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법

조회 수 2372 추천 수 128 2009.05.18 18: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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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법


뾰족한 묘수가 없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소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려면 오직 성령의 인도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려고 할수록 사단의 방해가,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히는 것도 포함해서, 심하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와 악령의 방해를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각각의 특성을 먼저 알아봤는데 사실 순서가 좀 뒤바뀐 측면이 있다. 그 특성들은 인도나 꾐을 받고 있는 과정 혹은 결과로 나타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런 특성을 깨닫고 나면 이미 성령 내지 악령의 상당한 이끌림을 받고난 이후다. 심지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사단에게 넘어간 경우도 왕왕 있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법”이란 인도를 받기 전에 알고 있어야 할 과제다. 그런데 이 또한 사실은 뾰족한 묘안이 없다. 현실적으로는 인간이 사단과 하나님 둘 중에 하나를 미리 정해 놓고 그 일방의 인도만 받을 수는 결코 없다. 또 일을 진행하는 중에도 성령의 인도인지 사단의 방해인지 제대로 분별하기 힘들다. 나아가 신자가 어떤 선한 길을 택하든 사단은 방해하며, 반대로 아무리 잘못된 길에 빠졌어도 성령은 간섭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찬양을 열심히 불러서 마음의 평강을 얻거나 감정을 고양시키고, 신령한 은사나 능력이 임하여 주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성령이 인도해 주실 것을 온전히 믿고 그 영적인 흐름에 가만히 내어 맡겨야 한다는 식의 방안들이 사실상 큰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인도를 받는 데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해서 사단의 방해나 자기 생각의 개입이 전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 대체 성령의 인도를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성경이 말하는 현실적 해결책은 하나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 사단의 방해, 자기 생각 중 어느 것인지 모르니까 더더욱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사단은 눈속임에 능한 천사 모습으로 주로 나타나니까 역시나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 확신을 얻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물론 악령이 이끄는 대로 가면 까닭 모를 불안, 초조, 염려가 수반 되어 자꾸만 뭔지 부족한 감을 지울 수 없다. 즉 확신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반면에 성령이 인도하는 경우는 평강, 자유, 기쁨 등이 따라 오며 앞으로 나갈수록 충만과 확신이 생기는 특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미 인도를 받고 있는 과정 내지 결과이므로 사전에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법으로 참조할 수는 없다.  

나아가 사단이 방해하는 경우도 불안 초조 대신에 오히려 평강 확신이 따를 수도 얼마든지 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가르치자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말렸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의 마음에 얼마나 정의, 자부심, 자신감, 평강 등이 가득 찼겠는가? 예수님이 야단치지 않았다면 신이 나서 더 떠벌렸을 것 아닌가? 그는 사단이 자기 생각을 주장했으리라고는 아예 상상조차 못했다.

이미 말했듯이 사단은 어떤 사안 하나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 하나가 가장 선하고 옳으며 최고라는 확고한 인식이 없다면, 비록 오해 착각 선입관 고집 등등 부정적 요소가 작용했더라도, 집착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마저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하고 있음에도(고전6:6,7) 세상 법정에 호소하면서까지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에 집착한다는 것은 분리를 넘어서 자연스레 고립될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 역으로 말해 사단은 그래서 외로운 사람, 스스로 남과 담을 쌓는 사람, 아주 부끄러운 죄나 실패에 빠져 남에게 의논도 하지 못하는 사람, 자기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 외골수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서 접근한다. 또 그런 사람들이 사단에게 잘 넘어간다.  

따라서 성도가 사단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면 동료 성도와 성령 안에서 교제해야 한다. 어려운 문제나 부끄러운 실수마저 털어놓고 신앙적 자문을 구해야 한다. 성경 말씀에 바탕을 둔  위로, 격려, 충고, 권면, 도전 등을 서로 나눠야 한다. 사단의 꾐에 대한 다양하고도 객관적인 분별력을 얻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모여 기도해야 한다. 명색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믿음에 천재가 없기에 더더욱 그래야 한다. 각자의 생각들을 서로 나눌 때에 하나님의 뜻을 주위 성도들로부터 듣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또 처음에는 애매하고 광범위해 보이던 그분의 뜻의 범위를 점차 좁혀 나갈 수도 있다.

하나님은 성도 간에 교제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래서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진정한 교제를 이룰 때에 당신의 은혜를 더 다양하게 베풀어 주신다. 요컨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길은 온전한 확신이 들 때까지 혼자서 혹은 모여서 기도하는 길 말고는 왕도(王道)가 따로 없다.    

영적 문제에 특정 프로그램도 없다.  

성령의 역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주라면 영적 문제에 특정한 효력이 보장되는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매뉴얼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특정 프로그램과 매뉴얼 자체가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이다. 또 그것들 자체에 능력이 있거나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선 그런 법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리로만 작동될 뿐이다. 구원을 줄 때뿐 아니라 구원 이후에도 그렇다.

따라서 특정한 방식으로 영성 훈련 혹은 성숙시키는 프로그램을 강조하는 경우는 일단 조심해야 한다. 그런 프로그램이 유용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적으로 바르고 좋은 내용과 방식들을 갖춘 것들도 많다. 그러나 그 방식을 따르면 당연히 영성이 자란다거나 혹은 그 방식이 아니면 영성이 퇴보한다고 이해하면 잘못이라는 뜻이다. 어디까지나 참조 사항으로만 삼아야 한다.

하나님과 교통함에 특정 방법이 없다는 말은 기도에도 적용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도 단순히 방법으로 간주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가장 첫째가는 이유는 하나님, 사단, 신자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 휴식하는 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죽기 직전까지 평생토록 사단은 신자를 방해하며 신자 속의 죄의 본성 또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나아가 천국 가는 준비도 쉴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 예수님과 닮은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그 이전에 세상 땅 끝까지 끝 날까지 복음을 증거 해야 할 소명에도 완성이란 없다. 주님을 모르는 새로운 세대는 끊임없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나님 또한 신자보다 더 큰 열심으로 신자를 쉴 새 없이 변화 성숙시키려 드신다. 기도는 신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교통함에, 감사와 찬양과 경배와 함께, 필수적인 호흡이자 생명이다.

그러나 방법이란 항상 그대로 따르면 특정 결과가 응당 이뤄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선 쉬지 말고 기도하는 방법 말고는 없다고 말했지만, 쉬지 말고 기도했다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가 방법은 방법이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정 결과가 보장되는 방법은 눈에 보이는 물질계 내에서만, 그것도 하나님이 따로 개입하지 않을 때만, 적용된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만드실 때에 일정한 법칙을 그 안에 내장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피조세계에선 원인이 있으면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문제에선 그런 법칙이 항상 통하지는 않는다.  
  
쉽게 말해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 위해선 기도하는 수 말고는 없지만 단순히 그분의 인도를 따르겠다는 소원과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도하면 반드시 답이 나온다고 혹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기도가 방법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여러 대체 방안 중에 하나라고 간주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기도뿐 아니라 주변 성도나 환경 사건 등 수많은 방식으로, 심지어 불신자를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신자에게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신자가 기도하기 전에는 다른 방식의 계시를, 아주 긴급하고도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으신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움직이지도, 계시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의 형편을 미리 다 알고 장래 계획까지 다 마련해 놓고 계셔도 그렇다. 신자에게 진정으로 겸손해진 믿음과 순종하려는 태세가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기도가 방법이 아니라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결코 알 수 없지만 기도했다고 다 알 수는 없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는 말씀에 있다.

말씀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 흔히 오해하고 있는 내용부터 제거해 보자. “네는 범사에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가르쳐 주리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더 세밀히 따지면 “네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특정 문제에 관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 그리하면 그 문제에 관한 그분의 뜻을 가르쳐 주리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범사에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러나 기도란 그분의 뜻을 알아가는 길고긴 과정의 첫째 문을 여는 것에 해당된다. 첫째 문을 열지 않으면 나머지 문은 당연히 열리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럼에도 신자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에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정작 그분의 뜻을 아는 그 한 가지 일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하나님이 간절히 기도하는 신자에게조차 당신의 뜻을 속 시원히 밝혀주지 않는지 궁금하고 의아해한다.  
  
지금 성경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만 했다. “범사를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그분뿐임을 확신하라는 것이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범사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 하에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분의 구체적인 뜻과 계획보다는 그분 당신을 완전히 인정하면 나머지는 당연히 그분의 선하심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사안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벌써 범사라는 단어 자체가 신자의 존재, 삶, 일생 전부를 아우르는 뜻이지 않는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던 자신의 전부가 그분의 너무나 위대하고 오묘한 권능과 은혜 가운데 완전히 붙잡혀 있음을 철두철미하게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구체적인 길은 자연히 그분이 알아서 인도하시기에 구태여 뜻을 미리 알지 않아도 된다. 신자가 좌로 행하든 우로 행하든 그분의 은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반드시 기도는 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나 대체방안을 선택하기 위해서 그것에 골몰해선 안 된다. 분명히 종교적, 아니 영적으로 선하고 필수적인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런 일조차 하나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사단에게 빌미를 줄뿐 아니라 실제로도 객관합리성을 잃기에 결코 선한 결과를 낳지 못한다.

다른 말로 구체적인 기도를 하기 전에 반드시 갖추어야할 믿음의 자세가 하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그분을 범사에 인정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즉, 내가 그분의 은혜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이 줄어들 때에 성령의 인도가 방해 받는다.

꼭 감정이 고양 되고 경건하고 신령해져야 성령의 인도가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미 신자와 평생을 함께 하지 않는가? 그럼 범사에 성령을 인정하는 것, 그분이 나를 망하게 할 리는 없다는 확신이 가장 먼저 필요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 않는가 말이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당신이 하나의 방법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 무슨 문제든 해결 받을 수 있기에 그분을 찾는다면 목적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지 그분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신자에게 진정한 하나님으로서만 즉, 그분의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은혜 안에서 자기가 단 한 순간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확신을 가져주기를 또 그런 확신 위에서 행하기를 정말로 소원하신다. 신자가 범사에서, 급한 문제로 기도하는 것과 상관없이, 항상 당신을 인정해주기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 신자가 영적으로 성숙되고 당신과의 교제가 깊어지기를 원하시기에 오랫동안 끈질기게 기도하시기를 원하신다. 기도 응답이 지연되는 것이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는 것이 아니다. 꼭 고생을 시켜야만 자란다는 단순한 뜻도 아니다. 그분을 더 깊이 많이 알게 되어야만 범사에 당신을 인정하는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자라게 되기 때문이다. 길고 긴 영적 과정을 잘 통과하려면,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그분을 좇아가려면 더더욱 구체적 사안에 따라서가 아닌 바로 그분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선 시중에서 흔히 가르쳐지는 유별나게 신령한 방안이 사실상 필요 없다. 아주 간단하다. 성령이 내주하여 평생을 두고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확신해야 한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반드시 선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에 전혀 흔들림 없어야 한다. 성령의 실체와 자신과의 관계를 철두철미하게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겠는가?  

성령은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가?

성령은 궁극적으로 신자의 유익을 위해 평생 동안 내주하고 또 인도한다. 그러나 신자만의 유익으로 그쳐선 여타 종교와 다를 바 없다. 악령도 그 추종자의 병을 고쳐주고 사업을 흥하게 해주지 않는가? 기독교 신앙에선 신자의 유익은 반드시 하나님의 유익과 일치해야 한다. 아니 하나님의 유익이 바로 신자의 유익이 된다. 말하자면 성령의 인도가 신자에게 현실적 인간적으로 유익이 아닐지라도 필히 하나님 그분께는 유익이 된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궁극적 영광을 드러내시고야 만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확장되는 방향으로만 사역하신다. 역으로 말해 신자가 그런 일에 완전히 쓰임 받기를 소원한다면, 그래서 그분을 범사에 인정한다면, 그래서 그런 의도로 기도하고 있다면 구태여 구체적인 때와 방식 등은 몰라도 자연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셈이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 행하므로 성령이 함께 했다고 한다. 신자도 성령이 항상 함께 하기에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행하면 그분의 인도가 더 구체적으로 명확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역으로 말해 신자가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을 하지 못하거나 않으면 성령의 인도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신자가 소명 의식에 철저하여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것 이상으로 성령의 인도를 잘 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 또 그러기 위해선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악령의 방해를 물리치고 범사에 그분을 인정해야 함도 물론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전부가 아니다. 여전히 부족하다. 만약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자칫 거룩한 종교적 일만 하면 자동으로 하나님의 일이 되며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교회분쟁에서 보듯이 분명히 서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앞세우지만 실제론 사단에게 놀아나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하심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을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사59:1-3)

기도하는 자가 죄에 찌들어 있으면 응답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이 그 주변 여건의 형통이 아니다. 오직 신자 자신이 거룩해지고 당신의 기뻐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가 자신의 죄는 그대로 둔 채 즉, 거룩해지고 그분의 일을 하려는 소망은 없이 단순히 현실에서 형통을 구한다면 들어줄 리가 없다. 아주 위급해서 도저히 그냥 버려 둘 수 없을 때, 그것도 하나님이 신자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신자의 죄악은 기도의 응답 뿐 아니라 당연히 그분의 인도하심도 막는다. 죄에서 빠져 나올 때까지 하나님은 침묵하며 기다리신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4:1,2)라고 한탄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죄악이 관영했고 역으로 죄악이 관영하니까 그 지식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한탄도 시사(示唆) 하는 바가 많다.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들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애2:14) 거짓 선지자들의 가장 큰 잘못은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 경고하여 회개로 이끌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죄악이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사단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사단은 거짓말로 미혹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데에 가장 큰 장벽인 죄악은 그냥 두고 그저 제사나 기도만 드리도록 만든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미혹된 증거요, 사단에 사로잡힌 것임을 거짓 선지자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도 미혹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봉사가 봉사를 인도한 것이다.    

신자에게 가장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 즉, 죄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거듭날 때나 그 후로도 한 결 같이 신자로 천국시민답게 거룩하게 변화 성숙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럼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선 죄악부터 제거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임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앞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데 기도 외에는 왕도가 없다고 했다. 이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분명해졌다. 가장 먼저 자신의 죄부터 구체적으로 철두철미 회개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생각이 나지 않더라도 자신이 얼마나 추한 존재인지는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위치에까지 자신을 부수고 낮추어야 한다. 그 다음에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면서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말하자면 특별한 영성개발 프로그램이 없어도, 비록 참조는 할지언정 또 그 참조도 영적 분별력이 있는 전문가의 조언을 받으면서 하되,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시작이자 끝이다. 신자는 최대한 자기 죄를 씻고 낮아져서 그분의 인도를 갈망하면 된다. 성령은 자기가 깨끗해지고 비워지는 만큼만 더 채워질 뿐이다.

성령의 인도를 구해 감정을 절제한다는 것은?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구한다는 것도 결국 범사에 하나님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 첩경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범사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렇다고 제 감정을 잘 절제해주시어 영적인 평강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간혹 도무지 기도할 기분조차 안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해진다. 그래서 “이런 기분으로 어떻게 기도해? 하나님께 오히려 죄가 되는 것은 아닐까? 조금 평온한 상태가 되면 그 때 기도해야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뜻 아주 의로운 생각인 것 같다. 죄를 씻어야 하나님과 교통이 바로 된다는 점에서 더 그렇게 여겨진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의로운 생각마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단의 속임수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단은 신자로 하나님을 등지게, 잊게, 멀어지게, 과소평가하게, 특별히 나중에 천천히 찾도록 만드는데 능수능란하다. 그런 조짐이 나타나면 자신의 탐욕과 죄가 아니면 사단의 직접적 훼방이 원인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이 그 연유를 물었을 때에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했는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사단의 방해인 것처럼 여겨질수록 더 기도해야 한다. 아니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문밖에서 호시탐탐 신자가 넘어지기만 기다리고 있기에 쉬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기분조차 들지 않을 때에 더 기도해야 한다. 너무나 간단한 이치다. 공부하기 싫을 때에, 다이어트 하기 싫을 때에, 술 담배 끊기 싫을 때에, 성경을 읽기 싫을 때에 등등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아무리 하기 싫지만 억지로라도 하지 않으면 그 안하는 만큼 퇴보 한다. 잠시 쉬는 것은 정말 잠시여야 한다. 잠시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바로 사단에게 빌미를 주는 것이다. 솔직히 있는 그대로 전부 하나님께 아뢰면 된다. 기도하기도 힘드니까 기도할 수 있게끔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면 당연히 감정의 영역에도 해당된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기에 그분의 의로운 통치를 받는 통로가 된다. 심지어 분노를 내는 것도 하나님의 기쁜 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분노라는 감정을 주신 뜻이 무엇인가? 더럽고 추한 세상과 죄악과 사단에 대해서 분노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식적 인간이라면 정상에서 벗어난 일에 분노라는 감정은 자연히 발생하게 되어 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이 결코 아니다.

다른 말로 분노가 생기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간섭 가운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의로운 분노라면 구태여 줄일 필요 없이 오히려 더 내어야 한다. 사단에게 빌미만 주지 않으면 된다. 죄악을 보면서 분노가 생기지 않거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 믿음을 자라게 한다는 핑계로 기왕에 발생한 의로운 분노마저 죽이는 것은 오히려 신앙인이 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분노를 상황과 상대에 맞게 적절하게 잘 처리하는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구해 따르는 것이지, 의로운 분노를 표출했다고 성령의 인도를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의로운 분노가 생기고 표출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다.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죄를 저주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당신께서 죽을 만큼 죄는 저주하지만 당신의 선택 안에 든 죄인은 당신이 대신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뜻이지 않는가? 저주의 전 단계가 바로 분노다. 죄악과 사단에 대한 분노 없이 저주가 생길 수는 없다. 또 그런 분노가 없다면 믿음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

의로운 분노는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으로 더욱 개발 확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노라는 감정만 두고서 무조건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신앙이 마치 진통제, 신경안정제, 술 담배 마약 같이 무슨 일에도 내면의 감정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너무나 큰 착각이다. 신자라면 당장 십자가 복음에 대해 목숨을 걸만큼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하듯이, 격한 감정이 나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물론 잘못된 분노도 아주 많다. 신자 내면의 죄의 본성이나 정욕과 자존심 같이 발생 경로부터 성령의 인도가 아닌 경우다. 또 죄악과 사단이 아닌 사람들을, 불신자나 이단도 포함해서, 대상으로 분을 품어 표출하는 것도 잘못이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 십자가 원리를 신자도 따라야 한다. 아니 그 전에 사람은 처음부터 독처할 수 없는 존재 즉,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창조의 원리부터 따라야 한다.  

상대에게 잘못이 있거나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누차 강조하지만 여기까지는 하나 잘못이 없다. 심지어 미처 통제하지 못하고 분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고 한 것이다.

상대로 잘못을 깨닫게 해서 시정토록 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를 정죄 비방하는 목적으로 화를 내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어 그 심령에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상대를 끝까지 미워하여서 사적인 복수나 감정적인 앙갚음 내지 분풀이를 해선 사단에게 넘어간다는, 아니 이미 넘어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실망이나 좌절감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아니 좋은 것이다. 실망과 좌절을 겪지 못하면 자신의 영적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또 하나님이 회복시켜서 더 도약시켜주실 권능과 은총을 소망할 수도 없다. 바닥에 떨어져본 자만이 더 높은 위를 쳐다볼 수 있다.

대신에 바닥에만 계속 머물러 있으면 분노를 해가 지도록 품는 것과 같이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바닥에 떨어졌다고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바로 사단의 먹이가 된다. 대신에 바닥에 떨어졌으니까 더더욱 다시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좋은 반전의 기회가 그 앞에 대기하고 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범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겪든 반드시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어떤 실패와 좌절과 고난과 허물과 상처와 죄악 가운데 있더라도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당신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다. 신자가 그런 사랑 가운데 있는데도 왜 조금만 힘들고 작은 상처를 받으면 그저 감정이 널뛰듯 하는가?

불신자는 몰라도 신자에게만은 감정의 온전한 절제도 오직 십자가의 진리 안에 바로 설 때만 가능하다. 의지적으로 내면세계를 갈고 닦거나, 심리학적으로 치유하거나, 종교적으로 영성을 훈련하는 것은 일시적 표면적인 대책일 뿐이다. 예수님만이 알파요 오메가다. 날마다, 아니 순간순간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은혜를 붙들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 가운데 있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러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살후5:16-18). 종교적으로 거창한 일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감정을 잘 절제하여 기쁘게 사는 것도 바로 그분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라. 신자가 그러지 못하면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굳건한 믿음으로도 감정이 쉽게 절제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이 감정을 주신 목적부터 잘못 알고 있기, 아니 아예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죄와 사단이 있다. 죄와 사단을 없애지 않고는 감정 절제가 안 된다.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죄와 사단이 원흉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모든 문제는 그 근원부터 고쳐야 한다는 뜻이다. 구원 이후에도 이 원리는 여전히 변함없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기 위해서 나쁜 감정부터 억제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면 감정의 절제도 자연히 된다는 것이다.  
      
5/18/2009


진주문

2009.09.09 05:16:23
*.249.233.130

기도할때 사단의 방해로 집중이 않되는것이 힘들었는데 여러가지로 좋은 해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김순희

2010.11.15 11:08:39
*.161.91.154

기도가 곧 방법이며 또 방법이 아니라는 의미..
바로 하나님 그 분을 온전히 알아가기위한 기도, 먼저 그 기도가 있어야함을 깨닫습니다.
상황과 환경의 어떠함을 위해 기도함 보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는
그 귀한 주인공이 바로 바로 우리라는 그 사실 앞에 놀라고 또 놀라는 그 일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할 때 그 귀한 주인공이 글~~쎄, 너무도 추악한 옷을 입고 있음을 보고 또 놀라는 그 일,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그런 추하고 더러운 존재를 지금까지 쭈~~욱 사랑해 오시되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피를 뚝뚝 흘리시면서까지, 물과 피가 다 쏟아지기까지 사랑해
오셨다는 그 사실 앞에 가슴이 미어지는 죄송스럼과 감사함과 그런 범벅의 맘이 되기까지....

사라의 웃음

2012.05.07 22:36:23
*.109.8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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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범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신자가 무슨 일을 겪던지 반드시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이 작동한다는 이 사실을 철두철미 믿고, 목숨까지 버리시며 사랑하여
주신 그 사랑에 가슴이 미어지는 매일 매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08.11 17:30:37
*.14.99.253

'성령이 내주하여 평생을 두고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확신해야 한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반드시 선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에 전혀 흔들림 없어야 한다. 성령의 실체와 자신과의 관계를 철두철미하게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겠는가?' 

 

간혹 그분 앞에서 회개기도중에 반복되었던 죄로 인하여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어 나자신을 책망하며 정말 면목 없음을 느끼어 그분께 다가서지 못하고 멈칫거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실 겸손이 아니요, 사탄이 심어주는 그래서 하나님 그분을 좁은 틀에 가두려는 속임수요, 어리석은 교만임을 곧 깨닫습니다. 내가 아무리 진흙탕에 뒹굴렀다 해도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의 저를 사랑하시며 언제든지 몇번이든 용서해 주시며 끝내는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실 하나님 그분의 광대하심을 망각하는 불손임을 죄임을. 

 

정말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틈만 나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탄의 성실함(?)때문이라도 매일 매순간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만나고 교제하며 동행함을 멈출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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