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실제 글쓴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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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종교 윤리적인 교훈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입장은 일반 성도들 뿐 아니라 다수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역시 전반적으로 그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에게 각인된 기존의 그러한 개념이 산상수훈의 본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다.
힌두교도인 마하트마 간디(1869-1948년)는 산상수훈을 즐겨 읽었으며 스스로 그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다음으로 산상수훈을 중요시했다. 썬다 씽은 간디가 비폭력 이론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연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가 산상수훈을 아무리 가까이 두고 수없이 읽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가 산상수훈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다 할지라도 그것은 윤리적 감정에 의한 것일 뿐 하나님의 진리로 인한 눈물은 아니었다.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 중 산상수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적대적인 반 기독교적인 사람들마저도 산상수훈을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산상수훈을 종교 윤리적 가르침 정도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산상수훈을 윤리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한 설령 전체 내용을 아무런 막힘 없이 자유롭게 암송한다 할지라도 그 본질적인 가르침에 근접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그에 대해 별다른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산상수훈을 즐겨 읽으며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며 깊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산상수훈을 윤리 교과서 정도로 이해한다.
산상수훈은 누구나 읽어서 진정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산상수훈을 윤리적 가르침의 보고(寶庫) 정도로 생각하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산상수훈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산상수훈 가운데는 윤리적 교훈으로 생각될 만한 내용들이 더러 나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진리 내부의 원리이며 일반적인 윤리적 가르침은 아니다. 그 내용들은 메시아와 연관된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고유한 삶의 원리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아무리 머리가 좋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박사라 할지라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명한 문학박사들에게 산상수훈을 주고 그 의미를 해석하라고 하면 그들은 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엉뚱한 윤리적 해석을 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그 의미를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으며, 또한 깨달아야 한다. 아무리 세상적 학식이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도들은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산상수훈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주어진 기초적인 말씀이므로 그 가르침을 통해 항상 교회 가운데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으로 기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이성과 경험에 익숙한 인간들은 비록 성도라 할지라도 주님의 음성을 온전히 듣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겸손하게 들으려는 자세보다는 세상살이에서 익힌 이성과 종교적 경험에 따라 성경을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앞선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잘못된 윤리적 해석을 기준 삼아 자기 종교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 경우마저 허다하다. 즉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주어진 진리의 의미를 귀기울여 들으려 하기 보다 윤리화된 설명들을 지식화함으로써 심각한 오류에 쉽게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진정한 가르침을 더욱 겸손한 자세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시대와 환경에 의해 굴절된 우리의 이성과 경험에 의존하기를 거부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그 일을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하며, 우리 역시 혹 잘못 해석하는 부분이 있으면 성령의 책망을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교회사 가운데는 산상수훈의 진정한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설령 부분적으로 옳은 해석이라 할지라도 앞뒤 문맥이나 성경 전체적 의미를 간과한 채 눈앞에 놓인 문자에 치중함으로써 해석상 오류를 범한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 윤리주의는 결국 진리와 관련된 내용을 종교 윤리적 개념으로 바꾸어 놓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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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산상수훈을 올바르게 설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산상수훈의 직접 배경이 되는 마태복음 4장을 잘 이해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4장 1-1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고 그것을 물리치신 내용이 나온다. 이는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과 '뱀' 사이의 긴장 관계가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2절 이하에는 세례 요한이 분봉왕 헤롯의 정부에 의해 체포 구금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의 길을 평탄케 하는 사자로 보냄을 받은 요한(마3:1-3)이 마귀의 세력인 헤롯 정부에 의해 강제 구금되어 피살 위기에 놓인 것은 전쟁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 사실은 주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에 전투가 구체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적대 세력에 대한 전쟁 선포와도 같다. 그런 정황 가운데서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의 어느 산에서 열두 제자들에게 친히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다.
죄악 가운데 존재하는 세상에 신령한 천국이 침투해 들어온다는 사실은 분명한 전투적 개념을 함유하고 있다. 전투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개념이다. 그런 형편에서 주어진 산상수훈의 성경구절을 주님의 뜻과 관계없이 하나씩 떼어 윤리적 해석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적 경륜을 염두에 두고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산상수훈은 결코 일반 윤리적 강화를 위해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구할 윤리적 실천을 위한 방안으로 주어진 말씀도 아니다. 도리어 산상수훈의 내용은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전투 교범과도 같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세상을 이기는 교회의 기본적 규범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이해하기 위해 주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열 둘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의미와 함께 그것 자체로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가진다(계21:12-14. 참조).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고 제자의 숫자가 열한 명으로 줄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맛디아를 뽑아 열두 명이 되도록 수를 채우도록 하신 것이다(행1:21-26). 우리는 여기서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열두 명의 제자들로 정비되고 있는 독특한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구속사의 한 장에서 분명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교회의 기초를 놓으신 것과 같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면 그 위에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신약교회의 기초이다. 즉 신약 시대의 열두 제자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연관되어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고 있다. 열두 제자는 머릿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연결된 열두 기초석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열두 사도가 새 예루살렘성의 기초석이 됨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계21:14). 이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가 교회의 기초석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 기초석이 되는 열두 제자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교회의 기초적 교훈을 베풀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상수훈이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의 기초가 되는 진리의 말씀임을 알고 읽어야 한다. 즉 우리는 산상수훈을 읽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주님의 교회에만 허락된 그 명백한 배타성을 진지하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3>
산상수훈은 제자들에게 일반 윤리를 교훈하기 위해 주어진 일시적인 말씀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허락된 영속적인 진리의 말씀이다. 그 가르침은 잘못된 종교 윤리를 배제하고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즉 산상수훈의 내용은 일반적인 종교윤리를 거부하고 진리를 배경으로 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기초를 제시함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그것은 일반윤리에 대한 배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을 제자들에게 언약으로 보여주고 계신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주님께서 즉흥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역 이후 세워질 교회를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주신 구속사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 말씀은 세상을 향해 개방적이라기보다 주님의 택한 백성인 교회를 위한 폐쇄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폐쇄적이란 의미는 세상에 일반적으로 주어진 종교 윤리적인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에 주어진 진리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주님께 속한 모든 교회는 열두 제자들에게 주어진 산상수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교회를 세워 가는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마음깊이 새겨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가 소유한 특별한 복(福)이 세상의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하는 점과 진리의 배타성을 알게 된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 사이의 상호 긴장 관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교회는 산상수훈을 통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과 구약성경의 의미를 선명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배워야 한다. 그것은 죄악 세상에 대항해야 할 교회의 본질적 지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교회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가를 배워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회의 본질적인 관계를 말해 주고 있다. 불신자들이 종교심으로 기도하는 내용과 전혀 다르며 자기의 종교적 욕망을 추구하는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들의 기도와도 기본적으로 다름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마6:33)이며, 교회는 결코 세상에 얽매인 존재가 아님을 명백히 말씀하고 계신다.
산상수훈은 성도들에게 세상의 간악함과 세상은 항상 주의해야 할 대상이라 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견제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거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온전히 참여해야 함을 산상수훈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모든 가르침이 주님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기초적 배경이 됨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이 교훈이 지상의 교회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기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이므로 우리는 산상수훈의 구체적인 의미를 성경의 총체적 교훈과 더불어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올바르게 설교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야만 한다. 설교자가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로부터 올바른 설교를 기대하기 어렵다. 산상수훈이 올바르게 설교됨으로써 교회가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고린도전서 2장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