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의 비결을 알고 있는가?

조회 수 59 추천 수 0 2019.02.24 10:04:53

(민 11:4-9) 자족의 비결을 알고 있는가? 

구약성경강해 (17) / 민수기강해(7)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민11:4-9)

 

이스라엘을 탓할 자격이 있는가?

 

이스라엘이 아무 맛도 없는 만나만 계속 먹게 되자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한 일이 이미 한 번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시나이 광야에 도착해 십계명을 수여 받기 전에 불평했고 하나님은 하늘에서 메추라기를 내려 고기를 먹게 해주었습니다.

 

본문은 34, 35절에서 기브롯핫디야에서 탐욕을 품은 자들이 심판 받아 장사되었고 하세롯으로 진군했다고 말합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와 시간이 출애굽 16장과 다릅니다. 유월절 제사를 지내고 인구조사를 마친 후에 가나안 땅으로 진군을 시작한 얼마 후의 일입니다.

 

나중에 40년간 광야를 방황하는 기간까지 합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자주 또 많이 불평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출애굽기 16장과 본문의 사건은 애굽의 열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는 기적을 맛본지 길어야 일년하고 조금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여호와께 받았던 은혜를 너무나 쉽게 잊고 있습니다.

 

또 지금 만나를 먹고 있고 성막이 완성된 뒤로는 구름과 불 기둥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그분의 기적을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는 관심이 없고 조금만 힘들어도 금방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봐도 참 한심스럽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에게 그렇게 비평할 자격이 있습니까? 솔직히 따지면 바로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주일 하루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충만해집니다. 그러나 2,3일만 지나면 금방 잊고 다음 주일에 나와서 회개하는 일을 계속 반복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성정이 연약하고 변덕이 심하긴 동일합니다. 죄로 타락한 본성이 살아 있는 인간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도덕성과 종교성과 크게 상관없이 의심과 불평은 자연히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모든 인간이 가시덤불 같은 세상에 살며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는 숙명 아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본문의 이스라엘의 불평을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쉽게 잊고 권능을 못 믿었기 때문이라고 쉽게 해석해버립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이적이 너무나 엄청나므로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만나를 먹고 있고 구름 불 기둥을 눈으로 보면서 장막을 걷거나 펼지며 행군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잊거나 못 믿을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자고로 가장 머리가 좋은 민족입니다. 그들은 절대 바보가 아닙니다.

 

거기다 먹고 마실 것이 없는 광야에서 넉넉히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으니까 오히려 고기 야채 과실도 얼마든지 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미쳤을 수 있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신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우리도 당장 눈에 보이는 기적은 없어도 과거의 큰 고난에서 기도하여 응답 받은 체험들이 있습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강하게 붙듭니다. 그래서 왜 아직도 이 간단한 문제 하나 해결해주지 않는지 불만이 생깁니다.

 

이런 의심은 자연스런 의식의 흐름입니다. 피조물의 무력 무능함과 그 한계를 시인한 것입니다. 이는  잘못도 죄도 아닙니다. 믿음이 좋다고는 말을 못해도 어쨌든 믿음이 작동한 결과입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기도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지 않습니까?

 

거기다 신자는 꼭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며 가난하게만 살아야 합니까? 한국에서 기독교가 번창한 때가 언제입니까? 달 동네에서 방 한 칸에 온 식구가 기거하며 구식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방이 세 개에 수세식 화장실 둘이 달린 아파트로 이사가는 것을 목표로 성실히 일하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신자가 그렇게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죄악이 아닙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명령(창1:28)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신자라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아주 선한 일입니다.

 

섞여 사는 무리의 탐욕

 

이런 현실의 재물을 취하는 문제에 대한, 예컨대 신자가 백만불짜리 집에 살아도 되는지 등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본문 4절에 나옵니다. 누가 어떻게 불평했는지 살펴보면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타인종들이 불평했습니다. 주로 히브리 여인과 결혼한 애굽인과 이방 족속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히브리 신의 능력이 애굽의 우상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세계에서 최고임을 목격하고 체험한 자들입니다. 비록 첫번째 유월절에 친척 내지 가족들이 희생당했을 수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여호와의 그런 큰 권능에 항복한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그들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히브리 신을 따라나왔습니다. 뭔가 여호와에게 보상을 기대하는 심리가 있었을 텐데 막상 눈 앞에는 광야요 맛도 없는 만나뿐입니다. 설령 그런 기대 심리가 없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요구하는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애굽에서 먹던 고기 야채 과일입니다. 특급 호텔의 고급 요리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추가적 보너스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평상시 가끔 먹었던 것들입니다. 그런 별미를 한 번쯤 먹게 해달라는 불평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화려하고 사치스런 것들을 구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탈출구가 없이 사방이 꽉 막힌 고난과 문제만이라도 해결해달라고 구합니다.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삶을 바랍니다. 큰 문제 없이 평안했던 이전의 생활로 되돌려만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은 그런 자를 탐욕에 사로잡혔다고 표현했고 34절에서 죽음의 심판을 내렸습니다. 엄청난 과욕을 부린 것도 아닌데 하나님은 극렬히 진노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고기가 질려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한 달이나 넘치도록 주셨습니다.(19-21절) 하나님은 도무지 일관된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아서 신자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혼돈스럽습니다.

 

하나님이 고기를 내려주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평이 결코 과도한 요구가 아니며 그 타당성을 인정해준 셈입니다. 그렇다면 또 탐욕이란 신자가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들의 질과 양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만약 100% 구제와 선교에만 사용한다면 돈은 많을수록 좋은 것 입니다. 이곳의 세인트 쥬드 병원에 펀드가 수천 만불 모였다면 아주 의로운 일이며 하나님도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질의 최고급이나 양의 최대화가 탐욕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지금 진노하신 원인이 다른데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와 생수를 주어서 생존을 책임져 주시고 있고 당신께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했습니다. 그럼 모든 상황과 여건을 하나님이 마련해주셨으므로 그분에게 마땅히 순응해야 말하자면 자족해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나중에 40년 광야에서 방황하는 벌을 받았을 때도 하나님은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도 부르트지 않게 이스라엘을 보호 인도해주셨습니다. 그 때처럼 지금도 큰 문제와 고난이 없으니 불평하지 않고 자족했어야만 합니까? 물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이 진노하신 일차적인 이유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탐욕에 사로잡혔다고 표현한 것과 성경이 신자더러 자족하며 감사해야 한다고 요구하는데는 훨씬 더 깊은 뜻이 있음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풍부과 궁핍에 처하는 비결

 

잘 아시는 대로 빌립보서 4:11,12에서 바울은 풍부하나 궁핍에 처하나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우선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자족했으니 재물의 질과 양에 무관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풍부하게 주시면 감사하며 즐기고 또 남는 것이 있으면 주변에 나눠주면 됩니다. 때로 궁핍에 처하게 할 때는 검소하게 절약하면서 서로 가진 것들을 나눠 쓰면 됩니다.

 

실제로 한국 청년들이 N포 세대라고 칭하며 어떤 목표를 세워도 도무지 이룰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삽니다. 자기가 소원하는 만큼의 재물의 질과 양은 아무리 해도 얻지 못한다고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버킷리스트를 달성하고 요로(Yolo) 인생을 목표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재물과 무관하게 자족하며 살아보겠다는 몸부림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어쩔 수 없는 여건에 순응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와 기쁨을 추구합니다. 불신자들 중에는 미니말(minimal) 라이프, 나아가 무소유까지 지향하며 정말로 자족하며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한국교회의 모습은 도리어 이와 거꾸로입니다. 부끄럽게도 잘만 믿으면 현실적 복을 크게 받는다는 탐욕적인 기복 신앙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족한다는 의미의 핵심은 4:13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기에 내가 그 능력으로 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한국의 기복적 교회에선 이 구절을  내게 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곡해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키우라,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크게 잡으라, 큰 비전을 품고 큰 계획을 세워서 간절하고도 뜨겁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업도 번창하게 해주고, 질병도 낫게 해주며, 아이들도 아이비 리그에 합격시켜 주신다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분명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따로 받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과 나의 인격적인 동행 안에서 무슨 일이든 수행합니다.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모든 것을 의탁한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이 행한 모든 일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자녀의 출세를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자신의 지병을 낫게 해달라고 세 번을 기도한 외에는 개인적 형통은 전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이 가끔 풍부한 재물을 주시면 그런 일들에 활용했습니까?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의 결혼 여부에 관해 설왕설래가 있지만 아내와 동행하는 다른 사도와도 달랐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은 후로는 평생을 오직 선교에만 헌신했습니다. 당시의 세계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 연안을 세 번이나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지구를 세 바퀴 돈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때로는 이적으로 치유 사역도 행했습니다. 필생의 꿈은 당시의 땅끝인 서바나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행한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안에서 행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때로 궁핍에 혹은 풍부에 처하게 했지만 그 일을 하는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하시더라는 고백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돈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긴 해도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일은 남들의 도움은 물론 바울 자신 즉, 인간의 능력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전적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순전한 복음을 성경의 진리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사실을 하나 가감 없이 온전히 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참 복음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생명 아니면 죽음 둘 중 하나의 냄새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개인의 이름을 높이거나  안락하고 풍요한 삶은 전혀 바라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먹득 마시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지기만 소원했더니 하나님이 구원을 주실 자에게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셨고 완악하여 심판할 자는 그분이 방기하셨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많이 채워주시는 하나님

 

문제는 빌립보서 4:15-20에서 바울이 빌립보교회가 극히 가난한 중에 헌금한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리라(19절)고 선언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흔히 헌금을 많이 하고 교회 일에 성실히 봉사 충성하면 하나님이 복을 부어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한 지역 교회가 아니라 바울 개인에게 헌금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선교하는 일만 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헌금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복음 전파에 적극 참여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가난한 중에 생활비를 쪼개서 헌금했습니다. 그만큼이나 헌금하고 나면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는 자연히 들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그 문제만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격려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쓸 것을 채워준다”고 했습니다. 기도했거나 소원하는 것들을 그것도 많이 채워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주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를 쪼개어서 냈으니까 그 결핍된 부분을 충분히 보충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렙다 과부가 생활비 전부인 동전 두닢을 헌금하자 주님이 그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성경 기록은 없지만 그 후에 하나님이 반드시 채워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굶어 죽었을 텐데 그런 일을 성경에 기록할 리 없습니다. 주님도 믿음만 칭찬하고 가만히 계셨다면 입술로만 공수표를 날린 꼴이 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가 정말로 복음만 전하고 선교에 열심을 내며 헌금 사용을 투명하게 그런 하나님의 일에만 사용한다면 생활비를 쪼개어서 낸 헌금이나 십일조를 그분이 반드시 다시 채워주십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은 마땅히 할 바로 자연히 성적도 오르므로 학생 본인에게 유익합니다.

 

바울에게 헌금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이 그 헌금을 사용하여 몇 명을 회심시켜서 침례주었다는 선교 보고를 들으면 아주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헌금을 하고 난 후 자신들의 현실 삶의 방식부터 절제 검소하게 되며 그럼 인생도 아름답고 거룩하게 바뀌면서 스스로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 위에 현실적 형통과 재물이 아니라 정말로 오묘하고 정밀한 하나님만의 차원이 다른 은혜를 발견하며 누리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신앙이 크게 성장됩니다.

 

바울은 단순히 재물에 대한 태도를 검소하고 절제하는 것으로 바꿈으로써 자족한 것이 아닙니다. 또 재물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배제하고 무소유를 지향하지도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헌금을 부탁하고 모집했습니다.  서바나 선교를 가면서 로마 교회에 들러서 도움을 받고싶다고 요청했습니다.

 

반면에  빌립보 감옥 안에서 한밤 중에도 예수 십자가 대속구원의 복음을 순전히 전파했더니, 비록 자신은 발이 착고에  차이고 몸은 쇠사슬에 묶여있어도 그 육신만 묶였지 전해진 말씀에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은 도무지 묶을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로마의 한 가옥에서 2년 간 연금 생활을 할 때에도 사탄의 도성의 한복판에서 오히려 성령의 권능이 더 활활히 불타오르더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에 헌신만 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다 책임져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상의 다른 만족은 없었으며, 또 그래서 다른 데서 만족을 찾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성경은 신자가 자족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족할 수 있었기에 바울은 완전히 죽을 고비도 수도 없이 넘겼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 전에 맞았던 매로 잘못 하면 한 번만 맞아도 죽을 수 있는 형벌입니다. 다섯 번을 맞고도 살아났습니다. 자기가 다섯 번을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복음은 전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고후11:23-27)

 

그런데 바울은 그런 극심한 육체적 고통보다 속에서 눌리는 것이 더 괴로웠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연약한 교회와, 믿음이 미성숙한 성도와,  사탄에 미혹된 영혼들이 더 안타깝고 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영적인 눌림이 육체적 고통에 비교가 안 될만큼 더 힘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자족하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는데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 안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선언했습니다.(고후12:9,10) 궁핍하든 풍부하든 예수 안에 있기에 자족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왜 진노하셨는가?

 

본문으로 돌아가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 섞여사는 무리들을 보고 탐욕스럽다고 정죄하셨습니까? 시내 산에서 가데스 바네야의 가나안 땅까지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약자가 있어도 도보로 한 달도 안 되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참으로 정미한 기록입니다. 자세히 살피며 읽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2:38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당일날 밤에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을 함께 데리고 나왔다고 진술합니다. 정말로 고기를 먹고 싶으면 그것들 중에서 잡아 먹으면 됩니다. 아이들과 노약자에게 줄 우유가 필요하다 해도 그 일부만 남겨두면 됩니다. 나중에 다른 족속들에게서 가축을 다시 사서 보충하면 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미 애굽의 금은보화를 얻게 해주었지 않습니까?

 

지금 수백년 간 학수고대했던 약속의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진군하는 중입니다. 그런 소명 의식이 철저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히브리인들 만의 자기들 말을 사용하는 자기들 나라를 세울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피의 언약을 맺었고 유월절 제사도 지냈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며 전진했어야 합니다. 반석에서 생수도 나고 만나고 먹고 있습니다. 오히려 금식기도를 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런데 기껏 심심하고 무미건조하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정력이 쇠약해질까 걱정하고 있습니다.(6절)  그것도 아무래도 여호와 신앙이 연약했을 섞여사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의 불평에 이스라엘은 부화뇌동했습니다. 제사장 나라 소명을 지키려면 그들을 가르치거나 만류했어야 합니다., 최소한 함께 불평은 하지 말았어야 할 여호와의 자녀들이 똑같은 불평과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신을 따라 나오면 뭔가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이방인들의 선동에 하나님 백성들이 넘어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기복적인 교회들이 잘 믿으면 복 준다고 가르쳐 사람들을 잔뜩 모읍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그런 가르침과 다르니까 복을 받으리라 기대했던 사람들부터 교회에 문제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키우려는 욕심으로 그렇게 가르친 목사가 교회 문제를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안 그래도 울고 싶었던 차에 이방인들이 뺨을 때려주자 이스라엘은 더 크게 울고 있습니다. 바울이 행한 모든 일들 즉, 하나님의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해준 여건과 상황에 순응하지도 않았습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적절히 관리하며 절제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한 까닭이 그들이 고기를 요구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 신자다운 모습이라곤 단 한 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탐욕의 본질

 

탐욕이란 무슨 뜻입니까? 과도한 욕심입니다. 정도를 많이 오버한 생각입니다. 해선 안 되는 생각, 품어선 안 되는 욕심이 탐욕입니다. 그럼 신자는 물론 모든 인간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가 아니라, 그 밖에서 내 능력으로 내 모든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탐욕이 돈벌레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돈에 대해 의로운 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럼에도 요로 인생을 살겠다는 것은 여전히 인생에서 자기 전부를 걸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재물을 많이 모아도 어떤 근사한 업적을 쌓아도 그들은 허무하고 갈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오며 범사를 그분이 주관 통치하시는데도 그분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탐욕은 무엇입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으면 탐욕입니다. 교회가 십자가 복음을 순전히 전하지 않아서 성령으로 영혼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탐욕입니다. 신자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있지 않으면 탐욕입니다.

 

무엇보다 신자의 가정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유지되지 않으면 탐욕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 있지 않고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 욕심과 가정으로 가정을 꾸려가면 탐욕입니다. 신자의 속에 성령의 역사와 인도가 없으면 그래서 거룩한 성장 대신 정체 후퇴하고 있다면 탐욕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대해 의심 불안해해도 탐욕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해서 탐욕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고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신자가 품지 말아야 할 생각을 갖는 것이 탐욕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의심과 불평을 하는 것은 그분이 범사를 완벽하게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셈이지 않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신자와 세상 끝날까지 땅 끝까지 동행해주십니다. 신자는 영원하신 성령의 전이 이미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당신만의 거룩한 계획 가운데 지금 보호 인도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힘들고 때로 이해가 안 되며 나빠 보이는 문제와 고난이 생겨도 궁극적으로 신자에게 유익하며 당신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십니다.

 

신자는 바로 이런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기에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궁핍과 풍부 어디에 처해도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배운바 대로 실행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데 그 믿음 대로 살고 있지 않다면 탐욕입니다.

 

바울은 재물에서 단순히 자유로워짐으로 자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자기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자기의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두는 것에만 자기도 관심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자족이 자신의 자족이 된 셈입니다. 쉽게 말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일을 했으며, 최소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올해도 여러분은 무슨 일이든 마음껏 계획하여 성실히 수행하십시오. 그 계획에 따라 열심히 돈도 벌어야 합니다. 신자가 되어서 나쁜 일을 도모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단 그 일이 반드시 하나님의 일이어야 합니다.

 

그런 확신이 아직 서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어야, 최소한 그분이 용납해주시는, 그것도 아니면 그분이 동행하고 있는 일이라는 확신은 있어야 합니다. 또 내 자신의 성장에 유익한 일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이름이 주위에 증거되어지는 일이면 제일 좋습니다. 혹시 그 일에 생활비를 쪼개어 사용하거나 헌금해도 하나님은 반드시 쓸 것을 채워주십니다.

 

이런 믿음 밖으로 나가는 것이 탐욕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화를 내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을 당신답게 인정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자기 능력대로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용서해도 그 잘못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 선악과 금령에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에까지 일관되게 드러난 당신의 뜻이지 않습니까?

 

1/2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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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족의 비결을 알고 있는가? master 2019-02-24 59
16 빚에 쪼들려 믿음에 회의가 옵니다 운영자 2013-10-08 621
15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뜻은? 운영자 2012-02-15 481
14 신자와 무소유(無所有) 운영자 2011-08-22 340
13 성경적 청부(淸富) 사상 운영자 2011-08-22 392
12 신자가 부유하게 살아도 되는지요? 운영자 2010-09-23 558
11 모든 죄 위에 더한 악 운영자 2010-04-16 414
10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뜻은? 운영자 2009-11-09 2283
9 당신은 진짜 부활을 믿는가? 운영자 2009-11-04 839
8 네 가지 종류의 사람 운영자 2009-11-04 928
7 최초의 사회개혁자 아브람 운영자 2009-11-04 587
6 스캔들에 혹하는 신자들 운영자 2009-11-04 589
5 조기 은퇴의 비결 운영자 2009-11-04 647
4 가계부를 점검해보라. 운영자 2009-11-04 706
3 자본주의를 대체할 제도는? 운영자 2009-10-25 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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