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죄 위에 더한 악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삼상12:19)
사울이 이스라엘 왕으로 치른 암몬과의 첫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이 하나님께 큰 죄였음을 회상시키며 그들 목전에서 기도하여 하늘에서 우레와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언뜻 보면 온 백성이 기뻐하는 잔치에 재를 뿌린 것 같고 또 백성들이 자기를 버리고 사울을 택한 것에 대한 늙은이의 질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 과연 왕을 구한 것이 백성이 죽지 않게 해달라고 빌어야 할 만큼 그리도 큰 죄인가요? 이스라엘은 끝까지 삼손 같은 사사나, 엘리 같은 제사장이나, 사무엘 같은 선지자가 다스리는 온전한 신정(神政)국가로 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물론 원칙적으로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작 죄로 여기는 내용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왕정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런 제도를 요구하는 백성들의 근본 마음이 악했습니다.
그들이 왕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8:5) 문제는 사무엘이 늙었고 아들들이 부패한 것이 첫째 이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중요한 이유를 덜 중요하게 보이도록 하려고 앞세운 눈가림일 뿐입니다. 사무엘이 늙어서 왕을 구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왕을 구하기 위해 늙은 당신을 대신할 자가 없다는 핑계를 댄 것입니다.
왕을 구한 진짜 이유는 열방과 같은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우상을 세워 섬기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대의 모든 왕들은 전쟁 전문가였습니다. 본인부터 대부분 위대한 장수 출신이었고 왕자가 받는 첫째 훈련도 승전 기술이었습니다. 왕은 다른 나라와 전쟁에서 백성을 지켜주는 대신에 백성은 왕을 섬겨야 했습니다.
다른 말로 출중한 인간의 능력으로 백성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당시의 왕정제도였습니다. 사무엘더러 늙었다는 것이 핵심 이유가 아니라 핑계인 것만은 분명해도, 인간 사무엘에 의지하려는 내심은 일부 드러낸 것입니다. 당신이 아직 젊다면 왕을 요구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보다 인간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 잔치 마당에서 사무엘은 다시 한 번 백성들의 잘못된 믿음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실찌라도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12:12) 하나님보다는 인간 왕에게 다스림을 받고 싶다고 너희들 입으로 대놓고 말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왕정제도가 잘못이라는 자리에 되돌아 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무엘은 이어서 백성들더러 여호와께 순종하라고 하면서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좋으니라마는”(12:14)이라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왕정제도를 하더라도 왕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좇아서 백성들도 함께 좇게 하면 아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따져서 처음 왕을 요구할 때에 백성들이 만약 이렇게 말했다면 사무엘이나 하나님이 문제 삼을 것 없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나라 지경도 많이 넓어졌으니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왕을 세워 통치 질서가 효율적으로 이뤄지도록 해 달라.” 잘못의 초점은 “열방과 같은” 왕을 세우겠다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의 또 다른 예리한 지적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21절)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절대로 인간을 유익하게도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 왕이나, 말과 병거나 무기 자체가 헛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구원한다고 믿는 믿음이 헛된 것입니다. 때로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라도 진짜 유익을 주고 구원을 베푸시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외에는 유익과 구원을 구하지 않으면 즉,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분께만 순종하면 제도나 사안이 명백한 죄악이 아닌 이상 무엇을 구해도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자기들 잘못을 고백하며 여호와께 대신 기도하여 용서하여 주기를 요구했기에 아주 선한 회개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이 드러나 있습니다.
우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직접 기도하지 않고 대신 기도한 잘못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로선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대속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또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사무엘만 여호와를 믿었고 백성들은 다른 신을 믿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잘못은 당신의 하나님께 당신이 기도하여서 우리로 죽지 않게 해달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신령한 사무엘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잘 응답해 주신다고 믿는 사고가 문제였습니다. 그들 목전에서 기도했더니 금방 우레와 비가 내렸기에 다시 기도하면 당장 멈출 것 아니냐는 뜻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기 믿지만 여전히 사무엘이라는 인간에게 더 의지한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도 여호와 신앙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 왕에게 더 의지한 것이 죄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봐줄만 합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믿고 기도 부탁을 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잘못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을 구하는 악이 일반적인 죄와 동일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저 한 가지 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왕을 구한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단지 또 다른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을 다스릴 분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왕으로 대체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려면 “죄악 중에 제일 큰 죄악, 아니 도저히 지어서는 안 되는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모두 지금 바로 죽임의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가 되었어야 합니다.
백성들의 믿음이 이러니 사무엘이 큰 잔치에 재를 뿌릴 만도 하지 않습니까? 제발 너희와 너희 왕이 여호와께 전적으로 순종하라고 입이 아프도록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늙은 선지자의 젊은 왕에 대한 시기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곧 여호와를 배역하리라는 성령의 깨우침이 있었기에 백성들의 앞날을 너무나 염려한 충정의 표시였습니다. 너희의 믿음 수준으로는 내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죽임을 면케 해주어도 정작 여호와께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하며 구원조차 얻지 못할 수 있다고 진정한 영적 각성을 촉구한 셈입니다.
오죽하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제발 너희는 여호와만 경외하며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말하겠습니까? 나한테 중보기도 부탁하는 것 전부 다 들어줄 테니 제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안전과 만족과 행복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왕정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왕에게만 혹은 먼저 의지하는 너희와 너희 왕마저 마치 자기 능력으로 전쟁에서 이긴 양 생각하는 그 믿음이 죄악 중에 가장 큰 죄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탓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사무엘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꾸짖었지 않습니까?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본문 말씀에서 정말 큰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신자도 재물의 증가나 사업의 형통과 더 높은 직위 등을 간구할 수 있습니다. 재물, 사업, 직위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내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믿고 구하는 것이 큰 잘못입니다.
바꿔 말해 열방 같은 왕을 달라고 요구한 이스라엘 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물과 권력으로 안전을 구하는 세상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나에게도 그것들을 풍성하게 주셔서 안전하게 지켜 주시옵소서.”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믿긴 믿되 재물과 권력을 먼저 혹은 더 중하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를 진짜로 지켜주는 힘이 재물과 권세이고, 하나님은 그것들을 조달해주는 심부름꾼에 불과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도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큰 죄가 아니라고, 아니 어떤 신자들은 아주 뜨겁고 긍정적이며 열심인 신앙이라고 간주합니다. 믿음이 그런대로 바로 잡힌 자라도 “윤리적 죄에다 재물 밝히는 죄를 더했나이다.” 정도로 그칩니다. 죄악 중에 가장 큰 죄, 아니 지금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재물을 과도하게 밝힌 것만 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구하면 죄고, 적게 구하면 죄가 아니라고 단순하게 판단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재물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마음으로 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재물이 삶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를 목적으로 구한 것이 죄입니다.
그 둘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말 표현은 항상 덜 정확하고 애매하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실제로는 재물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어찌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까? 단지 수단으로 구하라니 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재물이 생기면 문제가 해결되기에 수단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지금 구하고 있는 목적물 자체가 재물이지 않습니까? 이런 정도의 설명으로는 항상 뭔가 미진한 부분이 남습니다.
재물을 구하는 기도의 형식과 내용으로 따지면 누구나 대동소이 합니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특별히 기도문을 고상하고 경건하게 꾸며야 하거나 하나님이 오해하지 않도록 정확하게 표현할 이유도 없습니다. 재물을 구하면서도 다른 것을 핑계 댈 필요도 하등 없습니다. 재물이 꼭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솔직하게 아뢰면 됩니다.
목적으로 구하지 말라는 정확한 뜻은 이것입니다. 기도하여 구하는 재물이 생기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더 이상 염려가 없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뒤집으면 그 구하는 재물이 아니면 이 문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열방 같은 왕이 아니면 다른 종족과의 전쟁에서 매번 질 것이라고, 도저히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궁핍에 처하든 부요를 누리든, 자유인이었던 옥에 갇히든 하나님이 하실 일과 그 영광은 자신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없기에 자꾸만 그분이 아닌 다른 쪽으로 시선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인식은 못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진짜 심중을 꿰뚫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22절) 이스라엘과 동일한 죄를 매번 범해도 이미 택하신 우리를 결코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속마음으로 재물을 목적으로 삼는 기도에는 그분이 절대 쉽게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 빼고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대신에 바울처럼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존귀케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진정한 고백이 나올 때까지 징계와 연단을 계속 주시면서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재물을 양껏 구하십시오. 단 하나님은 당신의 방식으로만 일하시며 재물도 단지 그 한 수단에 불과함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또 그분께 과연 무엇이 진짜로 죄가 되는지, 무엇이 진짜 그분의 기쁨이 되는지 정확히 깨달아 구하십시오. 요컨대 재물로 자기 안전만 도모하려는 기도는 진짜로 죽을죄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3/23/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