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뜻은?

조회 수 481 추천 수 11 2012.02.15 03: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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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뜻은?


[질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성경 말씀을 “먼저 너의 마음 그릇을 닦아라.”는 뜻으로 알고 있어도 되는지요? 예를 들어 말로써 남에게 상처 주는 일 같은 제 성격상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제 마음의 그릇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또 기타 종교 혹은 무종교에서의 마음 닦기와 기독교의 그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스스로 수양하는 것과 기도하여 성령에 의지 하는 것의 차이인가요? 타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육의 문제는 금방 와 닿는데 영의 문제는 솔직히 막연하고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육의 문제의 연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스트레스와 고통이 없다는 천국을 가본 적이 없어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도 지금 여기서부터 그것을 구하는 것은 영의 문제라기보다 육의 문제에 대한 기도가 아닐까요? 영혼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영혼을 위한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몇 가지 서로 다른 주제의 심오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질문 주신 순서에 따라 최선을 다해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내용인지라 세 질문으로 나눠 답변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자님 외의 일반 방문객들도 가능한 세 답변을 연결해서 읽으시는 것이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뜻은?
- 타 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의 차이는?
- 천국 가기를 소원하는 것이 육의 문제가 아닌가요?

문맥 안에서의 뜻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1-34)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선 제일 먼저 앞뒤 문맥을 잘 살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찾아내야 합니다. 일부만 인용했지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의 의미는 반드시 마 6:27-34 전체와 연결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재물 때문에 염려하는 일”과 연관됨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속한 전체 문맥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좀과 동록과 도둑이 설치기에 썩어 없어질 이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 가는 곳에 보물을 쌓기 마련인데 신자더러 재물과 하나님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말고 오지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이유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중 나는 새나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먹이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자녀들은 더더욱 그럴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특별히 땅에서의 안전을 위해 재물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필요한 것들을 다 아시니까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다 채워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차 혹시라도 재물이 부족해서 굶거나 헐벗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경단상” 사이트의 # 786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은?”의 글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의 문맥상의 일차적 의미는 신자가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행위를 하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필연적 결과는 그런 모습으로도 나타나겠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주인으로 재물과 하나님 둘 중에 어느 것을 모시느냐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 땅의 안전, 만족, 행복을 위해서 재물에만 의지하지만 신자는 그와 다르게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재물이 중요치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먼저가 아니면 됩니다. 꼭 필요한 재물이 있다면 간절히 구해도 됩니다. 그러나 필요(need)한 재물은 없으면 기본 생활이 안 되는 것이지, 자신의 욕망(desire)을 채우는데 소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신자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구절이 포함된 문맥 안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신자는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재물 염려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주인으로 모신 그분의 뜻을 삶에서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보물을 이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으며 사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가 성경에서 일관되게 의미하는 바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의 일관된 의미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분의 통치는 모든 시공간을 아우르기에 영원토록 가시적인 우주전체 물질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 둘  다에서 완벽하게 이뤄집니다. 신자는 현세나 내세에서나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기 때문에 이미 그분의 나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진심으로 자신의 구주로 모시는 순간 이미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보장되었다는 것은 그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천국 가기 위해 믿음 외에 추가로 요구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를 향한 성경의 모든 권면은 사실상 이 땅에 살 동안에만 해당됩니다. 천국은 이미 죄와 고난과 무관한 곳이기에 따로 노력할 일이 없습니다. 세세토록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 드리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이 땅에서 행하는 것으로 천국에서의 상급은 달라집니다. 그 의의 면류관을 더 받기 위한 소망을 품고서 열심히 그분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순간 내 대신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너무 좋아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야지, 상급만이 거룩하게 살려는 원인이라면 그 신앙은 조금 재검토해봐야 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 뜻입니다. 이 땅의 고난을 빨리 끝내고 천국에서 슬픔과 한숨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의미로 적용해선 안 됩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상급만 바라는 삶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 이루고자 원하시는 뜻을 “이 땅에서 실제로” 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의미임을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고 이미 쉽게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일을 위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서 사는 것이 보물을 하나님께 즉,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천국가면 다른 주인이란 아예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분의 ‘의’는 뜻(will), 계획(plan)을 말하는 의(意)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설명 드린 대로 “하나님 나라” 안에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그분 뜻대로 사는 것이 입니다. 주인으로 모신 자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이미 그는 주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태여 그의 뜻을 구하라고 중복해 설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신에 그분의 의로우심(righteousness)을 뜻하는 의(義)인데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뜻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1-24)  

로마서는 1:1부터 3:19까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풀어 설명합니다. 그리고선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고 결론 내립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公義, justice)를 실현하자면, 도덕적 원칙대로 벌을 주자면, 모두가 사형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러면 당신께서 창조하였고 찬양을 받을 대상인 인간은 당장 이 땅에서 몽땅 다 죽어 없어져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선 차마 그럴 수 없습니다. 대신에 완전한 대속제물인 독생자 예수를 죽여서 인간의 죄 값을 철저히 치르게 하고 그 사죄의 은혜를 믿는 자는 구원해주기로 했습니다. 아무 소망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는 긍휼입니다.  또 그래서 공의와는 다른 그분만의 의로우심(righteousness)인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3:25,26)

한마디로 죄인이 예수 믿으면 그 믿은 것으로 의롭다 칭해준다는 것이 바로 그분의 의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 상식으로는, 불신자들의 반박이 이 부분에 집중되듯이, 아무 선행이나 공적도 없이 예수만 믿었다고 구원을 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공의(justice)의 차원으로만 따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주시기로 한 것 자체가 그분의 의라고 합니다. 의로운 그분이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주기로 했으니 그 구원도 당연히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하신 일이니 무조건 의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십자가 구원 자체가 실제로 공의와 사랑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완벽한 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십자가 외에는 아무리 경건하고 심오한 방식의 구원이라도 절대로 부족하고 공의라는 측면에서마저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착한 자가 천국 가야 한다는 일반적 상식에 오히려 치명적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변증의 동산”의 “믿지 않는 형제에게” 사이트의 #12 “착하게 사는 자는 천국 가지 못한다.”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쉽게 간과되고 있는 의미

이외에 이 말씀을 이해함에 거의 모든 신자들이 간과해버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상기에선 직접 연관되는 문맥에서의 뜻만 살폈지만 아시는 대로 더 크게 보면 산상수훈(마5-7장)에 포함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많은 일반 유대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먹고 마시는 것만 자기들 신에게 혹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방인과는 다르게 살라는 것이 그 근본적 의미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가장 일차적으로는 십자가 복음으로 초대하는 말씀이 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를 지낸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과 다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만 중시하는 유대교를 떠나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기독교 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과 여호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어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설명 드린 대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 그분과 화목하여 그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십자가 예수님의 대속 죽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던 당시의 상황에선 이미 믿은 신자더러 도덕적 의로움과 종교적 경건함을 추구하라는 것보다는 불신자를 전도하는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참의미를 제대로 깨달아 그 복음의 은혜 가운데서 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이 이 말씀에 도덕적 종교적 의미를 너무 심오하게 적용하려다 보면 자칫 본질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은 신자가 십자가 은혜 안에 온전히 살고 있다면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 종교적 의미도 자연히 실현되는 것입니다. 우선 맨 먼저 살펴 본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문맥상의 뜻도 주님의 십자가 의(義) 안에 완벽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가 누리는 특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35절)을 의미합니다. 또 38-39절에 확장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장래 일”도 포함됩니다. 영생을 주신 당신의 자녀는  천국으로 인도할 때까지 그 일생을 하나님이 보호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 인도 보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을 은사(아무 받을 자격 없음에도 무상으로)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십자가) 의를 이미 구하여 그분을 믿은 자라면 그 다음 단계로 “그분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아니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예수 믿는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분의 환난에서 지켜주는 인도 보호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온전한 뜻(意)과 계획을 자신의 일생을 통해 실현해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스스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합니다. 또 그분이 자신에게 맡긴 화목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가장 최근의 글인 “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의 # 16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또 어쩌면 그 글이 본 질문의 더 구체적인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예를 든 성격상의 단점을 고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 중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일에 속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2-24)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의 전부 혹은 가장 중요한 일로 간주해선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는 일 중의 일부입니다. 또 이미 설명 드린 대로 당시 상황과 예수님의 의도에 바탕을 둔 문맥상의 의미와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말하는 뜻을 함께 아우르는 관점에서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의 특권과 관련시켜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간혹 목사님들이 이 말씀을 교회 행사나 봉사에 적극 참여하는 일로 제한시켜서 해석 내지 적용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부분적 의미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준비요 훈련입니다. 바울이 십자가 복음에 대해 로마서 11장까지 자세히 설명한 이후 1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신자가 복음을 실제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 의를 구하여서 복음 안에 들어온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 즉,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 안에 들어온 자라면 자연히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간혹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그렇게 살려는 열망은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나아가 여호와를 믿는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다른 유일한 기준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義)로 온전히 덧입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내면에 여전히 죄의 본성이 살아 꿈틀거려도 하나님께 이미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주님의 자녀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확신하기에, 인생의 목적이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으로 이미 수정되었고 또 세상 사람과는 정반대의 삶의 방식(재물 대신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방식)으로 실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준에 따라 질문하신 두 번째 주제인 타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의 차이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2/13/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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