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감정에도 목적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하나님이 감정을 창조하신 목적은?
감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좋은 은사다. 아니 하나님 당신이 지정의를 갖추신 분인지라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든 인간도 당연히 그 특성을 공여(供與)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당신만의 뜻과 목적이 있다. 인간으로 당신처럼 감정을 갖게 하신 데도 그분 고유의 목적이 있음은 당연하다.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신자가 하나님 뜻대로 살면 축복이, 거역하면 징계가 따른다. 그 축복과 징계가 단순히 현실적 상벌이라기보다는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가 반드시 드러난다는 뜻이다. 즉 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대로 이뤄지는 것이며, 불순종의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동안에는 아주 즐거웠다. 그분 뜻대로 순종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서 그분을 배반하자마자 생긴 변화는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이 든 것이었다. 죄가 개입되기 전에는 아담의 감정도 하나님이 목적하신바대로의 결과를 만들어 내다가 그분께 불순종하자 전혀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아담이 타락하여 갖게 된, 다른 말로 사단이 인간에게 주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두려워하고 무능력하며 미움과 방종 하는 마음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여기서 능력은 어떤 어려운 일을 해결해 내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지혜를 말한다. 그러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고 자신도 올바르게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영을, 또 동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차원의 지정의를 주신 목적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감정을 주신 목적은 인간의 내면을 당신의 뜻하신바 안에서 위로 격려하여 감화시키려는 것이다. 또 그분 은혜 가운데 충만해진 감정은 지성과 의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작동시키게끔 만든다. 외부 상황에 접촉하면 자연적으로 제일 먼저 발생하는 감정을 하나님이 목적한 대로 잘 절제하면 곧 이어서 지성은 그분의 뜻을 잘 분별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의지는 그분 뜻대로 헌신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감정의 올바른 절제이지 감정 자체가 아니다.
아담이 죄를 짓자 하나님에 대해선 두려움이, 자신과 이웃에 대해선 부끄러움이 생겼다. 그 후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나 성령의 개입 없이 타락된 상태로 사단의 미혹에 묶여 있는 바람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이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요컨대 감정을 아름답게 절제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바가 전혀 아니다.
반면에 신자에게는 성령이 이미 내주해 있다. 따라서 신자는 마땅히 자기 마음을 죄의 권세 아래 두지 말아야 한다. 육체의 소욕이 제 멋대로 작동되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 또 하나님은 신자가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령의 전으로 변모시켰다. 성령 없는 불신자는 이 땅의 보이는 영역에서의 형통과 안락만을 목표로 살기에 육체의 일만 현저히 만들어 낸다. 상호 간에 분리만 일으키고 그럴 때마다 감정 또한 부정적이고도 극렬한 상태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신자는 반드시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한다. 부패 된 본성의 잔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무시로 기도와 말씀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한다. 그러면 감정도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필연적으로 분리의 반대 상태인 화목의 열매를 금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맺을 수 있다. 본문이 말하는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상태가 되어 내면에서부터 위로와 평강이 샘 솟듯이 흘러넘친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또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분 뜻대로 순종하도록 스스로에게 강력한 자극이 된다. 그분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긍정적 동기가 유발되며 그분의 영광을 간절히 소망하는 기쁨으로 충만케 만든다. 나아가 그 감동은 적극적인 순종의 행동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감정이 하나님이 목적하신바대로 온전하게 절제되어진 결과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영적 지도자가 반드시 목표로 삼아야 할 자신의 영적 상태가 바로 분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어야 한다. 자꾸만 초자연적인 신령한 은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정말로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능력과 사랑과 근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말로 지성과 의지를 포함하여 감정이 하나님 목적하는 바대로 잘 절제 된다면, 인간은 영적 존재인지라 주위 사람들에게 곧바로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
꼭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불신자들에게 둘러싸인 평신도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이 감정을 주신 목적을 잘 이해하여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 마음이 전해져야 한다. 신자가 맡아야 할 빛과 소금의 역할 중에 빛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예수 믿도록 전도하는 것 외에 만나는 모든 사람과 그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측면에서라도 지배토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지성은 그분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고, 감정은 그 뜻 안에서 절제되어 그분이 주시는 기쁨과 소망으로 넘치며, 의지는 그 뜻대로 순종하여 살든지 죽든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게끔 헌신으로 이끄는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해 주위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고 어려운 고난이 반복해서 겹쳐도 신자는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여 그 마음을 성령이 지배하도록 내어주면 평강과 안위가 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껏 설명한 것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감정에 하나님이 부여한 목적에 해당된다. 그러나 감정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또 각 감정마다 하나님의 세부적 목적이 다 따로 있음도 당연하다. 그래서 대표적인 감정인 공포, 분노, 사랑, 욕망 넷에 대해 각각의 목적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공포(Fear)의 목적
하나님이 부여한 목적이라고 해서 너무 거창하고 심오하게 따질 필요까지는 없다. 특정한 종류의 감정이 생기는 원인과 상황을 가만히 따져보면 쉽게 그 목적을 유추할 수 있다. 또 목적을 알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순종하여 그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방안은 자동적으로 나온다.
공포는 어떤 경우에 생기는가? 질병, 죽음, 사업실패, 불확실한 미래, 다급하고 위험한 사태, 완전한 미지의 세계, 심지어 밤중에 한적한 산길을 걸을 때 등등, 고통이나 위험이 이미 생겼거나 생길지 모른다고 예상되는 것이 그 원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두려움이 없다고 해서 위에 열거한 것 같은 일상적인 공포마저 사단이 심어주는 것은 아니다. 귀신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도 자연발생적이며 가치중립적이다. 사단이 주는 두려움이란 무엇보다 죄의 노예가 되어 있어서 알게 모르게 생기는 근본적인 죄책감이다. 또 타락한 본성만 따라 살기에 향방 없이 달음질 하는 자기 인생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항상 갖고 있는 영적인 공허함과 갈급함이다.
공포가 위험과 고통이 예상 될 때에 생긴다면 그 목적은 당연히 그런 일을 미리 잘 대비하라는 경고다. 하나님은 피조세계 안에도 그런 경고의 표식을 이미 많이 내포시켜 놓았다. 예컨대 불꽃은 붉은 색으로 혀처럼 날름거리며 탄다. 우선 보이는 모습만으로 범상치 않고 가까이 가면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직접 불에 손을 대선 안 된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 수 있다. 또 시체가 썩으면 구더기가 끓고 역겨운 냄새가 나기에 그것만으로도 괜히 두려운 마음이 든다. 인간더러 일차적으로 시체를 만져선 안 되며 나아가 죽음은 하나님이 원래 목적하셨던 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놓으신 것이다.
따라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해서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간주해선 안 된다. 신자도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당장 내일의 끼니가 염려 되고, 중병에 걸리면 혹시 죽지 않을까 두려워진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착각해 일부러 무시하거나 무조건 없애려고 믿음을 동원해선 안 된다. 공포의 감정은 앞으로 진전하는 것을 이제 중지하든지, 꼭 가야한다면 단단히 희생을 각오하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다. 교통신호로 따지면 유턴 내지 일시중지다. 교통신호는 사고방지에 필수적이자 아주 유익한 것 아닌가?
공포가 생기면 일단 정지해야 한다. 육신이 건강한데도 까닭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면, 주로 새 일을 도모할 때에 그렇지만, 일단 휴식을 취해야 한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꼭 영적으로 이상해진 것처럼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세워 놓은 계획들을 세밀하게 현실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께 다시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우선 내면의 평강을 회복해주시고, 무엇보다 앞으로 계속 나가야 할지 여기서 완전히 포기해야 할지 아니면 제 삼의 길로 인도하든지 확신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요컨대 공포가 생긴 것은 장차 발생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한 경고다. 하나님을 더욱 강하게 붙들고 전반적으로 재점검해서 계속 전진할지 여부를 결정하면 하나님의 목적대로 그 감정이 절제된 것이다. 반면에 일단정지 하지 않고 아예 무시하려 들거나 자신의 담대함만 믿고 밀고 나가면 거의 오류나 실패가 기다리고 있다. 혹시 자기 노력으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공포에 휩싸인 채 지낼 수밖에 없다. 신앙의 힘이 발휘되는 곳은 공포로 인한 사후 파장을 선하게 변모시키는 것이지, 공포 자체가 생기지 않게 하거나 이미 발생한 공포를 억지로 눌러 없애는 데에 있지 않다.
분노(Anger)의 목적
분노는 실패와 잘못이 생겼을 때에 생긴다. 정확히 말해 어떤 일이 반드시 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기대, 예상, 계획했던 모습에서 벗어날 때다. 예컨대 남들에게 비난과 무시를 당하면 화가 나는 이유도 자신은 절대 그런 식의 취급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응당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할 위치에서 자신이 벗어났다는 뜻이다. 사업이나 학업의 실패, 질병의 발생, 인간관계의 상처 등등 모든 것이 최소한 자기에게만은 일어나선 안 될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간주하기에 화가 치미는 법이다.
다른 말로 완전하고도 선한 기준에 따라 잘못된 것이 아니라도, 자기 스스로의 판단이나 소원했던 바와 다르기만 해도 분노는 생긴다는 것이다. 도독도 계획했던 만큼 훔치지 못하거나 실패하면 화를 내지 않는가? 도적질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완전히 뒷전이다. 나아가 무료한 감정이 오래 지속되면 괜히 짜증이 나고 심하면 분노가 생기는 것처럼, 다른 종류의 감정이 제대로 절제되지 않아도 분노는 생긴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감정이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럼 하나님이 분노를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잘못과 실패를 수정하라는 뜻이다.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는데 신자라도 분노가 생기는 것 자체를 잘못으로 알고 없애려고만 해선 안 된다. 잘못과 실패부터 수정해서 분노를 없애야지, 분노만 없애려 노력하다간 외려 분노가 더 쌓인다. 분기탱천할 일이 생긴다고 해서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
분노란 하나님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도 아주 표가 나게 드러내셨다. 성경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고 말하지 않는가? 다르게 표현하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으면 되고, 분을 품어도 해가 질 만큼 오래 동안 품지 않으면 되고, 나아가 마귀가 틈타지 않게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잘못과 실패에 대해 분노가 일어난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할 기준부터 분명해야 한다. 예를 든 대로 도적이 계획보다 적게 훔쳤다고 분노한다면 그 분노는 결코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경도된 가치에 근거해서 분노했기 때문에 분노한 것 자체부터 잘못이다.
따라서 여러 감정 중에 유독 분노만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뉠 수 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기존의 가치관에 따라 분노의 발생 여부가 결정되기에 의로운 분노와 악의의 분노로 나뉜다는 뜻이다. 공포가 생기는 것 자체만 두고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경우와는 다르다. 예컨대 체면을 구기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자는 그럴 경우가 발생하면 무조건 화부터 내니까 그런 기준부터 옳은지 그른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가치 판단 기준은 결코 완전할 수도 올바를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기준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분노를 허락하신 목적은 당신의 의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분노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을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는 위치에 있지 않는 것은 절대적 잘못이므로 오히려 분노를 내는 것은 아주 선한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죄와 흑암의 세력과 사망에 대해서 분노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을 외면, 거부, 반발, 저주하는 어떤 악의 세력에 대해서도 의분을 갖고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라는 것이다. 역으로 따지면 죄와 흑암의 세력과 사망이 아닌 것, 즉 그것들과 연류 된 사건이나 사람, 특별히 죄인과 이웃에 대해서는 분노로는 대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다.”(요 11:38) 그를 죽음으로 내몬 흑암의 세력에 대해 아주 분노하신 반면에 원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에 대해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실제 현실에선 이웃의 잘못을 보기 전에 자신의 잘못과 죄에 대해 먼저 분노해야 한다. 예수님도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부터 보지 말라고 하셨지 않는가? 이는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 분노를 다스리는 아주 좋은 방도이자 나아가 영적인 성숙을 이르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신자는 가장 먼저 악하고 게으른 자신의 습관과 태도 등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예컨대 항상 불평불만에 가득 차 있다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으로 그 내면을 대신 채워야 한다. 혹시 믿은 후에도 인본주의적 사고와 가치관이 속에 견고한 진으로 남아 있다면 그 배후에 있는 사단에 대해 화를 내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진을 과감히 부수어야 한다.
분노 또한 그 원인인 잘못을 바로 잡지 아니 하는 한 결코 통제되지 않으며, 심지어 동일하거나 다른 종류의 잘못을 반복해 저지를 수 있다. 분노를 마인드 컨트롤 같은 방도로 통제하려 들지 말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의를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서 그대로 따르는 경건의 훈련부터 쌓아야만 한다. 이전 불신자 시절의 잘못된 사고, 태도, 습관은 고치지 않은 채 믿음으로 분노의 감정만 없애려 해선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자기 속의 견고한 진을 신자가 되어서도 그대로 방치한 죄다. 나아가 아무리 해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이뤄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보라.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하나님이 시키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오직 성령의 인도만 받았지 않는가? 또 그래서 죄와 사단과 사망에 대해선 철두철미하게 불같은 화를 터트리셨지 않는가? 의로운 분노는 많이 낼수록 좋은 것이나, 악의의 분노는 그 전에 자신의 굽어진 기준부터 바로 잡고 죄의 본성부터 줄이고 없애야 한다. 예컨대 체면이 구겨지는 것을 절대 참지 못하는 습성 같은 것은 신자에게는 벌써부터 없애야 할 썩어져가는 구습일 뿐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육체대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자에게 그렇게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Love)의 목적
사랑에는 반드시 대상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좋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사랑이 가장 아쉬울 때를 따져보라. 혼자 고립되어 외롭게 살 때가 아닌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아니 단순한 교제만도 너무나 아쉽다. 말하자면 어떤 대상이든, 특별히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 사랑의 감정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의 목적도 비틀어진 관계를 바로 잡거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간이 혼자 있으면 외로운 것은 본성적인 반응이다.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 이브를 만드신 것도 남녀 다른 성을 창조해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어 살라는 것, 즉 독처하는 것이 안 좋다는 뜻이었다. 나아가 그 후손들이 이 땅에 창성하게 될 때에 최초의 부부처럼 서로 사랑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아담과 이브가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듯이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라는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하나님은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가장 사랑해야 할 부부와 가족 관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타락 후에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 앞에서 상대에게 잘못을 떠넘기기 바빴고 둘 사이도 무화과 잎으로 가려야 할 만큼 부끄러워졌다. 나아가 인류 최초의 살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와 시기심으로 인해 친 동생을 죽인 형에 의해 저질러졌다. 죄가 들어오자 사랑의 감정도 왜곡되어 표출되었고 또 그 감정을 비정상적인 대상에 쏟아 부은 것이다.
타락 이후 사랑이 왜곡된 대표적인 예가 있지 않는가?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롬1:26,27)
사랑이라는 감정은 반드시 정당하고 선한 대상을 향해 아름답게 작동되어져야 함에도 타락한 인간은 그러지 못했다.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결혼이라는 신성한 제도를 주신 뜻을 어겼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상실한 마음에 버려두어 상당한 보응을 자신에게 받게 했다. 성병이나 AIDS를 비롯한 육신적 질병 뿐 아니라 하나님과 담쌓고 그분의 저주를 받는 상태로 지냄으로써 따르는 영적 피폐함으로 괴로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께로만 나온다. 따라서 사랑은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우선 하나님부터 사랑해야 하고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과 그분께 속한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과 자연과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그 가운데는 당연히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자신의 육신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의 올바른 인도를 받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기를 비롯해 하나님께 속한 모든 대상과 그분의 뜻 안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
만약에 그런 관계가 굽어지거나 끊어지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과감히 제거해야 한다. 예컨대 이웃이 궁핍해서 가족끼리의 화목이 깨어지고 또 하나님과 관계마저 굽어진다면 우선 가진 것을 나눠주어 다시 바르게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랑으로 어떻게 하라고 권면했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1-4)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어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바로 잡으면 오히려 자신의 기쁨이 충만케 된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잘 활용하면 충만한 기쁨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사랑의 감정을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것에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에 속하지 않는 것이나 그분이 싫어하는 것을 사랑하면 당연히 결과는 감정의 절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 올바른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 당신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필연적으로 그 영혼은 피폐해지고 감정도 메마르다 못해 악하게 굽어진다는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돈 자체가 악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이 땅에 썩어 없어질 물질보다는 하늘의 영원한 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 되는 것을 사랑했으니까 그 결과는 많은 근심으로 오히려 평강이 없어진다고 한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관계가 화목해지며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 그러나 그분께 속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면 그 반대로 분리가 일어난다. 동일한 대상을 두고 성령의 소욕대신에 육체의 소욕을 좇아도, 즉 하나님의 방법과 목적대로 사랑하지 않아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돈을 그분의 방법으로 벌어서 그분이 원하시는 곳에 사용하는 자와 그 반대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벌어서 자신의 형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자를 비교해 보라. 전자는 돈과 또 돈이 사용되는 대상과 아름다운 관계가 생겨서 기쁨이 넘치지만, 후자는 모든 것들과 탐욕이 지배하는 관계가 되어 오히려 많은 근심과 불화만 조성하게 되지 않는가?
욕망(Desire)의 목적
무슨 일을 이루고 싶다든지 어떤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은 누구에게나 든다. 신자가 개인적인 계획과 뜻을 세우면 신앙적으로 아주 잘못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독교는 결코 무소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신자는 무조건 돈을 멀리하거나 자신의 소유를 전부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을 번성하도록 다스려야 한다. 단 그분의 뜻대로 아름답고 거룩하게 해야 한다. 단순히 물질적 숫자가 늘어나는 번성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더 충만하게 드러나는 번성이어야 한다. 당연히 가정을 이루고 개인 소유가 있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돕고 사랑하기 위해 그 소유를 사용해야 한다. 소유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이지 모두가 수도승처럼 무소유를 추구하면 세상의 올바른 발전마저 저해된다.
결국 인간으로 일이든 물건에 욕심이라는 감정이 생기게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은 너무나 간단하고도 알기 쉽다. 당신의 일을 시키기 위해서다. 이 땅의 청지기적 역할을 잘 감당하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욕망은 더럽고도 추하게 변질되어지며 그분 뜻대로 욕망이 발휘된다면 당연히 이 땅과 본인은 번성하고 충만케 된다.
그렇다면 욕심을 잘 다스리는 방법은 그분 뜻대로 성실하게 충성하는 것이다. 우선 자기가 갖고 있는 기도 제목들부터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내가 정한 기도 제목이라 혹시 하나님 뜻과 무관하며 내 욕심이 아닌지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선한 소원을 심어주시기도 한다.(빌2:13) 또 우리 개인적 소원을 기도하는 도중에 당신의 소원으로 바꿔 주시기도 한다. 나아가 끝까지 우리 소원만 기도해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며 일이 다 끝난 후에라도 그런 인도 가운데 있는 당신의 의로운 뜻을 깨닫게 해주신다.
처음부터 악한 소원을 갖고 기도할 신자는 없다. 단지 자신의 욕심인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계획인지 여부를 미처 모를 수는 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것을 알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자신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면 당신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기로부터 출발한 것처럼 보이는 소원과 욕심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 나가는 작업이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자신만의 구체적 소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소원과 욕심이 전부 그 소명을 이루는 일과 연관되어져야 한다. 아니 소명이 확실해지면 당연히 그렇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천국으로 향한 욕망을 뜨겁고도 강하게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과하지 않다. 또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감정을 주신 목적이다.
따라서 욕망이라는 감정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최소한 그분의 뜻에 맞는지, 최대한 양보하여 그분의 뜻에 위반하지는 않는지 찬찬히 점검해 봐야 한다. 잘 모르겠으면 분명하게 구별이 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욕망으로 확정되면 끝까지 그 욕망에 헌신하되 그것을 이루는 것도 그분의 인도와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 같은 자를 통해서도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다. 나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면 다른 모든 필요를 그분이 채워주신다.
반면에 욕망을 하나님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성하려 들면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어도 잠시 순간적 기쁨과 성취감뿐이지 영원한 평강과 안위는 결코 없다. 항상 뭔가 부족하고 허무한 심령의 상태를 채울 길이 없다.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채우지 못할 웅덩이만 팠기 때문이다. 영원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 그분이 주시는, 최소한 그분의 뜻에 맞는 욕망이 아닌 한에는 아무리 그 결과가 세상에선 대단해 보여도 본인의 참 만족과는 아무 관계없다.
신자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도 게을리 한다면 그 만한 죄도 없다. 나아가 그분의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조차 없다면 정말 구원 받았는지 여부부터 점검해 봐야 한다. 예수를 믿어 심령에 그분의 영으로 채워진다면 사나 죽으나 그분의 영광을 위하려는 것이 인생의 가장 근본 목표로 당연히 바뀌게 된다. 비록 그 실행 여부가 부분적이고 더딜지라도 말이다.
위에서 간단히 살펴 본대로 어떤 특정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고 해서 절대 신앙이 나쁘거나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정이라면 반드시 그분의 목적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고도 간단한 진리다. 그렇다면 그 목적대로 감정이 절제되고 사용되어진다면 그분의 영광은 당연히 더 드러나게 된다. 그 반대로 그 목적대로 절제되지 않으면 감정이 이차적으로 만들어 내는 결과는 필연적으로 나빠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9/25/2008
늘 적절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