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조회 수 2075 추천 수 187 2008.11.07 20:20:51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C. 건강한 감정 절제


현대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출세와 성공이다. 개인이든 단체든 동일하다. 당연히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이 오로지 그 쪽으로만 지향한다. 말하자면 지성적으로 많이 알아야 하고 의지적으로는 결단과 끈기의 싸움을 벌려야 한다.

반면에 감정적 측면에선 초조, 염려, 불안, 실망, 분노, 지겨움, 우울증 등에 잠겨선 아예 실패의 지름길로 치부된다. 나아가 기쁨과 즐거움 등도 자칫 비지성적이고 유약한 모습으로 비춰질까 함부로 표현하지 못한다. 다른 말로 감정을 무시 억압하는 일에 지성과 의지를 총력 동원한다. 역으로 따지면 감정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바탕 위에서만 지성과 의지를 작동한다. 신앙의 역할조차 반드시 그렇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런 무한경쟁에 찌든 어른이 가끔 어린이들 노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저렇게 천진난만할 때가 너무 좋았어. 나도 한 때 저랬었는데. 이제 메마르다 못해 왜 이렇게 비정한 자로 변했지? 내가 나를 봐도 너무 잔인한 것 같아 놀랄 때도 가끔 있으니 말이야.”
    
어린아이들은 절대 감정을 무시하지 않는다.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바탕에서 지성과 의지가 작동한다. 아이들더러 순진하다, 순수하다는 표현은 인위적, 가식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이들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흔히 표현하는 대로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출세와 성공 지향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간단한 유추만으로도 감정을 건강하게 절제할 수 있는 확실한, 어쩌면 가장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방안이 하나 도출된다. 바로 출세와 성공지향성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된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더 빨리 더 손쉽게 차지하려 들면 부정적 감정이 발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고 또 그 절제도 부정적 방식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불교식의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거지가 되면 이 땅을 아름답게 발전시킬 수 없다. 또 필연적으로 따르는 현실적인 불편함과 무소유를 이루려는 강박감 등에서 파생하는 감정의 손상이 크다. 나아가 사람의 욕심이 재물 욕심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경제적 무소유를 이룬다고 해서 온전한 무소유가 된 것이 아니다. 성욕 명예욕 권력욕 자존심 등 다양한 욕심을 완전히 죽여야 한다.

감정이란 외부 환경과 접할 때 생기는 자연적 반응이다. 따라서 감정을 자신의 내면에서 완전히 빼버린다면 모를까 세상에서 살아 있는 한에는 무소유만으로 건전한 감정 통제는 절대 되지 않는다. 역으로 완전하고도 진정한 무소유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스님들이 사실상 경제적으로는 무소유가 되어 있지만 평생을 수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지정의 자체는 인간 존재를 이루는 필수 요소다. 없애려 노력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대신에 올바르게 절제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만 고차원으로 부여하신 선물이기에 당연히 그분의 뜻대로 절제해야 한다. 한번 생각해보라. 처음부터 인간 스스로 지정의를 만들어 자신에게 주입했다면 스스로 빼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을 만드신 분의 목적대로 통제하는 것이 최선이자 완전한 길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간혹 신자들 가운데도 불교식의 무소유를 신앙이 도달해야 할 목표로 착각하는 자가 있다. 신자는 당연히 자신을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머리 둘 곳도 없이 예수님을 따르며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신자의 비움과 자기 부인의 핵심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려는 뿌리 깊은 습성을 죽이는 것이어야 한다. 경제적, 사회적, 인간적 요소를 다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연히 감정의 부인은 더더욱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감정을 하나님과 함께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요컨대 자기 생각을 비우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대체해야 한다. 정확히는 자기 생각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실제 그럴 수도 없지만, 하나님 생각으로 바꿔 나가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출세와 성공지향성을 빼버림으로써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방안도 동일한 원리가 성립된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부인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데에 지성과 의지를 전적으로 동원하다 보면 자연히 아름답고 충만한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역으로도 어떤 감정이 생기면 부인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방향으로 절제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최근 성공하는 인생으로 키우려면 아이의 감정지수(EQ; Emotion Quotient)를 높여주라고 요구한다. 감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커졌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감정을 단순히 성공의 도구로만 생각한다. 엄격하고 냉정한 것보다 따스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를 잘 이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또한 출세지향성에 묶여 있기에 반드시 감정 절제가 온전히 되지 못한다. 또 타고난 천성은 무시하고 억지로 새로운 성격을 만들려는 것이라 자칫 무소유의 경우와 반대의 감정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신자의 경우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잠정을 절제해야 한다. 감정지수를 하나님의 의와 나라 안에서 키워야 한다. 다른 말로 지정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그분의 영으로 먼저 충만해져야 한다. 따라서 감정지수를 영혼지수(SQ; Spirit Quotient)와 함께 키워야 한다. 아니 영혼지수를 먼저 높여야 하고 그러면 감정지수도 자연히 오른다. 역설적으로 말해 신자만이 알고 따를 수 있는 하나님 안에서 성공하는 비결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바른 것을 찾으려면 항상 잘못된 것부터 제거하는 것이 순서다. 이 장에선 감정 절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먼저 따져 보고, 감정 자체에 대한 오해는 이미 살펴보았기에, 그 후 예수님의 감정 절제 방식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하자.  

1. 감정 절제에 대한 오해

1.1.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세상사람 백이면 백 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감정적이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아이들은?”, “밥 줘!”, “누워 자자.” 하루 세 마디만 말한다는 목석같은 경상도 남자라도 그렇다. 심지어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수십 년을 면벽(面壁) 수도하는 스님도 그렇다. 흔히 엄마는 감정적이고 아빠는 이성적이라고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다. 엄마의 울음은 겉으로 터져 나오지만 아빠의 울음은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것이 다를 뿐이다. 심지어 갓난아기도 우유 먹고 기저귀 갈고 누워 자고 우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더 심하다.

그런데도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자가 의외로 많다. 특별히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인들은 더 그렇다. 신앙이란 무조건 경건해야 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 스스로 선해져서 구원을 얻는 종교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선물로 받은 기독교 신자마저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호흡이 있는 동안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더 자주 우는데 그 감정적 원인이 슬픔에 국한되지 않는다. 행복해서, 감사해서, 힘들어서, 너무 아파서, 심령이 쓰라려서, 억울해서, 분노가 치밀어서 등등 경우마다 사람마다 다양하다. 오래전에 미국 만화에서 본 내용인데 남녀가 데이트하러 영화 보러 갔다. 아주 슬픈 영화였는데 남자는 우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 끝까지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 여자가 아니 이런 슬픈 영화를 보고도 울지 않는 메마른 사람이라면 더 이상 만날 필요 없다고 선언했다.

최근에는 훈남(훈훈한 남자)과 가정적인 남자가 인기를 끌고 있다. 다른 말로 감정적인 사람이다. 감정 자체가 잘 생기지 않던, 표현을 잘 못하든, 절제를 잘못하든, 어떤 경우가 되었든 감정에 메마른 사람은 결국 자기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일부를 부인, 외면, 최소한 잘못 다스리고 있는 셈이다.  

다른 말로 자기 내면의 중심이 온전하게 서있지 못한 것이다. 예컨대 헛웃음의 대표로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운데도 너털웃음만 웃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미 자포자기(自暴自棄) 한 상태라서 그렇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중심을 가장 잘못 세운 것이지 않는가? 내면에서 분명히 솟아오르고 있는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과 같다. 헛(가짜) 웃음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가?    

성경에 가장 짧은데도 가장 심오한 의미를 지닌 문장이 하나 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3-35)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 후에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 오신 장면이다. 우리말에는 연결된 문장처럼 번역되어 있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이다. 영어로는 “Jesus wept.” 단 두 단어로 된 문장이다.  

예수님이 울게 된 감정 상태는 어떠했는가?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즉 분노가 끓어오르고(통분), 안타깝고 불쌍해서(민망) 우신 것이다. 단순히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범한 죄악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에 대해서였다. 사단과 죄악과 죽음에 대해선 통분해 했고, 대신에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있는 당신의 자녀에 대해선 민망해 한 것이다. 정말 애끓는 심령으로 충만해져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흐느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일부 유대인들이 신령한 능력을 지녔고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 왜 죽은 자 하나 못 살리느냐고 예수님을 비방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36-38절)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통분히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자신을 비방했다고 화를 낸 것이 아니다. 초자연적 이적을 일으키는 당신의 겉모습만 본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애처롭다 못해 화가 난 것이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라는 요구는 오직 이 땅의 보이는 것에만 묶여 있는 물질적 인생관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메시아라면 당연히 이 땅에서의 먹고 마시는 것을 풍족하게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예수를 제대로 몰랐던 그 유대인은 외부 환경과 접촉하여 처음 생기는 내면의 반응대로만 행동하는 불신자의 전형적인 예였다. 즉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기분과 떠오르는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다. 감정의 올바른 절제는 전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출세성공 지향적으로만 감정을 통제했던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롭지 않는가?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 가서 화를 내는 자는 거의 없다. 애도를 표시하기도 부족한데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슬픔에 잠겨있는 자들에게도 큰 실례다. 장례 예식 절차가 아주 잘못되었다든지, 죽음에 직간접으로 원인을 제공한 자가 현장에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상적인 장례에 그것도 죽은 당사자와 친족을 보고서 화를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직접 화를 낸 것은 아니다.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기에 죽음에 묶인 인간의 비참한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그 마지막 대적을 향해 화를 내셨던 것이다.

그러다 당신의 죽음이 눈앞에 닥치자 어떻게 하셨는가?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22:41-44)

마지막 절이 우리말로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마치 기도를 더 뜨겁게 열심히 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원어의 뜻은 다르다. 괴로워서 고뇌하고 번민했다는 뜻이다. 주님은 십자가 처형으로 겪을 극심한 육신적 고통을 알고 계셨다. 또 완전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심판 받고 결별 당할 심령의 아픔도 처절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대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던”(5:7) 것이다.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을 동원해 로마를 물리치고 골고다로 가지 않으셔도 될 분이었다.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기도한 이유는 물론 곧 있을 사단과의 싸움을 대비하고 성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자 하는 철저한 헌신 때문이었다. 기도 중에 사단의 방해가 격심해지자, 즉 십자가로 가지 말라는, 하늘로부터 사자가 나타나 도울 정도였다. 육신적으로는 그 잔을 비켜가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는”(히5:8-10) 길을 택하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묵묵히 골고다로 오르기로 했다. 말하자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선 통분하고 민망해 하셨던 죽음에 완전히 무력한 인간의 비참한 처지를 당신의 보혈의 공로 안에서 오히려 죽음을 넉넉히 이기고 영생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여셨던 것이다.

이 두 경우에서 보면 한 마디로 예수님도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그러나 외부적 환경에 대해 자연적으로 생긴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으셨다. 두 번 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를 따랐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셨다. 신적 인격이 유한한 인간의 지정의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셨다. 그런 분이 감정적으로 너무나 섬세하셨고 때로는 그 감정을 겉으로, 그것도 우리 눈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드러내셨다.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욕설을 퍼부었고, 팔복에 대응하는 저주의 설교도 하셨고, 성전을 청소하며 불같이 화를 내셨고, 수제자 베드로를 가혹할 정도로 꾸짖으셨다.

다른 말로 자신의 감정에 아주 충실하셨다. 그러나 절대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는 행동하지 않으셨다. 간과해선 안 될 것은 행동에 감정의 흔적이 아예 묻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신의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셨다. 그러나 그 묻어나온 감정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일치하는 방향으로만 채색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5:19,20)

예수님도 이러할진대 신자가 감히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그것도 자신의 경건한(?) 신앙을 드러내기 위해, 자부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다.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자신의 실체 일부를 부인하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의 신앙 중심이 바르게 서있지 않다는 증거일 뿐이다. 감정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은 잘못이지만 감정적으로 풍부하고 민감해지는 것은 좋은 것이다.

감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올바르게 표출하면 자신의 영성이 풍부해질 뿐 아니라 자신의 주위를 더욱 아름답고도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로 변화시킬 수 있다.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자부하는 것의 잘못부터 깨달아 오히려 감정적인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감정을 건강하게 절제할 수 있는 가장 첫걸음이다.  

11/7/2008

김순희

2010.10.29 12: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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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모습에서 배워야겠군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겟세마네의 죽음 목전에 둔 상황에서의 그 모습,
감정을 억누른 것이 아니고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셨으나 기도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신 모습을 잘 배워야겠습니다.

저의 경우는 감정의 억제가 문제가 아니고 감정에 너무도 충실해서 문제가 많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올바르게 표출하는 그 과제를 목사님의 글로 도움을 받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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