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령의 열매도 사실은 감정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의 은사와 열매
신자의 삶은 마땅히 불신자 때와 달라야 하고 또 달라질 수 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 세상에서 형통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를 알지 못할 때는 그냥 죄의 본성대로만 살면 그만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거룩한 삶을 살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고 또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그러나 신자가 됨으로써 세상 속에 살되 하늘의 보물을 이 땅에 실현해야 하는 책임과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사실상 더 고달파지는 셈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신”(엡1:3) 까닭이 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6절) 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10절)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내적으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여 거룩하게 되고 외적으로는 십자가 복음으로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그분의 사신(使臣)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불신자 때와는 달리 인생이 혈과 육, 즉 눈에 보이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추구하는 씨름이 아닌 것을 깨닫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대신에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엡6:12) 대적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자의 속에는 아직도 부패한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또 외부로부터 세상과 사단의 유혹과 시험이 신자를 넘어뜨리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신자 스스로는 이 싸움을 제대로 감당해 낼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신자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을 내주(內住)케 해주시고 평생토록 당신의 보호와 인도에 따르도록 하신다. 역으로 말해 성령의 온전한 인도를 받지 못하면 신자라도 언제든 다시 옛 사람의 모습을 띌 수 있다는 뜻이다. 정말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써야 한다.”(엡6:18) 또 그럴 때에 불신자 때와는 전혀 알지도 못했던 성령의 열매가 그 삶에 풍성하게 맺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성령의 열매를 자꾸만 신령하고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방언, 신유, 계시, 환상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성령이 역사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더러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지, 성령이 모든 신자의 개별적 삶에 역사하여 맺게 해주는 거룩한 열매가 아니다. 그 받은 은사로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 세운 ‘덕’이 성령의 열매다.
은사를 쉽게 풀이하면 각 신자마다 성령이 다르게 역사하는 특별한 기능의 종류를 말한다. 말하자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자는 방언을 못하듯, 특정 은사를 받지 못하면 특정 사역의 기능만 없을 뿐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과 이미 맡기신 재능에 따라 당신의 뜻대로 각양의 은사를 골고루 나눠주신다. 고린도전서 12장에 열거된 은사들 말고도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자기 특유의 은사가 있다.
반면에 성령은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모든 신자에게 동일하게 내주하고 있기에, 성령의 열매는 신자라면 누구라도 맺을 수 있다. 단지 때와 장소와 사건과 사람에 따라 그 맺히는 열매의 양만 다를 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외적인 신령한 은사를 받지 않았더라도 그렇다는 뜻이다. 외적 은사를 받지 않았기에 자신은 사역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거나 적게 맺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은 신앙 지식의 결핍이기 이전에 게으름이다. 신자가 된 본분과 사명에 대한 분명하고도 철저한 인식이 있다면 그럴 수는 없다. 적은 소자가 목마를 때에 자기가 갖고 있는 물 한 그릇, 주릴 때에 떡 하나 기꺼이 나눠주는 것이 바로 은사이며 성령의 사역이자 그 열매이기도 하다.
성령의 열매에 대한 기본적 오해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도 신자들은 몇몇 오해를 하고 있다. 우선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으려고 스스로 노력한다는 점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 열매를 가능한 많이 맺으려고 소원하고 또 노력하는 것 자체는 아주 선한 일이며 신자라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만 열매를 스스로 맺으려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성경이 성령의 ‘열매“라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이겠든가? 아주 간단하다. 나무는 가지, 잎, 열매가 그 종류마다 각기 다른데 뿌리에 따라 좌우된다. 사과나무에는 사과나무의 줄기와 잎과 열매만 달리지 포도나 복숭아의 그것들이 달릴 리는 없다. 뿌리가 성령이면 줄기, 가지, 잎, 열매 전부도 당연히 성령이다. 요컨대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성령 당신께서 자신의 성령다우심을 스스로 표현해 내는 것이 성령의 열매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5-7)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신자가 가지로 붙어만 있으면 당연히 그분의 열매는 맺힌다고 한다. 다른 말로 당신이 아닌 다른 나무에는 붙어 있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그러면 당신이 아닌 그 다른 나무의 열매가 자연히 맺히고 또 그러면 불에 던지어 사르게 된다는 것이다. 상기 본문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도 동일하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엡6:22-24)
먼저 성령의 열매(fruit)는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다. 신자가 금지한다고 금지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자가 성령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자연히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면 된다고 했다.
성령에 뿌리박는 일을 너무 거창하고 심각하게 여길 것은 없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다. 육체에 영향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여부는 신자가 예수님과 세상 둘 중 어느 쪽으로 향해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이 드러나기를 소원하고 자기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면 성령의 열매는 당연히 맺히게 된다. 반대로 삶과 인생이 세상과 죄악 쪽으로 향하면 그쪽 열매가 맺힐 수밖에 없다.
세상과 죄악을 향하여 맺는 열매는, 다른 말로 육체의 정과 욕심에 따라 좌우되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우선 “육체의 일”이라고 표현했다.” “일”(works)이란 반드시 스스로 의도해서 자신의 힘을 동원해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자발적으로 성령 대신에 육체를, 즉 죄의 본성에 따르기로 선택해서 그대로 따라간다는 뜻이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도덕 교육의 부족이나 고달픈 현실과 추악한 외적 환경의 탓이 아니라, 자기가 고의로 악을 선택한 결과다. 바꿔 말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정과 욕심을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듯이, 육체의 일을 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의도적으로 악을 거부해야 한다.
육체의 일은 또 “현저하다”고 했다. 다른 말로 “눈앞에 훤히 보이는” 먹고 마시는 것들, 즉 혈과 육만 붙드는 씨름을 벌리는 것이 바로 육체의 일이라는 뜻이다. 나아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사단의 일이라는 것을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자가 혹여 죄를 짓게 되면 그 현저한 추함과 성령의 깨우침으로 죄책을 절감하여 주님께 바로 회개하며 나아가야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훈련과 연습을 쌓아서 맺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신자는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싸워야 하지만, 그 이전에 반드시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여기서 육체는 인간의 신체가 아니라 삶에서 오직 혈과 육만 추구하는, 다른 말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으려는 죄스런 본성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그 본성의 궁극적인 삯은 영원한 불 못의 사망뿐임을 철두철미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윤리적 죄악과 싸우기 이전에 자신의 본성부터 죽여 없애야 한다. 물론 죄 된 본성자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십자가 복음의 진리만은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 따르며 언제 어디서나 영적 전투를 하겠다는 각오와 헌신이 먼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내면의 근본 마음 자세부터 바꾸고 그 바뀐 마음으로 옛 본성의 잔재들이 솟아오르려는 충동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순간순간 막아내야 한다.
성령의 열매의 참 모습
그럼 성령의 열매는 어떤 모습으로 맺히는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다. 윤리적 종교적으로 좋은 말만 다 갖다 놓은 것이 아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의도적으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열매는, 외부적으로 현저히 드러나는 일과 달리, 사실상 전부 신자의 개인적 내면에 열린다는 뜻이다. 요컨대 마음이 아주 평온한 상태다. 또 바로 그런 내면의 상태를 신실하게 유지한 채 다른 성도와 불신자 이웃과도 진정한 화합을 이루는 모습이다.
죄의 본질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분리(分離)다. 인간 영혼에 죄가 스며들자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필연적으로 자기 내면과도 분리되어 스스로 부끄럽고 두려워졌다. 아무리 우물을 파도 밑 빠진 독으로 허무하고 갈급하기만 하다. 나아가 모든 인간이 그런 분리된,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원래의 모습에서 왜곡되고 파괴된, 내면의 상태를 갖고 상호관계를 맺게 된다. 자연히 이웃과도 참사랑의 섬김은 완전 실종되고 갈수록 분리만 늘어날 뿐이다.
육체의 일의 모습을 보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다. 이 전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분리다. 하나님, 자신, 배우자, 이웃, 심지어 자신의 건강한 신체와도 분리가 일어난다. 그것도 인간이 스스로 좋아서 쾌락을 탐닉했고 또 인생의 목표로 혈과 육을 평생토록 추구한 결과가 그렇다. 성령이 임재하지 않는 내면은 사단에게 미혹될 수밖에 없는 바람에 생긴 필연적인 결과다.
신자는 달라야 한다. 세상 어떤 일보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한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게”(엡5:16) 된다. 성령이 충만해진 신자의 내면은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게 해준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을 기꺼이 짊어지셨듯이, 신자 또한 혈과 육에 대한 염려는 없어지며 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오직 하나님이 주신 소명 위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산자가 그 소명을 하나씩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신다.
다른 말로 성령의 열매의 가장 근본적 의미는 “하나님과 동행하여 이뤄내는 내면의 평강”이라는 뜻이다. 이 땅에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에 천사들이 성육신의 의미를 두고 어떻게 찬송했는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인간들로 십자가 복음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말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인들의 심령에서 죄를 씻어주심으로써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회개를 이렇게 촉구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당신께로 나오면 수고와 무거운 짐들이 벗어지고 “마음의 쉼”을 얻는다고 했다. 분리만 만들어 내는 육체의 일들로선 절대로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하지만, 성령의 열매를 통해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신자가 누리는 은혜도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쉼을 얻어 즐거움과 감사가 넘치는 모습인 셈이다. 성령의 열매의 의미도 신자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떤 사건을 겪더라도 내면의 감정이 아름답게 절제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지정의가 주님만을 향해 있기에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감격으로 충만해진 상태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라. 그 안에 감정의 모순과 충돌과 격발이라고는 하나도 없지 않는가? 반면에 육체의 현저한 일들도 가만히 살펴보라. 그 안에 악하고 추한 감정이 소용돌이치지 않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신앙의 궁극적 도착지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다. 그 순서에 주목해야 한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중에 첫째가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다. 신앙으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항상 기뻐하는 것이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육체의 소욕을 물리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만 신앙생활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감정의 충만을 목표로 성령의 충만을 구해선 안 된다. 예컨대 찬양이나 치유 집회에서 감정이 충만해졌다고 그런 곳만 찾아다녀선 안 되는 법이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여 그 열매를 맺으면 자연히 감정의 충만은 따른다. 신앙으로 이룰 목표가 아니라, 신앙으로 인해 도착되어지는 지점이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신이 주시는 생수, 즉 성령을 마시면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동일한 현상을 두고 본문에서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다고 표현했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 열매가 맺히면 신자의 내면은 평강을 얻고 나아가 기쁨과 감사가 자연적으로 솟아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은 현재 그 믿음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믿음이 없다는 뜻은 아님, 반증이다. 신자 안에 성령은 내주해 있지만 눌려 있거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험과 유혹으로 인해 자신의 어느 부분에선가 예수님과의 연합에 균열이 가있고 그분과 동행하는 길이 굽어졌기 때문이다. 성령이 맺어주는 열매를 소망하기보다는 육체의 일을 스스로 이루려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택해 믿음을 가지려는 자들의 일차적 목적이 무엇인가? 환난과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도 하지만 사실은 그전에 마음에 최소한의 위로라도 얻으려는 것 아닌가? 예수를 믿는 은혜와 특권은 그런 소망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귀하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롬 8:31,32)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이 신자를 위해 생명을 바치셨는데 세상의 어떤 것이 그 사랑 안에 있는 신자를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예수를 진정으로 주로 모시고 있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경은 환난 중에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명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완전하고도 영원한 화평이 이미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지 않는가?”(롬5:3-6)
성령과 감정의 관계에서 신자들이 마지막으로 범하는 잘못은 감정이 충만해지면 신앙에 문제가 생겼거나 장애가 나타났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경건과 거룩이 반드시 감정의 메마름과 동행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한다. 바울처럼 자기가 처한 외적 환경이 풍요든 궁핍이든 간에 자신의 소명을 하나님 당신의 능력으로 이뤄주고 계시기에 그분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자 거룩이다.
신자는 아무리 환경과 여건이 어렵고 고달파도 기쁨과 소망을 잃어선 안 된다. 이웃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하는 것도 도덕적 양심과 종교적 의무감으로 억지로 해선 안 된다. 주 안에 있는 은혜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이 너무나 귀해 남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령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현실적 형편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크게 형통하지만 영혼은 피폐한 불신자 이웃에게 복음의 소망을 기꺼이 소개하여 구원으로 초대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더러 무슨 일을 해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것이 엄숙하고 진지하게 종교적인 경건의 모습을 갖추라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로마 지하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면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뭐라고 말했는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4,6) 바울은 자기 인생의 목표를 오직 복음에 따라서 살고 죽기로 했다. 그처럼 십자가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또 그 은혜를 실제로 누리고 있는 신자라면 자연히 성령의 열매는 풍성히 맺히고 그 결과로 내면의 평강도 어김없이 따르기 마련이다. 신자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거이자 능력이다.
감정은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아주 좋은 것이다. 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난다. 따라서 감정이 아름답게 솟아나게 만드는 역할을 성령이 하며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하고 추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따라서 신자는 소극적으로는 자신의 감정이 죄악에 계속해서 조종당하지 않도록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성령의 인도에 충실히 따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아름답고도 풍성하게 조절되도록 해야 한다.
신자에게 비상(非常)하고도 특별한 감정이 생겼다고 해서 무조건 도외시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그 중심을 보신다고 했다. 경건을 떠는 신자보다는 차라리 울부짖는 신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성령의 열매로 인해 자신의 감정이 아름답고도 풍성하게 되었다면 오히려 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나아가 신자 스스로도 감정을 아름답게 절제함으로써 성령님의 사역에 추진력을 더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라면 비록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지는 못하더라도, 주님이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긍휼을 확신하기에 최소한 언제 어디서라도 염려 불안 의심 불만은 없앨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성령의 가장 기초적인 열매이다.
9/15/2008
사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경건을 떨까 무섭습니다.ㅠㅠㅠ
수십년 동안 교회에서 배워온 것은 경건의 연극, 그런 연기수업이였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