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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데 없는 흥분
| 現代文보기 | 原文보기 | 성서조선 第 61 號 (1934年 2月)
어떤 기독교 기관지에서 ‘무용한 흥분’이라는 제목으로 성서조선과 그 주필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그 글을 쓴 자의 비열한 행위를 다시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용(有用)’, ‘무용(無用)’이라는 단어가 아주 의미심장하다는 것은 발견하였다.
‘쓸 데 있는 것’과 ‘쓸 데 없는 것’을 재빠르게 구별하려는 것은 모든 공리주의자의 성품인 동시에 직업적 종교가의 머리에서 잠시라도 떠나지 않는 근본 사상이다.
양(梁)나라 혜왕(惠王)이 맹자를 접견할 때에 왕은 인간 맹자를 영접하려고 하지 않고 ‘쓸 데 있는 것’인가 ‘쓸 데 없는 것’인가를 먼저 알고자 하였다. 그래서 묻는 말이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이 나라에 이익을 주심이 있습니까?’ (叟不遠千里而來亦將有以利吾國乎) 라고 하였다.
이로운 것이 있으면 ‘쓸 데 있는 것’이며 이로운 것이 없으면 ‘쓸 데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양 혜왕의 안목으로 보면 ‘성서조선’의 과거 60호는 과연 모두 ‘쓸 데 없는 흥분’이 아닌 것이 없다. 스스로에게나 남에게나 이로운 것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보니 변명하기보다 차라리 먼저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는 바이다.
그러나 눈을 돌려 성서를 살펴 보면 ‘쓸 데 없는 흥분’ 때문에 자기 한 몸, 한 일가를 해친 이들이 어찌 그리 많은가.
이집트 왕궁에서 성장한 모세가 히브리인 노예를 위해 이집트인을 때려 죽이고 미디안으로 도주하게 된 것도(출 2장) 역시 ‘쓸 데 없는 흥분’이라 할 것이다. 이 일 때문에 모세 자신에게는 이로운 일이 없었을 뿐더러,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운명할 때까지의 일생은 고난 덩어리였다.
또한 까마귀가 가져다 주던 밥으로 연명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여호와여 지금은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여 가옵소서’ (왕상 19:4) 라고 탄원하였던 엘리야의 일생도 ‘쓸 데 없는 흥분’ 때문이었다.
끓는 솥처럼 참을 수 없어 외치던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일생도 국가와 민족을 구제하는 효과가 없었으니 그 평생의 열심도 ‘쓸 데 없는 흥분’ 이라고 할 것이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예언자로서 이 ‘쓸 데 없는 흥분’이 없는 이가 없었고,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세례 요한이 포학한 헤롯 왕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도 역시 이 ‘쓸 데 없는 흥분’의 소치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거늘 오직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든다” (마 21:13) 하며 책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시던 어린 양의 진노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만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하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마 23장) 하는 등의 ‘쓸 데 없는 흥분’을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십자가에 달리는 일은 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해관계가 없는 일, 즉 쓸 데 없는 일에만 흥분하였다. 우리도 이 ‘쓸 데 없는 흥분’을 본받고자 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다. ‘성서조선’의 과거에 ‘쓸 데 없는 흥분’이 있었다면 이는 감사할 일이다.
앞으로도 만일 ‘성서조선’이 존재할 이유가 있다면 오직 ‘쓸 데 없는 흥분’을 위한 것으로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