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어떻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가?(3)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5:19,20)
소명의식의 본질
신실한 신자 가운데도 정작 소명의식이 없거나 희미한 자가 꽤 된다. 교회 봉사와 전도의 사명은 누구나 인식하지만 교회 밖의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스스로 썩는 밀알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도록 만들겠다는 인식이 너무나 부족하다.
소명이 선교사나 목사 같은 전임 목회자가 되라는 요구나 명령이 아니다. 또 그런 자들이 복음을 어떻게 전파할지 구체적 방안까지 하나님께 직접 계시 받는 것으로만 간주하면 큰 오산이다. 신자가 된 후의 바뀐 인생 목표가 바로 소명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다. 신자가 된 후에 바뀐 것이므로 당연히 불신자 시절과는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신자의 소명에 대해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한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1-34) 하나님께 기도하되 재물보다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필요한 재물을 채워주시기에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본문이 단순히 기도와 재물의 상관관계를 설명한 말씀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방인들도 신에게 재물을 간구한다고 했다. 그럼 신자가 구하는 것은 마땅히 달라야 한다. 또 이방인과 신자가 간절히 기도하는 대상이라면 각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안이다. 결국 이방인과 신자의 인생 목적이 다르다는, 아니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강조하신 말씀이다.
불신자들은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 즉, 현실에서의 형통과 안일만을 목표로 산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재물을 모으는 것이 스스로 정한 인생의 소명이다. 당연히 목표치가 채워질 때까지 염려 불안이 끊이지 않다가 달성되면 어느 정도 만족과 평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잠간의 행복으로 그친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고 항상 이웃과 경쟁하느라 금방 목표치가 다시 늘어나기 때문이다.
신자는 인생의 목표가 그와 정반대로 바뀐 자다.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실현되고 확장되어지는 것만을 소원하며 살게 된다.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점차 자라면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자기 주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눠주고 또 그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 안으로 초대해야 한다.
예컨대 부부관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서로가 서로를 주께 대하듯 해야 한다. 주님 안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여 순복하고 존경해야 한다. 각자가 먼저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한 바탕 위에서 둘 사이에도 오직 주님의 긍휼과 권능이 작용토록 해야 한다. 그럼 당연히 먹고 마시고 입을 것으로 인해 부부의 사랑이 방해 받을 수 없다. 또 염려 불안마저 자연히 사라지며 평강과 만족이 넘치게 된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돌린 후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이 땅에서 필요한 것들을 취하기 위해 하늘의 능력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하늘나라가 임하도록 먼저 간구하고 그렇게 살면 나머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신자의 염려 목록에서 제외 된다는 것이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이 있느니라.”(마6:21)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평생을 두고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즉, 인생의 목표라는 것이다. 신자나 불신자나 평생을 두고 추구한다면 이 땅에서 이루어야만 할 목표다. 신자라고 이 땅은 무시하고 죽어서 천국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선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이 땅에서 살아야할 목표만 불신자와 다를 뿐이다. “이 땅 안에서 자신을 형통시키려는” 불신자와는 달리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일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많은 신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성화와 전도 외의 제 삼의 소명이다.
예수님의 사역 원칙
예수님의 공생애를 따져 보면 당신의 마음이 가는 곳에 확실히 당신의 보물이 있었다. 당신이 하는 일을 통해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의를 실현하려 했다. 자연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은 아예 하지 않았다. 또 그것들은 하나님이 미리 다 아시고 채워주셨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당신이 말씀하신 바를 완벽하게 실천했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성부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를 수 있다고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가?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당신께선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므로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그와 같이 한다고 했다.
그럼 군대에서 훈련병들이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따라 하듯이 성부 하나님이 먼저 일 하신 것을 보고 성자 하나님도 동일한 일을 하신 것인가? 아니면 성부 하나님이 천국에서 하시는 일을 이 땅에서 환상으로 다 보시고선 따라 했다는 뜻인가? 어떤 경우가 되었든 그럼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자 내지 부하가 될 뿐이다.
온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는 일은 모두 바로 성부 하나님이 하는 일이었다. 두 분 사이에 분리나 불일치라고는 단 한 치도 없었다. 또 완전한 인간으로서 당신의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은 오직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이루려는 목적에 근거했다. 간절히 기도하여 성령님의 온전한 인도를 받았다.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소명을 잊거나 등한시 한 적이 없고 단 한 시도 그분과의 관계가 끊긴 적이 없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으며, 역으로 말해 그분의 뜻이라고 사전에 확신한 일만 하셨다는 뜻이다.
신자라면 바로 이런 예수님의 본을 닮아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따져 보니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여겨진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인 줄 사전에 확신하여 그 일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을 어떻게 단 하나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자들이 가장 잘못 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퀴즈 문제의 정답 알아맞히기 식으로 접근하려 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가 간절히 기도해도 구체적인 정답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만약 기도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증거라고 가르친다면 오히려 그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다.
바울은 범인이 평생 가도 당하지 않을 만한 극심한 고난을 수시로 겪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만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후11:24) 그런데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도 미리 그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처음 한 번 정도는 몰라도 다섯 번까지 맞았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바울도 그럴진대 우리 같은 범인에게 하나님이 장차 당할 고난을 미리 가르쳐 주면 과연 누가 당신의 일에 헌신 충성할 수 있겠는가?
물론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시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예외적인 특별한 경우에 한하므로 평소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근본적 의미는 그분이 인간을, 특별히 신자를 대하는 기본 원리를 안다는 뜻이다. 또 그 원리를 제대로 알면 언제 어디서나 망설이지 않고 그분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 원리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어서 하신 말씀에 나와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들을 사랑하시기에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인다고 했다. 그럼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에게 보이는 일보다 더 큰 일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또 성부가 하는 일을 성자가 하나라도 모를 리 없지 않는가? 언뜻 이해가 잘 안 된다.
그 의미는 본 문장 안에서 어떤 부분과 연관되었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따지고 보면 결국은 같은 뜻이다. 우선 더 큰 일로 인해서 생기는 효과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성부가 성자를 통해 일상적인 일도 하시고 또 큰 이적을 일으켜 놀라게도 하신다는 뜻이다.
둘째로 아들을 사랑하사 아들에게 보이시는 일 외에 더 큰일이 있다고 했다. 그럼 아들을 사랑하시는 원인 말고 다른 근거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성부가 성자를 사랑하지 않을 리 없고 또 사랑이신 성부께서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일을 하실 리도 없다. 결국 본문은 예수님 당신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분의 일에 부름 받은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신자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가보다 여겨질 때도 여전히 큰 사랑으로 품고 계시며 오히려 더 큰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신자도 반드시 기이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쉬운 예로 앞에는 홍해요 뒤로는 애굽 군대에 쫓긴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에서 꼼짝 못하고 다 죽는 줄 알았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지 않는 줄 착각했다. 그러나 홍해가 갈라지는 이적으로 더 큰 사랑을 확인하고 정말 기이하게 여기게 되었다. 가데스바네야 사건으로 광야에서 40년간을 방황하고 있을 때도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끊긴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을 더욱 보존하고 또 젊고 새로운 세대에게 믿음의 훈련을 시키셨는데 오히려 당신의 사랑에서 나온 더 큰 일이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역으로 따지면 어떻게 되는가? 신자의 일상적인 일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붙잡혀 있으니 따로 걱정할 염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시키는 더 큰 일은 신자에겐 자칫 그분의 사랑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더 오묘하고도 풍성한 사랑을 깨달아서 기이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험과 손해와 핍박을 무릅쓰고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신자라야 하나님의 놀라운 사명을 받아 쓰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다스리는 원리가 참으로 귀하지 않는가? 일상적인 일은 그분의 사랑 가운데 완전히 다 들어 있다. 신자가 혹시라도 그분의 사랑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는 일들은 오히려 더 기이한 큰 사랑의 보증이다. 일상의 삶이든 비상한 일이든 자기 존재, 삶, 일생이 그분의 의로운 손 안에 완전히 붙잡혀 있지 않는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약화 내지 실종된 것처럼 보여도 전혀 불안해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말이다. 또 구태여 구체적인 계획을 세세하게 계시 받으려 할 이유도 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
신자를 향한 하나님만의 계획과 뜻이 따로 있다면 결국 구체적 계시를 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일정과 방식대로 그 일을 묵묵히 진행시키고 계심도 아주 당연하다. 신자가 의식하든 못하든 신자의 하는 일, 주변 상황, 만나는 사람, 겪고 있는 사건을 통해 바로 그 신자를 향한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신자가 그 일을 구체적으로 깨달아 전적으로 헌신하기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은 항상 먼저 가셔서 당신의 일을 행하고 계신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 아닌가? 신자가 앞서 가고 하나님이 뒤에 따라 오면 신자가 주인이고 그분은 신자의 종이다. 하나님이 주인이고 신자가 그분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앞장 서서 행하시는 것이다. 그 반대로 자기 정욕대로 쓰려고 하는 기도란 하나님을 자기 종으로 부려 먹으려는 의도인데 응답될 리는 당연히 없지 않겠는가?(약4:3)
아니 신자에 대한 계획 자체를 그분이 세우셨는데 더 이상 따지고 자실 것도 없다. 특별한 계획이 따로 있다면 반드시 그분의 방식과 때에 따라 이뤄질 것 또한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말이다. 신자로선 그분의 부름과 쓰임에 전적으로 자기를 던지겠다는 자세 외에 문제 삼거나 관심 쏟을 것은 하나도 없다.
간혹 하나님이 뒤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이유는 비유컨대 걸음마를 훈련시키려고 아기 혼자 걷게 하고 부모가 지켜보고 있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걸음마를 시킨 것 자체를 부모가 주도했고 또 전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신자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을 때도 걸음마 시키는 부모처럼 하나님이 먼저 이끄시고 당신의 권능이 전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는 것 같아도 그분의 막대기가 신자로 충분히 안위할 수 있게끔 붙들어 주고 계신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당신이 하는 일을 다 보여주신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신자보다 먼저 가서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는 구체적 일정과 방식까지 같았지만 신자는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고 또 먼저 가셔서 행하시고 계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된다.
또 그런 확신이 있다면 다음으로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자기가 과연 먼저 가신 하나님의 일에 현재, 아니면 뒤늦게라도, 참여하고 있는 지 여부다. 그 분이 이미 일하고 있는 장소, 사건, 인물을 찾아가야 한다. 이 또한 너무 구체적으로 따질 필요는 없다. 역으로 따져 지금 이 일과 이 장소에 과연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는지 아닌지만 살피면 된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 신자의 정신적 수양이나 종교적 의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여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현장과 사람과 사건을 찾아가면 그곳에선 당연히 감사와 기쁨이 넘친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정주부라면 교회 직분을 맡아 열심히 봉사하는 것만이 그분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다. 주부의 영적 전쟁터는 사실은 가정이다. 교회는 그 싸움을 잘하기 위해서 훈련 받는 곳이다. 가정 안에서부터 하나님이 먼저 가서 행하시는 일을 발견하여 동참하면 된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는지 발견하기 어려운가?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라. 주부가 하는 일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교회와 선교지에만 계신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마도 가정에서 하나님이 안 계신 장소와 역사하지 않는 일은 얼마든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것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은 부소부재(無所不在) 하시어 자신의 모든 삶을 이끄신다고 고백해놓고 왜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요리하는 일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너무나 모순된 신앙이지 않는가? 갓난아기의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일 때도 하나님은 먼저 오셔서 행하시고 있다. 특별히 모유를 먹일 때를 생각해보라.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거룩하게 그 현장에 함께 임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남편을 위해 된장찌개를 끓이는 일에도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신다. 심지어 부부간의 성생활에도 그렇다. 나아가 자녀들 혹은 시댁 식구와의 갈등에도 주님은 먼저 가서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고 있다.
그렇다고 신자가 바라는 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서 형통케 해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과 계획을 당신의 일정과 방식대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 본인부터 주님처럼 오직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겠다는 한 가지 목표만으로 살아보라. 아내와 남편 간의 관계에서, 부모 자식 간의 사이에, 기타 모든 인간관계와 하는 일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 나라와 의가 실현되기를 소원해 보라. 하나님이 그 소원을 안 들어주실 리가 있는가? 아니 하나님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먼저 행하고 계신데 신자는 자꾸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만 투정하고 있으니 그분의 역사에 동참하지 못하는 법이다.
바꿔 말해 자꾸만 종교적으로 거창한 일을 계획해 시도하거나, 또는 그런 일만 발견해 동참하려고 덤비면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내모는 결과가 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종교 왕국을 실현하러 온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는 그분의 나라를 세우려 오셨다. 또 그 나라를 실천하는 유일한 방도도 당신부터 먼저 죽은 십자가의 의였다. 그런 나라와 그런 의를 먼저 구하지 않는 한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을 찾을 수 없다. 혹시 찾아도 동참할 수는 절대 없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신자가 예수님을 닮으려면 당연히 예수님이 하셨던 대로 해야 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인칭 대명사에 신자 본인을 대입하여 그대로 준행하면 된다. “신자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신자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신자를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신자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그렇다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배워서 따라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어 신자를 통해 역사하신다. 성부와 성자에게 단 한 번도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듯이 예수님은 신자와 세상 땅 끝까지, 끝 날까지 함께 동행해주시기에 분리는 없다. 문제는 성자와 성부에게는 불일치가 없었지만 예수님과 신자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불일치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멸시와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고난마저 성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이루시는 더 크고 기이한 역사임을 확신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 아닌가? 바꿔 말해 우리가 그런 확신만 가진다면 예수님이 당신께서 약속하신(요14;12) 대로 우리도 그분보다 더 큰 일을 이뤄낼 수 있다.
신자란 인생의 목표가 불신자 때와 정반대로 바뀐 자다.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기에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부족하다고 염려하지 않게 된 자다. 그렇다면 오히려 자기 주위에 하나님 나라와 의가 드러나지 않으면 염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부족해 보이면 자기 인생을 걸고서라도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 않는가? 자기 인생의 목표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기도하지 않을 신자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 나라가 미치는 영역은 광범위하다. 그분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따라서 신자가 자기 인생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겠다는 목표에도 한정된 수치나 영역이 따로 없다. 수치가 없으니 구태여 중도에 점검해보고 제대로 달성되지 않았다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바울처럼 지난 일은 잊고 앞만 바라보고 가면 된다. 그저 자기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건과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만 전해지도록 하면 된다. 오른 손이 한 구제와 선행과 전도를 왼손이 모르도록 일상 습관이 되어 있으면 된다.
하나님의 통치영역뿐 아니라 신자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은총과 권능에도 전혀 제한이 따르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행하겠다는 신자가 종으로 횡으로 밟는 땅은 다 차지하게 해주신다. 현실적인 풍요와 형통이 아니다. 신자가 주님의 의와 선을 베풀면 베풀수록 그 거룩한 영향력은 더 커진다는 뜻이다. 불신자 시절에 재물을 목표로 했을 때에 채우면 채울수록 더 갈급해지는 것과는 정 반대다.
목표란 항상 달성되면 즐겁고 기쁜 법이다. 그 반대로 달성되지 않으면 자연히 불안하고 힘이 빠지게 된다. 그래서 목표가 달성된 이후를 소망하면서 달려가는 과정 동안에는 어떤 고난과 위험도 감수하게 된다. 신자란 자기 주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이 된다. 도저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만족과 행복이다.
인생에 감정이 잘 절제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마음의 평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 평강이 무너지는 90% 이상의 원인은 염려 불안이 생기는 것이다. 또 염려 불안의 전적 원인은 바로 자기 인생의 목표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감정을 가장 잘 절제할 수 있는 방안은 바로 자기 인생의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는 것이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가? 자기 주위에 주님의 향기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도 신자에게 염려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분의 큰일을 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심지어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한 마디로 신자로서 바뀐 인생의 목표대로 살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래선 주님 안에서 아무리 기도해도 감정의 평강을 얻을 길이 없다. 어쩌면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하면서 단순히 주님의 이름만 들먹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여전히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 기도 응답이 왜 이리 더딘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 내지 실종한 것 같아서 초조하기 짝이 없다.
바꿔 말해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으면 아무리 고급한 심리 요법으로 내적 치유를 한다고 해서 감정적 평강을 얻을 수는 결코 없다는 뜻이다. 신자가 정작 닮아야 할 예수님을 보라. 아니 바울만이라도 보라. 그들이 내적 치유에 관심을 쏟은 적이라곤 없지 않는가? 바울에게 마음으로 눌리는 일 딱 하나를 빼고는 말이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28-30)
그는 자기 주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되지 않거나 손상되는 것만 염려했다. 치유를 받아야만 할 내면의 상처와 흠집이 따로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주님께 받은 소명만 바라보고 사니까, 그래서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으니까,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불안과 염려가 생길 리가 없었다.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도 그랬다. 바로 신자가 다다라야 할 목표 지점이다.
이제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보자. 신자가 되어서도 감정을 제대로 절제 못해 수시로 허물, 분노, 심지어 죄악으로 떨어진 적이 있는가? 그런데 그 치유법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내면의 평강을 구하는가? 찬양 부르며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가? 간혹 큰 허물과 상처가 생기면 전문가에게 상담하여 내적 치유를 받는가?
그보다 정작 따져보아야 할 것은 정말 신자로서 소명대로, 바뀐 인생 목표대로 살고 있는지 여부가 아니겠는가? 쉽게 말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이뤄졌는데 기뻐하지 못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결국은 보물이 있는 곳에 자기 마음이 따라 가지 않겠는가? 그럼 마음을 다스리지 말고 보물부터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2/27/2009
그러다가 가끔은 부채도사처럼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어느것이 맞을까? 의 방식..
참 어처구니 없이 배워온 믿음의 방법론이였습니다.
신자로서 소명을 받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는지, 오직 그 소명이 보물이 되어있는지,
정말 그런 상태가 되어있는지가 너무도 중요한 과제임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