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로서 임무를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질문]
저는 경계선 지능을 가져서 세상 살아가는 일이 너무 벅차며 직장에서 적응도 제대로 못하므로 평범한 삶조차 힘듭니다. 최저 생계비로 겨우겨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 마음을 항상 짓누르는 것은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의무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송하고 내 스스로에 대해서도 많이 속상합니다. 청년부에 참여 못해도 교회 예배는 성실히 참석하고 성경도 자주 읽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주님을 닮아가며 동행하는 삶을 살려고 마음먹고 노력은 하지만 실천이 쉽지가 않습니다. 나를 값없는 은혜로 구원해주셨기에 전도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일꾼이 되어야하는데 난 이게 뭔가, 대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 자신에 대해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과연 구원받은 자가 맞는지 회의감이 들 정도입니다 사실 단 한명도 제대로 교회로 전도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친구를 몇 번 교회에 데리고 간 게 다였습니다. 주변 몇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보기도 했지만 친한 사이일수록 전하기가 더 힘든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자신감 용기도 없는 소심한 성격인데다 대인기피증까지 있어서 주님을 위해 도대체 난 어떻게 은혜를 보답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고 시간만 흘러가는 것이 참으로 씁쓸합니다. 제가 만약 이대로 이 세상을 떠나 주님을 뵙는다면 정말 면목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답변]
지상 명령에 대한 오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모든 신자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하신 계명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자식에게 남긴 부모의 유언이나 다름없기에 신자라면 누구나 준행해야할 소명입니다.
지금껏 상기 말씀을 요컨대 전도하라는 명령이라고만 배워왔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처럼 잃어버린 영혼 한 명이라도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아래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 이웃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여서 한 명이라도 교회로 인도해 오지 못하면 신자로서 하나님 일에 충성하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전도에 대한 열성과 노력이 따라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영적 부담감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해서 질문하신 내용처럼 신앙에 회의를 가지거나 구원 받았는지 의심할 정도로 좌절할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전도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주님이 마지막으로 주신 상기 계명도 그 초점이 전도에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약 40일간 지상에서 제자들과 새로운 가르침 없이 교제하다가 승천했습니다. 당신의 메시아 되심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만져보게 하여서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해 증거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요일1:1,2)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당신처럼 양떼를 치고 먹이는 본을 보여준 것입니다.(요21:15-18)
아직은 신자들의 공동체가 조직되기 전일 뿐 아니라 제자들은 십자가 구원 진리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순절에 지혜의 영인 성령이 강림하자 비로소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승천하실 때 제자는 약 120명밖에 안 되었으므로 당연히 전도가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상기 말씀은 전도로 끝나지 않고 세례를 주어서 당신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지상명령을 주신 뜻은 전도보다는 교회를 세우라고 당부한 셈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서 성도끼리 서로 자라가며 모두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전도는 필수적으로 가장 먼저 행할 바이나 전도 자체가 최종 목적이거나 신자가 해야 하는 전부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따로 있다.
흑암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따로 불림을 받은 자가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뜻은 죄악과 사탄과 죽음 앞에 당당히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도가 신자들이 행할 바의 전부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래서 초대교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예수님)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세우게 하려는 일을 맡기려 여러 직분자들을 세워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인 전도에만 전념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복음 전하는 자만 전도하고 다른 이는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님), 주님이 분부한 것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고, 가르친 대로 지킬 수 있게끔 일상의 삶을 돌보며 권면 지도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명령을 교회 안에 직분자들을 세워서 그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실현시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어떤 형태로든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일을 한 셈입니다.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조직체 가시적인 지역 교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두 명 이상의 성도가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는 것도, 아니 주님 사랑 안에서 교제하는 것도 교회입니다.
심지어 성도가 혼자만 있어도 교회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므로 혼자가 아닙니다. 예컨대 오지에 선교사로 가면 결신자가 생길 때까지 상당히 오래 동안 혼자서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며 예배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 선교사 자체가 교회입니다.
질문자님의 경우 경계선 지능을 가져서 다른 사람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도 벅차다면 구태여 전통적인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러지 않았다고 벌을 주지도 꾸중하지도 않으며 그것으로 섭섭해 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이 질문자에게 가장 소원하시고 또 실제로 형제님의 삶을 현재 간섭 인도해가시는 방향은 다른 사람처럼 정상적인 삶을 영위토록 하는 것입니다. 직분자를 세우는 뜻이 “1) 성도를 온전케 하며 2)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장애자인 형제님을 주님께서 정상인처럼 살게 하는 것은 바로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에 해당됩니다.
나아가 형제님이 주일에 교회에 성실하게 출석하는 것만으로도 교회에서 봉사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해당됩니다. 형제님을 너무 무시한다고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이전의 저의 한 글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자들이 바다에서 용감하게 서핑하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는 다른 장애인들은 물론 절망과 좌절에 빠진 정상인에게마저 용기와 소망을 준다고 썼습니다. 지적 경계인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며 삶에 실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와 동일한 효과를 내기에 아주 훌륭하게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방식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0-47)
누가가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주신 지상명령을 제자들이 그대로 준행하여 교회(아직은 조직체 교회라기보다는 단순히 성도들의 정기적인 모임)가 설립되고 부흥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강력히 임재한 성령의 역사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 삼천 명이 회심했습니다. 베드로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사도’이자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 후에 새롭게 제자가 된 사람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교제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그 모임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거나 당장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며 함께 떡을 나눴습니다.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한 것입니다. 이제 대다수 사도들과 제자들은 직접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교사’와 ‘목사’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매일 모이는 종교적인 모습 때문에 칭송받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직 기독교식의 예배가 생성되기도 전이라 교제, 기도, 찬미, 구제, 전도하러 성전에 모인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 재물과 소유를 기꺼이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모습으로 칭송을 받았을 것이며 또 바로 그런 모습에 감동을 받은 불신자들이 회심했을 즉, 전도되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고 그래서 사람들로 칭송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의 전도는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된 교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훨씬 후대에 생성된 것입니다. 단순히 십자가에 매단 예수가 메시아로 부활했으니 그분을 주로 영접하면 부활 승리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는 단순한 메시지였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러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 즉, 예수님 그분이 복음(福音, good news)이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
말하자면 당시의 전도는 신자들이 함께 모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며, 사회적인 계급 신분 재물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으로 이뤄졌던 것입니다. 세속의 사람들로선 신자들이 자기들과는 전혀 다르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영적인 찔림을 받고 신자들의 모임에 기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솔직히 한 번 따져보십시오. 오늘날의 기독교가 이전만큼 부흥되지 않고 도리어 쇠퇴하는 까닭이 전통적인 방식의 전도를 안 하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니면 신자들이 신자답게 살지 못해 사람들의 칭송이 아니라 오히려 욕을 먹고 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 답은 당연히 후자이지 않습니까?
신자들이 순종 헌신 충성해야 할 일을 너무 종교적인, 예컨대 전도에만 그것도 전통적인 방식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잘못입니다. 현재 자기가 처한 여건과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어떻게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답게 세상 사람과 다르게 거룩하게 살고 있는 모습부터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신자라면 하나님이 그럴 기회를 마련해주시면 당연히 말로써도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실제로 평소 전도하고 싶다고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하고 있으면 스스로 놀랄 정도로 주저함과 떨림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아주 잘 설명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생깁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회를 주신다고 말씀드린 까닭입니다.
간단한 예로 현실의 여건과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지금 당장 큰 고난에 빠져 있어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단순히 의무적으로 종교적인 겉시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님과 교제 동행하면서 그분의 은혜를 누리며 즐겁게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평소 누구에게나 열심을 갖고 전도하는 일은 그런 은사와 재능을 따로 받아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들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문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이 근거 조건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1장까지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이제 복음 안에 들어온 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서 12:1부터 권면하겠다는 뜻입니다.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자기의 전부를 주님께 온전히 바치라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주님만 모시고 그분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초대교회의 사람들처럼 성도들끼리 함께 모여서 세상과 전혀 다른 사랑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의 전도를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오히려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오히려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고 신자가 신자다워야 하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나아가 전통적인 전도에만 집중하고 막상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신자 개인이 주님과 교제 동행하고 있지 않다면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야단친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제가 만약 이대로 이 세상을 떠나 주님을 뵙는다면 정말 면목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걱정했습니다.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감히 장담하건대 지금 이런 질문을 하신 것만으로도 주님은 너무나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먼 훗날 주님을 대면할 때도 정상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그 어려운 상태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주일 예배를 꼬박꼬박 드린 것만으로도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틀림없이 받을 것입니다.
8/26/2019
아래의 글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신자로서 저의 소명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