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가?(2)

조회 수 1627 추천 수 140 2009.02.11 21:27:56

2.1.2. 어떻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가?(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신자가 평강을 얻어서 감정을 잘 절제할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 예수님과 바울처럼 소명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정말 자신의 삶을 통해 그분의 뜻을 드러내려고 소원은 하는데 자기 소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몰라 안타까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복음으로 거룩하게 바꾸고 싶기는 한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소명에 대한 첫째 오해

그 이유는 소명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소명을 자신의 평생을 바치며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구체적인 일이라고 이해한다. 예컨대 어느 날 하나님이 자기에게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라든지 북한탈북자를 도우며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불러주는 분명한 음성을 듣든지 기도하여 확답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역자가 아니라도 전도나 봉사 같은 종교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반드시 어떤 특별한 직종의 일에 대한 계시를 어떤 방식으로든 명확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자신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혹 그런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아무 일 하지 않고 한 없이 기다리는 사람마저 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자기는 아직 소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다. 또 절대적으로 틀렸다. 모든 신자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이미 소명을 다 받았다. 우리말 소명(召命)의 문자적 뜻은 불러서 명령을 내린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신자란 뜻은 하나님에 의해 세상에서 불러내어져 명을 받고 다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목사나 선교사만이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고전1:2)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고전1:17)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목사 선교사를 비롯해 모든 신자가 평생을 두고 일관되게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졌다. 불신자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해 둘 사이에 있는 담을 허무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일과 직업을 택할지 기도해 응답받는 것은 이미 받은 소명을 실현하는 방안일 뿐이다. 비유컨대 세상에 줄 떡은 이미 받았기에 상자, 봉지, 광주리, 그릇 등 어디에 담든 온전히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운반수단을 정하지 못해 지체할 필요, 이유, 시간, 여유는 전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지시해주지도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서 소명만 실현하면 되니까 그렇다. 따라서 신자는 명확하게 악한 일이 아닌 이상 세속 직업을 무엇이든, 아니 반드시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며 또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 둘 뿐이다. 유별나게 종교적인 일을 해야만 한다는 법은 결코 없다.

소명에 대한 둘째 오해

소명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그 실천 방식에 관한 것이다. 말로만 복음을 전하려 든다. 바울 사도의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고 하면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는 권면을 따라서 정말 시도 때도 없이 그러려고 덤빈다. 직장 동료, 고객, 동업자 등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지를 건네주고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들이민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듯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접근하여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전 9:21,22) 상대의 성격, 학식, 사고, 관습, 가치관, 등과 충돌하여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최선의 범위 내에서, 때로는 그런 것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고 말한 의미도 무작정 아무에게나 전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의 능력으로 반드시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바울조차 하나님이 “아무쪼록 몇몇”을 구원해주기만 바랐다. 구원의 때는 오직 하나님의 몫이기에 자신은 전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자가 전해야 할 복음도 단순히 종교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은혜에 믿음으로 동참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는 반드시 전해야만 할 핵심이다. 그러나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고 했다.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다. 전하는 내용도 예수님이자, 전해야 할 방식도 그분이 하신 대로 따라야 한다.

바꿔 말해 신자가 바로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하셨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으라고 했다. 신자더러 오직 당신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신 모습대로 살라는 것이다. 예수를 전하는데 예수의 모습이 실제로 드러나지 않고는 당연히 불가능하지 않는가? 가뜩이나 이해하기 힘든 십자가 복음을 말로만 전해서 상대를 납득시키려 드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 아닌가 말이다.  

베드로 사도도 신자더러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어떻게 선전하라고 권면했는가?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1,12) 악행을 금하고 선한 일을 행하라고 했다.    

그런데 왜 구태여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이라고 표현했겠는가? 신자들이 전도하면서 악행을 했다는 말인가? 아무 선행과 공로 없이도 구원 받고 또 구원 후에 지은 어떤 죄도 예수 안에서 다 용서 받는다는 복음을 세상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고 비방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교회 안에 들어오면 이제 죄와 죄책과는 완전히 결별한 것으로 오해하여 실제로 악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행하는 신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전도는 선한 행실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선행만으로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몸으로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지 않는 한 아무리 교리를 전해도 소귀에 경 읽기 내지는 오히려 역효과라는 것이다. 현재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입장이 솔직히 어떠한가? 기독교 신자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광신자이고, 교회는 사회 기관보다 더 부패하였고, 기독교는 혼자서만 잘난 척하면서 다른 종교인 내지 불신자를 열등한 존재처럼 취급한다고 여기지 않는가?

그럼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한 가지 뿐이다. 한 손에 코란을 다른 한 손엔 칼이 아니라, 한 손엔 십자가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의 섬김을 쥐어야만 한다. 전자만 쥐고 있으면 현재 같이 광신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요, 후자만 쥐면 일반 종교나 사회기관과 차별을 둘 수 없다. 천국 복음이 아니라 사회 복음으로 전락할 뿐이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 길은?

지금 단순히 소명에 관해 설명 드리려는 뜻이 아니다. 신자들이 자기 소명을 잘 모르고 있으니 신앙이 성숙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의 평강마저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명을 직접적인 목회선교 사역으로 한정하는 자는 그 일에 헌신하고 있지 않는 한 항상 죄책감과 부담감을 떨칠 수 없다. 또 세속 직업을 천직이라고 알아도 하나님이 명료하게 계시해 주지 않았다고 여기면 그 일에 계속 충성하고픈 열의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항상 때를 얻든 못 얻든 말로서 교리를 전해야만, 한 마디로 전도를 해야만 소명을 실현한다고 믿으면 생업은 뒷전으로 제쳐둔 무례한 광신자가 되기 마련이다. 직접적 사역만 성스럽게 여기면 현재 하고 있는 세속의 일은 아무 가치와 의미가 없다고 오해한다. 언제든 형편과 여유가 닿으면 직접적인 사역으로 전환하고픈 궁리나 소원만 품게 된다.  

심지어 세상에서 따로 부름을 입어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는 의식이 없는 신자도 많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그냥 자신의 의지로 믿은 것이다. 성령의 간섭으로 십자가 안에 온전히 들어간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해 신앙도 전부 자의(自意)로만 판단 결정 시행한다. 자연히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세상 사람과 똑 같이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른다. 그 동안 열심히 믿은 능력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믿은 표시마저 찾을 수 없다.

“하나님 제가  믿었지 않습니까? 성실히 봉사하고 헌금도 많이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이런 힘든 일을 주십니까? 물론 저를 연단시키려고 그러시는 줄 저도 압니다. 그러나 그만큼 기도했으면 이제 응답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그 동안 열심히 믿은 표시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항구적인 마음의 평강은 전혀 없고 그저 주위 여건에 따라 감정이 춤춘다. 오히려 하나님더러 자기가 믿은 표시를 내놓으라고 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시편은 신자가 하나님과 관계를 올바르게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강단에서 신자에게 항상 강조하는 바는 분문 말씀대로 오직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항상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틀린 권면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성경이 복 받는 길로 “악인을 닮지 말라”는 권면부터 먼저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것은 순간적으로 나쁜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런 악한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말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은 그런 악행이 몸에 붙은 습관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셋을 방지하려면 주야로 율법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한 해석은 아니다. 그 해석은 신자가 행하는 특정한 악행 하나를 두고 봤을 때에 해당된다. 그러나 분명히 “복 있는 사람은” 그 세 가지를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미 그 셋을 금하고 있기에 복 있는 자로 바뀐 자에 대한 설명이다. 그 세 가지를 하지 않아야만 복 있는 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복 있는 자의 상시적(常時的)인 품성, 태도, 습관, 신앙에 관한 설명이다. 따라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사고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는 것은 그들과 생활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은 인생관 자체가 하나님을 거역해 무엇이든 스스로 해치우려는 자들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사고방식, 생활방식, 인생관 등이 되살아나거나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에 유혹당할 때마다 그것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읽으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기보다는, 세상과 하나님의 가치를 정확히 구별하여 담대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요컨대 세상을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본문은 신자라면 세상 사람과는 다른 확고한 소명의식을 갖고서 그 구체적 실천방안을 분별하여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로 불러주신 그분의 뜻 안에 완전히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복이 있다는 것이다. 신자로서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왜 꼭 그 일을 하면 안 되는지, 또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이미 물이 마르지 않는 장소에 옮겨져 있다. 나무가 스스로 시냇가로 옮겨가지는 못한다. 신자는 이미 복 있는 존재로 바뀌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물가에 심겨져 있기에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권능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인이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 채, 다른 말로 온전한 소명의식 없이 무조건 기도하고 말씀 보았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단순히 은혜와 권능을 받고 싶다고 하나님이 다 그러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신께서 시키신 일이 아닌데도 단지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기도하고 말씀 보았다고 신자가 소원하는 일 모두를 응답해 주실 리는 없지 않는가?

이런 너무나 간단한 원리도 모르니까 기도 응답이 안 되면 불안, 염려, 의심, 불만이 가시지 않는다. 감정의 온전한 절제는 절대로 따를 리가 없다. 감정은 완전히 신앙과 천적이 되어버렸다. 신앙이 없거나 부족해서 감정이 잘못 절제 되는 것이지, 감정이 잘못되어 신앙이 나빠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마음이 가장 평온할 때가 언제인가?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장 마음이 평온할 때가 언제인가? 다른 말로 온갖 염려 불안 분노 시기 최소한 잡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언제인가? 찬양과 기도한 후인가? 물론 원칙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신자마다 다 그런 것도 아니며 대개의 경우 곧 다시 감정의 침체가 몰려온다. 그 이유는 하나다. 신앙을 자신이 염려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동원하고 있기에 여전히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마음의 온전한 평강은 어떤 일에 완전히 몰두해 있을 때뿐이다. 심지어 누워 자고 있을 때보다 더 정신적 안정을 얻는다. 그럼 평생을 두고 할 일이 분명하고 또 그 일을 왜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까지, 그것도 힘들 때는 언제든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의 시키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면 두말할 여지가 전혀 없지 않는가? 예수님과 바울의 예를 보라. 소명을 붙들어 실천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길이자 최상의 심리치료이지 않는가 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는 평생을 두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증거 하라는 근본적 소명은 다 받았다. 목사나 선교사라고 더 고급한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일반 신자와 하나 차이 없는 동일한 소명을 받았을 뿐으로 단지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 내지 통로만 다를 뿐이다. 신자가 이 소명을 확신하지 않고는, 그것도 자신의 하는 일을 통해 실천하되 말로 교리를 전하기보다는 행실을 통해서 그분의 향기를 자연스레 드러내겠다는 온전한 헌신이 없으면 아무리 종교적 도덕적으로 의로운 일을 해도 진정한 평강이 없다. 기도와 말씀에 아주 열심인지라 교회에서 큰 존경을 받아도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아니다.

예컨대 신자 학생은 전도보다 일단 공부에 최대한 열중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현재 맡긴 일이 학업이다. 즉 그리스도 증거의 소명을 실현하는 방식이 바로 공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목적부터 달라야 한다. 인기학과를 졸업해 출세해서 돈을 벌기보다는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려는 목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하고 싶고 잘하는 일을 통해서 그 목적을 실현하려 해야 한다. 세상의 현재 풍조가 강요하는 학문보다 자기가 소원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그 일에 노예로 묶이기에 하나님의 소명을 구현할 마음 태세는 물론 그럴 현실적인 여유조차 전혀 생기지 않는다.  

또 공부하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 절대 부정 행위나 요령으로 학점만 취득해선 안 된다. 가정적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어도 불평과 염려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 정 힘들면 최소한 평강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이며 또 어려운 가운데도 그분만의 뜻과 영광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주위 학생들에게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 생활 방식, 인생관에 따라 살고 있음을 확연히 드러나게 해주어야 한다. 그들로 신자의 선하고 거룩한 행위와 태도와 품성에 대해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게 만들어야 한다. 이 땅에 뿌리를 박아 안일하게 살기 보다는 하늘에 영혼의 소원을 두며 어려움도 감수하는 자로 보여야 한다. 물론 그럴 기회만 닿으면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시냇가에 심겨져 있다는 것, 그분께 은혜와 권능을 항상 공급 받고 있다는 것, 예수님을 닮아 그분처럼 살고 있다는 것,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 등등 모두의 뜻은 하나다.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 받은 천직이며 그 일을 통해, 특별히 선한 행실이 자연스레 열매 맺힘으로써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 자체가 바로 전도하는 말씀이 되어야 하고 또 전하는 복음의 교리도 그것들과 일치해야 한다.

감정을 절제하려는 방식부터 배우려 하지 말라. 근본적으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겪거나 누구를 만나도 마음의 평강부터 얻어야 한다. 그 마음의 평강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몰두해 실현하고 있을 때에는 자동으로 얻어진다. 구태여 따로 얻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평생에 걸쳐서 자기가 하는 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에게 마음의 평강이 없을 리 없고 환경과 사람과 사건에 따라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이 있을 수도 없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일차적인 자연적 반응으로 나쁜 감정이 들 수 있다. 그런 일시적인 부정적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말씀 보며 기도하되 반드시 자신의 소명을 다시 확실하게 붙들어야 한다. 물가에 심긴 나무라도 쉬지 말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가 어떠했는가? 솔직히 그분은 도무지 우리가 따를 수도 자신도 없다. 정작 닮아야 할 자, 바울을 보라. 그가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한 없이 자애롭고 사랑스런 감정이 들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가 항상 기뻐할 수 있었던, 최소한 감정의 심한 기복이 없었던 유일한 근거와 이유가 정말 무엇일지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2/11/2009  


Junglan Pak

2009.02.19 09:00:08
*.143.173.134

이 글을 네이버 블로그로 감사하며 담아갑니다.

김순희

2010.11.09 13:22:34
*.165.73.38

광신도 부류에 속한 때가 있었습니다.^^
집안일은 팽개치고 전도에 심방에 그저 교회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일을 하였던 때.
전도를 나를 위한 전도, 내 얼굴을 내세우기 위한 전도, 내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전도. 그래서 그 전도를
위한 전도가 얼마나 얼마나 추악한 죄였음을 깨닫기까진 참 여러 어려움과 참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
같습니다.
소명에 대한 잘못 가르침 받은 까닭이였습니다.
심지어 쌀이 떨어져 배가 고파도 고기 먹고 난 자처럼 이쑤시개를 사용하라는 가르침...ㅠㅠ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아무리 병이 나도 아프지 않은 척..
정말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한국의 큰 교회에서..

잘못 가르쳐진 말씀들이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혼란을 가져왔고 평안한 척 하는 기술만 늘게 되었고
아프지 않은 척, 배부른 척, 척 척 척...
연기력이 가히 연극배우 수준이 되었었습니다.ㅠㅠ

바울의 기뻐함의 이유, 참 평안은 오직 하늘 가르시고 오시어 산 떡이 되어주신 울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임을 철저히 배우고 철저히 체험하게 하는 말씀들이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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