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왕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은 위용을 과시하는 늠름한 사자며 호랑이, 그런데 그 힘찬 울부짖음 보다 그 멋스런 자태보다 더 정이 가는 것이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그라질 듯 또 이어지는 풀벌레의 울음소리에 늘 내 마음이 빼앗긴다.
한 목소리로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의미도 가르쳐 주는 것 같고 힘 없이 나약한 벌레에 불과 하지만 수 많은 무리의 가녀린 음성의 조화는 힘센 짐승의 울음보다는 더 아름다운 힘이 스며 있는 것 같다. 가녀린 무리의 힘이
향 짙고 수려한 자태의 꽃들보다 들꽃이 더 좋은 이유와 같다.
꽃에 관한 노래들을 참 좋아한다. 어렸을 때 기타를 치며 즐겨 부르던 노래가 송창식씨의 '꽃보다 귀한 여인'이였다. 딸들이 자라며 노래가 궁상맞다 구박하는 바람에 강산에씨의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를 가끔 흥얼거린다.
가끔 나는 왜 그런 가사의 노래를 즐겨 부르지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굳이 김 춘수시인의 '꽃'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꽃보다 귀한 의미가 되고 싶고 그런 존재가 되고 싶으며 삶의 목적 또한 더 귀한 무엇인가를 찾고 찾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젊은시절 베낭 하나 달랑 메고 밤의 플랫홈을 서성이다가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찾아 가 보았던 쓸슬한 겨울바다도, 눈덮이 산속도 돌아오는 길은 집채만한 무게의 혼란스러운 삶의 의미밖엔 발견할 수 없었던 시간들, 인생의 고갯길을 돌고 돌아 찾아보려 애태웠던 그 무엇, 정확히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면서 찾고 찾았던 그 무엇... 젊은 날의 목마름 속의 허무에의 시간들...
그러나 이제.
찾아오신 주님, 곁에 와 주신 주님. 하늘을 가르시고 오셔서 자신의 육체를 또 그렇게 가르시어 천국문이 되어주신 예수님. 마치 화가가 자신의 그림 속으로 스며들 듯 이 세상을 뚫고 들어오신 우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알게된 진정한 삶의 의미는, 풀벌레처럼 연약한 우리, 가녀리고 향기없는 들꽃처럼 나약한 우리이지만 그곳에 주님이 먼저 찾아 와 주셔서 가르쳐 주신 삶의 의미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고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맘으로 깨달아 알게 하셔서 이 기쁨을 자나깨나 감사치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신 이 사건 앞에 그저 놀라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다만 풀벌레처럼 감사의 울음이 끊일 듯, 사라질 듯 또 이어지는 노래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가녀린 바람에도 일렁이며 춤을 추는 들꽃이 되어 버렸다.
mskong님의 간증을 읽으며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찬 하루의 시간들은 마치 풀벌레의 노래처럼, 들꽃의 춤처럼 꿈결 속의 시간들처럼 마냥 즐겁기만한 삶으로 바뀌어 버린 모습이 비춰지기에 나도 똑같은 맘이 되어 내 맘을 그려본다.
오늘도 '일곱송이 수선화'란 팝송번역곡을 불러 내 맘을 주님께 드린다.
눈 부신 아침 햇살에 산과 들 눈 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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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 이 노래를 주님께 드리리
황금빛 수선화 일곱송이로
이 세상의 고통에서도, 암울한 현실에서도, 환난과 핍박에서도 우리의 울음소리 아니 찬양소리는 풀벌레 같은 그예다 가족의 아름다운 합창 속에서 비록 가녀릴지라도 여여히 흐르고 흐를 것이기에 살포시 미소 지으며 일곱송이 수선화를 비단실로 엮어 말로 형언치 못할 감사함과 더불어 우리 주님께 드린다.
역시 그예다의 안방 마님이시네여^^
저도 은은한 풀벌레들의 합창에 마음이 더 끌립니다.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관여하시는 주님이 어찌나 감사한지..
오늘도 찌르레기 소리지만 내 찬양의 소리를 높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