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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적의 애
| 現代文보기 | 原文보기 | 성서조선 第 80 號 (1935年 9月)
어떤 문학적 소양이 깊은 성도가 이르기를 “무어니 무어니 하고 떠들어도 사랑이 제일이다. 모모 선생과 그에게서 배운 성서조선 집필자들도 사랑이 부족함이 큰 병이다. 원수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지 못하면 헛것이다. 나는 요즈음 사랑에 관하여 깊이 묵상하노라”고 하더라고 새로운 사랑의 가르침에 감탄하면서 우리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친구가 있다.
참으로 고마운 충고이며 귀에는 거슬리지만 약이 되는 말이다. 다윗이 다윗된 것은 그의 적 사울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기도한 데 있었고, 주 예수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며 부탁하신 새로운 교훈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었고, 사도 바울도 “그런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결론내렸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는 오로지 사랑의 종교요,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예민하게 신경써야 할 것은 참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이비 사랑을 구별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노력을 멈추면 안된다.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제외한 사랑은 세상에서 환영 받는 종교가들이 상습적으로 부르짖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뼈대를 세우지 않고 시멘트 콘크리트 같은 사랑만을 외치면 세상으로부터 찬사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 선생도 물론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악을 폭격하는 의의 위력이 강렬하였으므로 뭇 소인들이 저를 기피하며 훼방하였다. 의의 폭격적 요소가 빠진 사랑을 우리에게 권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