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외적표현이 연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조회 수 1982 추천 수 167 2008.12.01 21:41:36
1. 2. 감정의 외적표현이 연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영어 관용구로 Poker Face라는 말이 있다. 알다시피 포커는 손에 숨겨진 카드로 상대를 교묘히 유도 내지 속이는 기술로 승부를 가름한다. 그런데 끗발이 높거나 낫거나 간에 딜러에게 카드를 받자마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거나 배팅하는 모습이 어눌하면 상대가 금방 속내를 눈치 챈다. 결국 자신의 감정을 일절 죽여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대방으로 하여금 도무지 모르거나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승부의 관건인데, 그런 냉정하고 변함없는 표정을 짓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현대 사회는 자기 P. R. 시대로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신의 허점 내지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두가 Poker Face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인간관계를 부드럽고도 아름답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감정의 교통이 사라진 삭막한 세대가 되어버렸다. 과도한 개인주의 풍조 같은 여러 다른 요인들도 있지만 분명 무한경쟁 시대의 영향으로 강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할 성도 간에도 그렇다. 항상 의연하고 일자로 꽉 다문 입술에 무슨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이 믿음이 강하고 경건하다고 착각한다.

감정은 외부 상황에 대한 너무나 자연스런 일차적 반응이다. 감정의 교통이 사라졌다는 것은 결국 서로 간에 자연스럽고도 온전하게 반응하지 않고 가식적 교제만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남들 앞에 아주 센 척 하는 것은 내면으로는 겁먹고 있다는 반증일 경우가 많다. 그렇게라도 해서 두려움을 극복해보자는 것이다.

흔히 “남들 앞에선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라고 권면하지만 그 말 자체로 이미 본인은 약하다는 실토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약한 것을 약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강한 것처럼 하라는 것은 남을 속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약함을 기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벌써 약함의 표상이다. 약함은 약하지 않게 고쳐야만 없애지는 것이다. 남들을 한두 번은 몰라도 끝까지 속일 수는 없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때로는 선의로 남들 앞에 강하게 보여야 할 경우도 있다. 예컨대 경기가 안 좋을 때에 사장이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종업원들은 불안하고 사기가 저하된다. 당연히 생산 능률은 저하되고 자칫 부하들이 제 살길을 찾느라 회사 돈을 빼돌리는 부정마저 저지를 수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강한 표정을 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직원들도 회사 사정과 경기의 흐름을 빤히 알고 있는데도 그러면 사장이 뭔가 뒤로 다른 궁리를 하는가보다 의심을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솔직히 힘들다고 실토하면서 종업원들의 협조를 구하면 함께 양보하고 희생해가며 회사를 살릴 수 있다.    

결국 그 판단이 아주 미묘하고 어렵긴 해도 감정은 드러내야만 할 때 드러내고 죽여야만 할 때 죽여야 한다. 감정을 부인, 가장, 과장해선 그 효과는 일시적일 뿐 얼마 안 가 반드시 부작용이 나타난다.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 즉 절제(節制)해야 한다. 부인, 가장, 과장은 전부 거짓의 변종이다. 거짓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드러나게 되고 또 그 본질상 어떤 능력도 없다.

말하자면 사장이 어려운 회사 사정을 실토한다고 해서 직원들이 다 협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엄살로 받아들이거나 뒤로 돈을 빼돌리는 전제로 인식될 수도 있다. 초점은 진실이 포함되어 있는지 여부일 뿐이다. 그래서 심지어 사장이 내면의 감정은 억제하고 의도적으로 센 체 할 때도 정말로 자신의 유익보다 회사와 종업원을 먼저 위하고자 하는 진정성이 드러나면 얼마든지 하나가 될 수 있다.  

감정의 외부 표출이 남에게 약하게 보일까, 신자의 경우 믿음이 없는 경박한 자로 비췰까, 염려하는 것은 이미 자신감이 없다는 뜻이다. 특별히 신자는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창조되었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얼마나 귀하게 바뀌었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표시다. 신자는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는 절대로 없다. 따라서 신자라면 어떤 위급한 경우에도 당당해야 한다. 또 당당하려면 정말 자신의 믿음에 진실해야 한다. 진실의 뒤에는 항상 하나님권능이 함께 하지만 거짓의 뒤에는 사단의 농간이 활개 칠 뿐이다. 다른 말로 진실 되고 순수한 감정이 표출 될 때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더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10:21)  70 명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다녀와 귀신들도 주의 이름으로 자기들에게 항복하는 것을 기뻐하며 예수님께 보고했다. 그 보고를 들은 예수님도 성령으로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감정의 부인, 억제, 가장, 과장 없이 순수하게 표출하여 상호 성령이 주시는 기쁨 안에서 교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어서 “이것을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 이것은 물론 당신이 구세주라는 진리인데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나지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육체적 연령의 구분은  몰론 아니다. 복음을 순수하게 믿어서 전하고 또 전하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자는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라는 부연 설명대로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을 진실 되게 표출하여 교통하라는 것이 생기는 대로 다 드러내라는 뜻은 아니다. 만약 상대에 대해서 싫은 기색이 있거나 시기하는 것마저 그대로 드러내면 그 사이는 어떻게 되겠는가? 재삼 강조하지만 감정을 절제는 하되 그 안에 거짓은 절대 포함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특별히 신자의 경우는 예수님처럼 성령 안에서 절제하라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감정을 절제한다고 해서 초자연적인 감동에 벅차 거룩하고 신령해진 모습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가장 근본적 역할은 신자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누리며 나누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감정을 절제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죽더라도 상대를 살리고 공동체의 덕을 세워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확장시키는 모습으로만 실현되어야 한다.

쉬운 예로 부부 사이에는 서로 사랑하고 순복하여 가정을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 가꿔나가겠다는 동일한 목표와 소망에 입각해서 감정을 절제하라는 것이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7)

세상 사람처럼 서로 자존심을 앞세워서 상대에게 지지 않겠다는 의도로 부부 관계를 영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부러 센 체 혹은 약한 체 할 것 없이 실수든, 허물이든, 약점이든, 죄든 있는 그대로 순전하게 서로에게 고백하고 나누라는 것이다.

나아가 서로 양보 희생하며 돌보라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한 의미만도 아니다.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다시 자세히 보라. 신자 부부는 천국까지 함께 가는 존재라고 했다. 살다가 수틀리면 언제든 헤어지면 그만인 사이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천국까지 동행할 소원이 있다면 감정의 교통에 비록 때로는 조금의 과장이 섞일 수는 있겠지만 그 진실성은 절대 없애지 말라는 것이다. 최초의 부부가 벌거벗었으나 즉, 서로에게 감출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부끄러울 것도 하나 없었듯이 말이다.  

한 마디로 감정을 제대로 절제하려면 감정의 외적 표현이 연약함 혹은 그 반대로 강함의 표시도 절대 아님을 확신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실 되게 행하여 함께 자라가기를 소원하는 자들 사이에는 감정의 순수한 외적 표현이 오히려 더 큰 은혜와 권능이 됨을 체험할 수 있다. 특별히 신자 부부사이부터 그런 소원을 갖고 함께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진정한 기쁨을 나눌 수 있다.  

김광찬

2008.12.01 2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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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 감정에 대한 목사님의 글들을 통해서 그동안 왜곡되어 있던 감정의 문제들이 조금씩 조금씩 풀려나가는것 같습니다. 늘 한결같이 헌신하시는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김순희

2010.10.31 10: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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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숨기지 말라는 것은 참 쉬운데 감정 절제는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상대방에게 감정을 속이면서 진정성이 결여된 감정으로 아무리 사랑하는 것 처럼 가장해도
그런 것에는 능력이 따르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진정의 사랑, 그 사랑이 기반이 되어서 이웃의 잘잘못을 대할 때도 나도 똑같은 죄인임을
잊지 말고 위에서 부으신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여야함을 배웁니다.
계속 계속 더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사라의 웃음

2012.04.26 21: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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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드러내야만 할 때 드러내고 죽여야만 할 때 죽여야한다."
정말 미묘하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면 되는 것임을 배웁니다.
지금껏~~ 제 자신이 주인이였기에~~ㅠㅠ
회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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