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수님의 감정절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예수님의 공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모든 희로애락을 똑 같이 겪으셨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을 억제하기보다는 표출한 적이 훨씬 더 많다. 아니 매번 그렇게 했다. 분노하고 야단쳤는가 하면 격려하고 칭찬했다. 때로는 슬피 울고 한탄하며 외로워했지만 기뻐하고 함께 어울려 즐겼다. 심지어 아주 염려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단 한 번도 분노하지 말아야 할 때 분노했거나 울어야 할 때에 웃은 적은 없다. 나아가 그런 감정의 표출이 각각의 사건과 상황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미치는 파장에 도움이 되어 상승작용을 일으켰지 그 반대가 된 적은 결코 없었다. 당신의 감정 표현마저도 당신의 가르침과 치유와 복음 전파 사역에 긍정적 효과만 불러 일으켰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분의 감정 표현을 모든 사람들이 다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는 뜻이 아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선 불같은 분노 아니 저주를 퍼부었기에 그들로 당신에 대한 증오심만 불러 일으켜 죽일 모의를 꾸미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지 않는가? 반면에 세상에서 부정한 죄인으로 취급되어 소외 격리 되었던 세리, 창녀, 문둥병자 같은 이들에겐 진정으로 자기들 마음을 털어놓고 당신과 교제하기를 소원토록 만들었다.
예수님이 반드시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기뻐해야 할 때 기뻐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감정 각각에 부여하신 목적대로 절제 했다는 뜻이다. 나아가 그분은 지정의 전체가 작동하여 실제로 말하고 행하고 살아가는 삶 전체로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뜻을 온전하게 실천하면서 사셨다. 물론 그 뜻은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강력하게 도래시키는 한 가지 목적이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셨다. 삶의 모든 세밀한 부분까지 즉, 감정의 표출까지도 하나님의 목적을 구현해 내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절제하셨다. 그분은 하나님 본체이기도 했지만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간이란 측면에서 보면 그분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것이다. 모든 인간적 성정은 우리와 동일하시되 한 번도 성령의 충만함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이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5:19,20)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첫째 이유는 물론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 값을 담당하여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구유에서 아기로 나셔서 우리와 똑 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고 또 삼년간의 공생애를 보낸 것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시고 소원하셨던 참 인간의 모습을 모든 죄인들 앞에 가시적으로 회복시키셨다.
그래서 그분의 보혈의 공로로 거듭난 모든 신자가 구원 이후에 살아야 할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되셨다. 바울이 고백한대로 이제는 사나 죽으나 그분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동시에 그분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줄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그분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배우고 닮아야할 유일한 본보기(Role Model)이자 신앙 자체를 자라게 해주는 능력이 되기도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감정을 절제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은 신자에게 두 가지의 역할을 감당하신다. 우선 그분이 감정을 절제하신 방식을 보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과 달리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그분더러 간섭하셔서 바르게 고쳐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뜻이 참으로 놀랍고 너무나 은혜롭지 않는가? 우리가 보고 배워서 따라야할 온전한 모습의 인간이 실제로 우리 앞에 계셨고 또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우리도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당신보다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고(요14;12), 또 위에 인용한 요8:29에선 당신께서도 성부 하나님보다 큰일을 보인다고 했지 않는가? 나아가 우리가 연약해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우리가 진정으로 소원하여 그분께 엎드리면 당신의 권능으로 그렇게 만들어 주시지 않는가?
차지도 덥지도 말라.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감정을 그렇게 완벽하게 절제할 수 있었는가? 다시 말하지만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여 오직 그분의 목적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한 삶만을 사셨기 때문에 자연히 감정도 그 목적대로만 절제 표출되었다. 그 결과로 당시의 거짓 지도자들에게 극도의 증오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충돌도 불사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전혀 아끼지 않았다.
바꿔 말해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감정의 올바른 절제와는 그 내용과 모습이 완전히 딴 판이었다. 그분은 우리처럼 짐짓 경건한 체 하면서 온유와 평강으로 사람들을 대하여 자신이 의롭고 선하다는 인상을 남들에게 심어주려고 구태여 노력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온전한 뜻만 이루려 하셨다.
그럼에도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이 하나 있다. 그분의 내면에는 언제나 온유와 평강과 자유가 충만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이시고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분은 여전히 완전한 인간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단 한 시도 하나님을 놓지 않고 그분이 시키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성령 충만의 상태란 감정적 충만이나 신비한 초자연적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으로 자기 속에 가득 채우는 것이다. 또 그러면 성령의 인도대로 아무 주저함 없이 담대하고도 기꺼이 따를 수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도 감정을 잘 절제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아니 이미 누차 강조했지만, 감정의 과격한 외적 표출이라고 결코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인식부터 가져야 한다. 예수님처럼 생명까지 바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내적으로 평강과 온유와 자유를 누려야 한다. 신자끼리니까 덕을 세운다든지 혹은 은혜로 넘어가자는 핑계로 무조건 부드러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인격과 품성을 성자처럼 경건하게 바꾸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선 최우선 과제나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차지도 덥지도 않은 자는 내침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지 않는가?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려다 보면 과감하게 사람들에게 차게도 덥게도 비춰 보일 수 있어야, 아니 그렇게 행해야 한다. 또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신자에게 목적하신 올바른 감정의 절제다.
물론 모든 인간이 죄에 찌들어 있다. 감정에 상처와 왜곡이 많다. 아무리 복음 전파라는 한 가지 목적으로 감정을 표출한다 해도 자칫 본의 아닌 오해를 살 수 있다.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 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고 염려한 것처럼 항상 경건하고 의롭게 행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처럼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 같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처신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유일한 목적조차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함이었지 않는가? 그는 왕이나 방백 같은 어떤 권력자 앞에서도 비굴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선배 사도인 베드로를 야단쳤고 동역자 바나바와는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기까지 했다. 그는 이미 “모든 사람에게 자유”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기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성령 충만한 가운데 내면에는 온유와 평강과 자유가 넘쳤지만 외면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인도대로 따랐고 감정도 그 인도대로 표출했던 것이다.
심리 치유의 결정적 단점
최근 교계에선 내적 치유가 성행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 내지 학대가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신자답게 사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보고 심리학적 방안을 동원해 치유시키는 것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다. 성경적으로 제대로만 활용하면 간혹 불신자를 복음으로 접근시키고 또 이미 믿은 자를 성숙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심리학적 치유에는 결정적인 단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의지력으로 고치게끔 하는 것이다. 아무리 심리학적 방안을 동원했다고 해도 여전히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이나 성령의 간섭을 배제해선 궁극적이고 영속적인 변화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는 그런 상처나 눌림을 야기한 잘못과 그로 파생하는 부작용들, 예컨대 공황장애, 정신분열, 알코올 마약중독, 동성애, 자녀학대, 성적학대들을 단지 인간적 결점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이 도무지 거역할 수 없기에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성향 내지 본성으로 해석해 본인에겐 아무 책임이 없다고 친다. 따라서 실제로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어도 죄로 취급하지 않는다. 기왕의 모든 도덕적 죄를 심리적 육체적 하자로만 여긴다.
예컨대 미국에선 정상적인 부모가 자녀를 훈육할 목적으로 매를 때리면 범죄가 되며 감옥에 간다. 그러나 알코올이나 마약에 찌들어 매일 자녀를 혁대나 몽둥이로 구타하는 부모는 본인 잘못이 아니기에 감옥 대신에 정신병원에 수용하는 것으로 그친다. 정신적 장애가 본인도 어쩔 수 없게 만들었기에 오히려 보호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이다.
이 땅은 아담의 원죄로 이미 타락되어 있다. 모든 자들이 죄의 본성을 안고 태어나기에 언제 어디서나 죄인끼리 함께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요컨대 죄는 반복적으로 생산 확장되기 마련이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그 세기만 조금씩 다를 뿐 상처와 눌림을 수도 없이 받고 살아야 한다. 아담 이후부터 지금까지 죽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이 모인 곳에는 죄가 썩어 진동했고 인간관계의 변질과 왜곡과 파괴는 일상적이었다.
말하자면 심리적 장애는 예수님 당시에도 만연해 있었다.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가만히 살펴보라. 심리적으로 분석하여 예수님 빼고는 장애가 없는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바울이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실토한 이유는 수많은 예수 믿는 신자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던 죄책감과 수치심이 엄청나게 컸기 때문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 받은 다윗이 지은 시편들의 초반부에는 온전한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의심, 불신, 심지어 비방, 분노까지 표출되어 있지 않는가?
누구나 갖고 있는 이런 심리적 장애는 가장 먼저 감정의 장애로 나타난다. 어떤 측면에선 내적 치유란 바로 감정의 올바른 절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감정을 근본적으로 바르게 절제하는 일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죄에서 구원 받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무슨 문제든 그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치유도 올바르게 된다. 내적 상처와 눌림이 죄에서 온 것이라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선결 문제다. 반면에 인간적 결점에 불과하다면 스스로 고치면 될 것이다.
내적 치유도 예수님의 몫
위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님이 구세주 하나님이면서도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온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서 사셨다는 것은 그를 믿고 따르는 신자에겐 너무나 큰 위로이자 권능이 된다. 내면의 치유도 결국 신자가 그분이 사셨던 모습을 배우고 따르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기 힘들거나 여러 방해가 있을 때는 성령의 권능으로 간섭해 달라고 그분에게 간구하면 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능치 못할 일이 없는데 그 가운데 당연히 내적 치유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3-5) 하나님은 신자에게 새로운 영을 부어 주사 모든 죄악을 사하고 모든 병을 고쳐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로 거룩하고 아름답게 변화되어서 당신의 뜻대로 살겠다고 간구하는데 안 들어주실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구하여 하나님만 의존하면 된다.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바라는 것은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빌2:15)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신자에게 있는 어떤 흠이라도 하나님이 고쳐 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분명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절)라고 했지 않는가? 신자에게 빛의 자녀로 살고 싶은 소원을 두게 하고 또 그것을 실제로 행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했다.
내적 치유에서도 문제는 자기 내면의 모든 상처와 눌림이 자신의 죄로 인함을 겸허히 인정하여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겠다는 소원이 생겨서 그렇게 실천하고 있느냐의 여부일 뿐이다. 명백한 죄마저 허물로 위장하고선 인간이 개발한 기법으로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한다고 내면이 깨끗케 될 수는 결코 없다. 인간의 영혼과 마음은 스스로는 고치지 못하고 오직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치유할 수 있을 뿐이다.
감정의 절제도 마찬가지다. 능치 못하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감정으로 겪는 모든 문제를 있는 그대로 실토하여 고침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 연약함을 다 체휼하셨다. 감정 상의 온갖 기복을 다 이해하시고 또 온전하게 절제하셨던 분이다. 이제 우리는 무슨 문제든 언제 어디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그분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요컨대 신자마저 감정 절제를 불신자처럼 인격 훈련의 과제로 보아선 안 되고 영적인 문제, 특별히 죄와 연관해서 이해하고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두에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우리가 감정을 잘 절제하기 위해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크게 보아 네 가지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면서, 영적 대적의 실체를 확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계속 구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이란 바로 이웃 사랑인데 남에게 먼저 베푸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제 그 각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묵상해 보기로 하자.
(*) "Why Christians Can't Trust Psychology." by Ed Bulkley, Ph. D. 1993, Harvest House. page 94.
1/6/2009
감정의 굴곡들을 주님 앞에 가져와서 진솔히 고백할 때 고침 받을 수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죄로 인한 감정의 교차들을 어떻게 수습할 수 없었을 때, 그 혼란들을 몽땅 다 남의 탓으로만, 특히 목회자들의 잘못으로,
그들로 인한 생채기였기에 몽땅 다 기가막힌 목회자들과 교회들에게만 돌렸던 것을 깨닫기까지...ㅠㅠ
그 감정의 공황의 상태에 이 곳에 인도되었던 것, 정말 우연이 아님을, 성령님의 손 잡아 이끄셨음을 절절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갈길이 멀고 먼 미완성인 상태인지라...
계속 성령님의 섬세하신 간섭하심을 의탁드리며 또 목사님의 글들로 열심히 배우며 걷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