는 자의 고막을 울리는 것 같지 않은가. 또한 아브라함이 그 만년에 얻은 대를 이을 아들 이삭을 제단에 묶어 바치는 광경(22장)을 읽어 보라. 어찌 주먹에 땀을 잡지 않을 수 있는가. 요셉의 12형제가 이역 이집트에서 상봉하는 소설 이상의 사실에 감동이 되면 누구라도 요셉과 같이 울 곳을 찾지 않고 견디겠는가(43:30). 또 그 45장은 수건을 적시지 않고도 읽어 넘어갈 수 있을까.
그러나 창세기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의는 모든 현상과 사변의 밑바닥에 잠재하고 있는 영적 교훈에 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그 위에 만물을 지배하도록 인간을 두었다. 인간은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불신때문에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시조 아담이 타락한 후에 인류는 여러번 그 잃어버린 행복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혹은 사회를 형성하여 문화 시설을 정비하며, 혹은 사람의 힘이 강대함을 표현하여 유명한 바벨탑도 쌓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행복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온 세상에 부패와 타락은 날로 더하여 갈 뿐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상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셨다(6:6). 그러나 죄가 더하는 곳에 은혜도 더하여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라"(3:15)고 약속하셨다. 아담과 노아의 자손들에게 실패하신 후로도 아브라함을 택하여 약속을 새롭게 하셨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들에게 은혜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므로 이 책을 '최초의 복음서'(Protoevangel)이라 하며 신약 중에 60여 번이나 인용되었다 하니 창세기 연구의 긴요함을 충분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