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번역성경찬송]
요한복음 1장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신약성경의 다른 '말씀'이라는 용례도 원어로는 '로고스'인 것을 보았을때 오역은 아닌것 같습니다, 구원님.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기록에 의하면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요한은 그 창세기 기사를 염두에 두고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은 수단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만 존재하시는데 그분의 '말씀'이란 대체 무슨 개념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듯, 인간이 성대를 움직여 공기의 진동을 매질로 사용하여 타인의 청각 피질에 정보를 전달하는, 그런 류의 현상일까요? 그때는 시간도 공간도 공기도 진동도 언어도 개념도 들을 이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 홀로 존재하셨을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말하시는 그 말씀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된 인격체, 곧 하나님 자신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태초의 예수님은 존재로서의 말씀(하나님)인 동시에 의미전달로서의 말씀(하나님의 말씀)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구원님 그런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번역은 무엇보다 원문대로 단어의 원래 뜻대로 문장구조와 문법 등에 맞춰서 번역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도 문학적 작품이라 저자가 사용한 문학적 기법은 물론 저작 의도와 강조하려는 주제와 앞뒤 문맥의 흐름과 당시 사조와 문화 등도 감안해야 합니다. 예컨대 시문을 산문으로 산문을 시문으로 번역할 수 없으며, 모든 단어도 가장 첫째 가는 뜻에 맞춰서 번역해야 합니다.
요1:1에서 로고스의 일차적이고 가장 용례가 많은 뜻은 '말씀'이며 문맥 안에서 정확한 의미도 말씀입니다. 번역가의 입장에선 말씀 외에 다른 단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아예 고려할 대상이 아닙니다. 저자 요한은 의인법이라는 문학적 기법을 사용해서 당시의 이방인들이 갖고 있던 어떤 법칙이나 진리가 우주를 창조 통치한다는 사상은 틀렸고, 말씀이신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점을 서두에 당당히 밝힌 것입니다.(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평행을 시켜서) 그리고 요한도 독자들이 구원님과 같은 의아심을 가질 수 있기에 말씀이 예수님을 의인화한 표현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2절 이하에 말씀이 바로 독생자 예수라고 자세히 설명한 것입니다. 요컨대 '말씀'은 로고스의 가장 합당하고 완벽한 번역입니다.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는 작업이지 독자가 읽기 쉽도록 바꾸거나 풀어서 설명하는 작업이 결코 아닙니다. 구원님이 게시판을 통해서 여러 번 성경의 번역이 어렵다는 불만 내지 의심을 표명했지만 현재의 성경 번역은 현재로서 완벽한 번역입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다양한 연구들이 집대성 된 것이며 여러 개정본을 통해서 보완해왔습니다. 이전에 올린 글 두편을 아래에 다시 링크하오니 시간나면 꼭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인자로 계셨을 때를 빼고는 항상 (당연히 태초에도) 그 존재 양식은 영광스런 하나님(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음)이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뀐 이곳으로 재림하실 때에는 다시 인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행1:11) 요1:1에서 로고스(말씀)은 예수님의 존재 양식이 아니라 요한이 예수님을 말씀에 비유한 것입니다. '말씀'을 의인화(사물로서 사람을 상징하는 문학적 기법) 시킨 것인데 같은 맥락에서 1:9에선 예수님을 '참빛'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당신께서도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사람들로 쉽게 이해시키려고 그렇게 비유하셨는데 요한은 주님의 그런 말씀에 주목하여서 복음서 전체에 예수님의 그런 비유를 7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 부활과 생명(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참 포도나무(15:1)가 그것입니다. 문학적 양식도 "내가 ~~이다."(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영어로 치면 주어와 be 동사가 맨 앞에 나오는 I am ~~)인데 주님은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비유를 통해 단순명료하게 설명했던 것입니다.
성육신 전의 예수님이나 부활 후에 천국보좌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물질계가 아닌 영계에서 하나님의 본체의 모습으로 계시니까 그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죽은 후에 천국에 갔을 때에 뵐 수 있는 예수님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고 아무래도 인자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럼에도 천국에선 모든 것이 명료해지므로 천국에 입성한 신자들은 예수님이라고 분명하게 알 수 있고 또 주님과 온전한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 초림하셨을 때는 물질계에 오셨기에 성경기록대로 인간으로 실존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여 승천하실 때는 제자들이 볼 수 있는 하늘까지는 제자들이 이 땅에서 보았던 신령한 부활신체였으나 그 이후로는 어떤 모습이셨을지 알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 정체성이 완전한 하나님으로 회복되어서 지금 천국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는 재림 때는 처음 승천하실 때처럼 부활하신 신령한 인자의 신체를 입고 오실 것이며(행1:11) 신자들도 세세토록 왕노릇할 수 있는 신령한 부활 신체로 바뀔 것입니다. 천국에 있던 신자들은 부활신체를 입고 주님과 함께 강림하고(살전4:14) 그 때까지 이 땅에 남아 있던 신자들은 홀연히 신령한 부활신체로 바뀔 것입니다.(고전15:51,52)
성경이 말하는 바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내에서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드렸습니다만. ...... 간단히 줄이면 천국은 영계이고 그곳에서 하나님 본체를 회복하신 예수님의 구체적인 모습은 아무도 모르고 성경도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죽기 전에 물질계에 제한된 인간 스데반에게 공중이지만 가시적 범위 내에 있는 물질계 내에서 보여줘야 하므로 부활하셨을 때의 신령한 인자의 모습으로 보여주었다고 답변드렸습니다. 어쨌든 이미 말씀드린 대로 천국에 입성한 신자는 예수님을 분명히 만나서 알게 되고 주님과 순전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경우는 운명하기 직전에 (입신한 상태에서) 영안으로 영계의 예수님을 알아봤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꾸 답변이 복잡해질까봐 생략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바 요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며 스데반의 영혼이 예수님이 그를 친히 영접하는 가운데 천국으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적으로 한 절씩 떼어서 읽으면 안 되고 앞뒤 문맥의 내용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전체가 그 말씀에 대한 설명인데 1:1은 문학적으로 따져서 두괄식으로 결론 내지 주제부터 먼저 선언한 것입니다. 1절 끝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전제한 후에 곧바로 2절에서 그가(즉 하나님이신 말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설명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예수님에게 해당됩니다. 결정적으로 14절에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명확히 밝힌 후에 18절에서 다시 확인한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보다 일 세대 후에 즉, 예수님과 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직접 목격자들이 거의 세상을 떠난 후에 다음 세대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려는 목적으로 저작한 것입니다. 같은 요한이 지은 요한일서 1:1-4에서도 그런 뜻을 다시 밝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말씀에 비유한 것은 당시 로마제국의 이방인들은 헬라의 로고스(말씀) 사상에 익숙한데 간단히 말해서 우주를 만들고 통치하는 절대적 법칙 내지 진리가 로고스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그 사상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같은 용어를 사용해서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분은 그런 법칙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라는 의미로 태초에 말씀(즉, 독생자 예수님)이 계셨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또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 땅을 창조할 때에 예수님이 2위 하나님으로 함께 계셨고 십자가 구원사역을 위해서 이 땅을 지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2,3절)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계시한 말씀은 당연히 하나님(삼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과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뜻과 계획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장에선 예수님을 말씀으로 설명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