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청부(淸富) 사상

조회 수 392 추천 수 23 2011.08.22 23: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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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청부(淸富) 사상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잠18:10,11)


잠언을 읽을 때에 간혹 곤혹스런 말씀을 만납니다. 과연 크리스천이 그대로 따라 실행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바로 앞 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견고한 망대”에 비유했으므로 그와 동일한 맥락의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이왕이면 하나님도 잘 믿고 돈도 잘 벌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견고한 망대가 되시는 하나님께 모든 재정적 궁핍이나 문제를 간구하여 해결 받고 그에 따라 수입도 늘었으면 싶습니다. 일부에선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기를 바란다‘(요삼1:2)는 성경구절을 인용해 현실적 축복을 대놓고 약속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돈을 버는 방식만 의롭다면 신자는 더더욱 성실히 부를 쌓아서 어려운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대로 선하게 바꾸기 위해서라도 신자는 정치, 경제, 사회적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행사할 수 있는 권세가 많기에 더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에 청렴한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언뜻 본문을 보면 그런 평신도들의 소박한(?) 바람과 크리스천 청부사상을 뒷받침해 주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비슷한 용어와 표현법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더 강조하거나,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명확하게 대조해 알기 쉽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문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됩니다. 한마디로 재물은 견고한 성이 결코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먼저 부자의 재물을 견고한 성이라고 믿는 것은 부자 본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침 성경은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고 정확히 밝혔습니다. 재물을 얻는 방법이 불법, 부정하지 않고 정당하고 선하다 할지라도 재물을 모으려는 근본 동기가 문제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안전을 재물이 보장해준다고 믿고 돈을 번다면 아무리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아도 하나님이 바라는 바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부요(富饒)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9-21)

예수님이 형더러 자신과 부모의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부탁한 사람에게 답하신 말씀입니다. 부자는 순전히 자기를 위하여 곡식과 물건을 더 많이 쌓아둘 곡간을 크게 짓습니다. 그야말로 “견고한 성”처럼 지어서 “내가 내 영혼에 이르러 평안히 쉴 수 있겠다고”고 안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리 견고하게 곡간을 지어도 좀과 동록과 도적에게 좋을 일만 만들어 준다고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면서 말입니다.  

본 잠언의 기자도 본문에 바로 이어서 어떻게 지적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12절) 부자가 자기 생각으로 재물을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는 것이 바로 교만이자 멸망하는 지름길이라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교만의 의미를 상호 인간관계에서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자기를 높게 여기는 것보다 더 원초적인 교만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참 안전과 행복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오는 것인데도 재물을 그분을 대신해서 견고한 성벽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다시 놀랍게도 사람 사이의 교만이 아니라 "마음의 교만"이라고 표현했지 않습니까? 자기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인생의 안전에 별로 도움이 안 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버는 재물만이 성공을 보장해준다고 여겼습니다. 이 얼마나 큰 교만이자 불경죄입니까? 또 자연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하니 멸망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겸손은 그 반대입니다. 재물을 비롯한 세상의 어떤 것보다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적 겸손의 정의가 인간관계에서 예의가 바르고 자신을 낮추는 정도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6,7) 베드로 사도도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의 겸손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은 그 모두가 교만입니다. 그분의 뜻과 계획은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거나 옳다고 여기는 것이 참 교만입니다. 또 그 근본적인 교만에서 다른 모든 인간관계의 교만도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그분의 소중한 피조물로 모두가 그분 앞에선 동등하고 또 그분의 사랑을 다 같이 받고 있기에 어느 누구도 나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바로 신자의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을 인간세상에서 예의 바르고 경우에 밝다는 칭찬을 듣는데 동원하거나, 또 그렇게 행한 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는 일을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데도 또 다른 교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본문이 "여호와의 이름"이 견곤한 망대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견고한 망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름은 원래 어떤 사람의 정체성, 품성, 인격,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그 사람의 존재 내지 실체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신자에게 견고한 망대가 되는 까닭도 그분의 성품과 속성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모르거나 또 그런 앎에 의지하지 않고 단지 그분만 의지하려는 것은 기계적, 주술적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간단히 비유컨대 아버지라고 자식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을 잘 알기에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보호 인도합니다. 사탕이 아무리 달고 맛있어도 이빨 썩는 줄 아니까 안 주듯이 말입니다. 자식도 아버지가 그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이유가 정말로 자기를 위하기 때문임을 아니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무엇이든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는 아버지만 믿으려 들면 사탕주지 않는다고 보채게 될 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의지하지 않고 단지 여호와이기에 의지하는 것은 마음의 교만이 됩니다. 신자가 이빨이 썩든 말든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혹은 들어주어야만 하는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여겼습니다. 자기 생각이 그분의 실제 품성보다 위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기도하는 대로가 아니라, 당신께서 신자에게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고난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합력하여 궁극적 선을 조성하시는 분입니다.

당신께서 신자를 때로는 상처, 핍박, 억울함, 질병, 궁핍함, 고난 등에 버려두시는 까닭도 바로 신자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려는 까닭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자는 자기가 현실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 그분이 결국에는 선으로 이끄시고야 말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망대를 어디에 세웁니까? 이미 그분의 품 안에 들어왔으므로 세상에 어떤 것도 그분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마음의 확신-즉 참 견손"에 둡니다. 여호와만 의지하려들면 자칫 이제 믿었으니까 어떤 위험도 있어선 안 된다는 착각만 붙들 수 있고, 또 얼마나 크게 착각하느냐를 좋은 믿음이라고 곱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28,29) 예수님이 신자더러 자신을 위해서 곡간을 크게 짓지 말라고 하신 이유 그대로입니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신자를 빼앗을 수 없는데 왜 스스로 자신만의 곡간을 크게 짓느냐는 것입니다.  

신자의 청부사상도 바로 이런 성경적 교만과 겸손의 원리로 다시 살펴봅시다. 청렴하게만 처신한다면 신자도 이왕이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지위나 재물로 세상을 깨끗하게 변화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분명히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방식이긴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위나 재물이 갖는 영향력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 또한 마음의 교만의 일종이지 않습니까? 사회를 정화시키는데 정치력, 자금력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권력과 재물이 하나님을 제외한 채로 혹은 그분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잘못입니다. 또 기독교 지도자들이 나서서 재물과 권세 등의 영향력을 선하게 인정하기 시작하면 그런 마음의 교만이 신자는 물론 기독교 외부로도 급속도로 번져나가게 만듭니다.  

신자가 재물을 선한 방식으로 모으고 선하게 사용한다고 해서 그 재물로 인해 당연히 선한 결과도 낳으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습니다. 죄에 찌든 죄인들끼리 살아가는 현실에선 아무리 해도 온전히 청빈해질 수 없다는 현실적 배경을 무시하고도 그렇습니다. 신자가 청빈하다고 재물까지 청빈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재물과 권세란 선한 영향력보다 악한 영향력을 더 많이 내포하는 법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의 청부사상은 단지 그 모으고 쓰는 방식만 선하면 된다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돈을 모으는 동기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재물과 권력으로 사회를 정화시키겠다고 하는 동기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돈으로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생각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동기보다는 진작 사회를 진짜 변화시킬 수 있는 일부터 먼저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또 그 일을 위해서 만약 재물과 권세가 꼭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그것마저 마련해 주시리라 믿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신자가 아무리 선하게 재물을 모아봐야 죄로 물든 세상에서 돌고 도는 재물자체가 선해지지 않습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주시는 재물이라야 선하다는 것입니다.

알기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고통을 들어주고야 말겠다는 목적으로 연구하여 특효약을 발명하여서 그것도 그런 환자들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염가로 공급했다면 아무리 불티나게 팔려 대박이 나도 하나님이 주신 재물입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불치병을 고침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또 그런 목적으로 약을 발명한 자는 그 대박 난 재물을 또 다른 불치병 연구에 다시 투입할 것입니다. 돈으로 영향력을 끼친 것이 아니라 특효약이라는 일로서 사회를 바꾼 것입니다.

노예제도 해방을 위해서 평생을 바친 윌버포스의 경우를 살피면 더욱 그 차이가 명확해집니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먼저이기에 현실적 여건이 아무리 불리하게 돌아가더라도 그 실현을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면서 전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처음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아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지만 점차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어났습니다. 평생에 걸친 중과부적의 싸움을 외롭게 근근이 감당해나갔지만 재물과 권세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꾼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변화였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전적으로 믿는 자는 마음에 교만이 사라집니다. 자신이야 부요하든 궁핍하든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당신이 뜻하신 아름답고 선한 일들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진행해 나갈 것이며 때가 되면 반드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실적 여건이나 수단도 그분의 이름보다 앞설 수 없음을 믿기에 모든 염려와 궁핍과 환난을 그분의 능하신 손 아래에 둡니다. 때가 되면 높인다는 것은 때가 되기 전까지는 재물과 권세도 전혀 없거나 많이 모자란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럼 또 당연히 재물과 권세가 가지는 영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하신 손만이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가장 현실적 인간적 지혜에 근접할 것 같은 잠언에도 영적으로 심오하고 심지어 십자가 복음이 숨겨져 있다니 말입니다. 또 언뜻 보기에는 도덕적, 종교적으로 별반 하자가 없는 것 같고 심지어 영적으로 심오한 것 같은 기독교 일각의 가르침에도 인간 마음의 교만이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성경적으로 올바른 청부사상은 바로 궁핍하든 부요하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당신께서 이루시기에 신자는 어떤 형편이든 그 일에 쓰임 받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신자 각자를 빛과 소금으로 바꾸어서 그가 속한 곳에서 한 알의 밀알로 썩게 만들어 다른 이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눠주게 만들 것입니다. 또 그 때에 비로소 세상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을 비롯한 초대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그럼 또 당연히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행2:47) 것입니다.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만이 갖고 계십니다. 또 그 힘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만 당신의 이름에 합당하게 행사하십니다. 단 마음의 교만이 없이 다른 어떤 것으로는 견고한 성벽으로 삼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는 겸손한 신자를 도구로 사용해서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5-7)

8/15/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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