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자녀들이 왜 죄 없이 죽어야 하는가요?

 

[질문]

 

욥기를 읽으면서 욥기를 통해 하나님과 욥의 관계에 대해 초점을 많이 둡니다. 그럼 욥의 자녀들은 뭔가? 무슨 죽을죄를 지어서 졸지에 죽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아버지의 연단 때문에 자녀들은 희생양이 되어도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하는가? 만약에 내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기에는 솔직히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시작, 과정, 결과를 함께 보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어쩌면 시작이나 과정에 처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 힘이 듭니다. 자녀들이 육적 죽음은 아니지만 영적 죽음(?)의 상황에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부모 중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믿지 않는 부모들보다 뭐가 그렇게 잘못 살았다고 자녀들이 이러한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간혹 좌절감이 들기도 합니다.

 

[답변]

 

욥기가 말하는 진짜 주제

 

욥기는 욥과 하나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책이기에 언뜻 보면 자녀들의 죽음은 저자는 물론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생명이 너무나 가볍게 다뤄지고 심지어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 욥의 믿음을 연단시키는 데에 희생양만 되었습니다. 정말로 많은 신자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기에는 솔직히 힘든 일들이 많은데” 하나님은 눈도 깜작하지 않으니 그럴 때마다 믿음의 좌절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죽음을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바로 그것이 욥기의 주제입니다. 도무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아예 이해도 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움에 반기를 들어도 될 만한 큰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감당해야 하는지, 최소한 그 이유라도 알고자 아버지로서 또 신자로서 몸부림친 내용입니다.

 

그래서 욥이 얻은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신앙을 성숙시키려고 연단시킨 것”이 답입니까? 물론 옳은 답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니까 제기하신 의문 내지 불만은 해소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욥의 입장에서 따져보면 아이들이 희생되어서 내 믿음이 자랐고 그래서 이런 큰 고난을 주었다고 과연 감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최소한 하나님께 불만이 과연 하나도 없었을까요? 부모 된 입장에서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없습니다. 욥의 신앙성숙을 위한 희생이라고 말하기에는 인생살이가 또 그것을 헤쳐 나가야 할 신앙의 본질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욥기의 주제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정확히 따져봐야 합니다. 어떤 책이든지 시작과 결론에 주목해야 합니다. 서두에서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제기한 후에 마무리 부분에선 그 주제에 대해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진술합니다. 서두(1,2장)와 결말부분(38:1-42:6)을 다시 잘 비교해봅시다. 맨 뒷부분(42:7-17)은 결론에 해당되긴 하지만 하나님이 욥의 형편을 원상회복해주었다는 사실만 첨가한 것입니다.

 

영계의 천상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욥의 믿음의 순수성을 걸고 내기 한 결과로 아무 죄도 없고 연관도 없는 자녀들마저 일시에 다 죽는 말도 안 되는 고난이 닥쳤다는 설명으로 욥기는 시작됩니다. 욥은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하므로 그 시험을 간단히 통과하고 사탄은 하나님께 두 번의 내기에서 무참하게 패배합니다.

 

솔직히 우리와 비교해 보면 이런 믿음은 세상에 없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믿음의 의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 이상 믿음이 자랄 필요도 없습니다. 욥의 믿음의 순수성을 입증하거나 자라게 하는 것이 주제라면 욥기는 1-2장에서 그쳐도 충분합니다. 구태여 지루할 정도의 친구들과의 추가 토의는 필요 없습니다.

 

고난의 실제 당사자인 욥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은 분명히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론 부문은 이미 언급한 대로 그 이유라도 알고자 하는 욥의 영적인 고뇌와 갈등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상의 영계에서, 그것도 하나님과 사탄이 내기해서 생긴 일의 원인을 인간이 과연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답은 당연히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주제는 무엇입니까? 인생에는 욥같이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에게 죄나 욕심 같은 귀책사유가 전혀 없는데도 너무나 큰 고난이 얼마든지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진 누구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처음부터 천상에서 다 이뤄졌기에 이 땅의 물질계에 제한을 받는 피조물인 욥으로선 티끌만치 감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의 진행과 결과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습니다. 원천적으로 고난의 원인을 알려는 노력 자체가 헛수고입니다. 따라서 “그 원인을 평생 가도 모르는 고난이 있을 수 있고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말라”는 것이 욥기의 진짜 주제입니다.

 

실제로 책의 결론도 그렇게 마무리합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 욥은 정확하게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헤아리고자 했다고 실토했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에 평생 원인조차 모르는 고난이 겹치게 마련이라는 것이 욥기의 주제입니다.

 

정금 같이 나온 결과

 

그럼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욥기를 배울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가르침은 하나님이 그를 연단하여 믿음을 성숙시키려는 것이 그 고난의 뜻이자 원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것이 믿음이 성숙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욥이 완전한 무지에 빠져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거나 자포자기(自暴自棄)한 것 아닙니까? 진리를 알면 자유롭게 된다(요8:32)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면 믿음이 도리어 퇴보된 것 아닙니까?

 

성경은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확하게 잘 읽으셔야 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욥이 자기가 당한 고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평소 믿음대로 행한 고백인데도 욥기의 주제를 정확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욥은 분명히 자기가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그 길의 끝은 물론 시작과 과정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가 확신하는 것은 어쨌든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정금 같은 믿음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의 결론도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알려고도 해선 안 된다는 것”이 정금 같이 변한 믿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사실은 목회자들이 부족하게 혹은 일부는 틀리게 가르친 결과이지만, 믿음의 성숙을 인간 쪽에서 의지적으로 노력하여서 자신 안의 도덕성 종교성 영성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진술이 틀린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분명히 그런 모습을 보이지만 지금 욥기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정금 같은 믿음은 역설적으로 자기 안에 스스로의 앎 지혜 선 인내 긍휼 사랑 믿음 등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대신에 자신은 너무나 부족하고 부족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갈수록 절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컨대 신앙의 여정은 내 속에 실력을 쌓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속의 것들을 거꾸로 버리고 부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인생 말년에 가서야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외아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아무 이유도 따지지 않고, 버리는 완숙한 믿음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모세도 인생의 모든 쓴 맛을 겪은 후에야, 그것도 하나님이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시다가 80 노인이 되어서야 당신의 종으로 들어 쓰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순간적인 분을 참지 못해 필생의 꿈이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초기에는 비록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니었지만 사도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변증하다가 말기에는 죄인 중의 괴수요 사도 중에 가장 미약하다고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죄의 본성과 욕심에 자주 넘어지는 자신의 가난한 영적 상태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도 날이 갈수록 왜 이리 믿음이 약한지 한탄만 늘어납니다. 교회생활 오래 하면 많이 거룩해지고 인내심도 견고해지고 긍휼이 풍부해지리라 기대하지만 오히려 실망만 늘어납니다. 현실의 삶도 온갖 고난만 생기는데다 아무리 기도해도 호전은커녕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 경우도 종종 겪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이 나를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시라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면 비로소 기도가 응답이 되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는 체험을 종종 합니다. 설령 끝까지 고난이 해결되지 않아도 다 내려놓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평강을 최소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내 자신의 실력을 없애나가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만 채워나갈 때만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참된 성장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예수님의 말씀도 자세히 보면 진리가 신자를 자유케 한다고 합니다. 신자가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도록 노력은 해야 하나 일단 진리를 알면 그 진리로 인해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한 진리는 당연히 당신의 십자가 대속죽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죄인을 구원하는 경륜입니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제대로 알고 받아 누리며 자기 삶에 채워나가면 자유로워집니다. 우선 영원한 죄의 형벌, 사탄에게 그 영혼이 노예로 묶임, 믿은 후의 삶에서 끈질기게 괴롭히는 죄의 파워, 나아가 인간이 만든 종교적 수고와 짐 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욥이 내린 결론을 잘 따져보면 그도 주님이 말씀하신 자유로워지는 원리를 터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다”는 진리를 겨우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믿음이 그렇게 좋은 욥이 마지막에서야 알았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이 무소불능 즉, 전능하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단계인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다”는 것도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치웁니다. 예컨대 고난을 겪게 되면 내가 죄 지은 것도 없고 믿음 생활도 열심히 했고 기도도 간절히 하고 있는데 당신의 자녀를 무소불능하신 분이 왜 빨리 구해주지 않는지 의심과 불만부터 생깁니다. 지금껏 하나님의 전능성을 붙들고 매달리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다”고 말한 욥의 뜻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그분이 뜻을 정하면 못할 것이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그분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신자가 기대 소망 기도하는대로 일을 진행시켜주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분이 하고자 하면 어떤 선한 일도 하지 않거나, 세상을 타락에 버려두는 것도 얼마든지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무소불능이란 전능하신 그분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오직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만 그분이 함께 하는 줄 착각합니다. 그와 동시에 고난도 그분의 허락 인도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욥의 아이들을 졸지에 다 죽이신 것도 그분이 경영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당신의 욕심과 기분대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일절 악한 것은 개입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추하고 더러운 것과는 절대로 단 일초도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조건 그 전부가 다 선합니다. 인간이 그 전부를 속속들이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욥은 추가로 알게 된 진리를 고백합니다.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스스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일을 알아보려고 하나님께 따지고 들었던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고 당신만 선하실 뿐 아니라 행하신 모든 일들도, 비록 자기 자식들이 다 죽고 자기는 불치병에 걸리는 고난이라도 절대로 선하다는 것입니다. 욥은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스스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고 대신에 그분은 항상 선하시다는 진리를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길고도 긴 영적 갈등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4-18) 다메섹 도상에서 사흘간 죽음과 방불한 장님이 된 상태에서 오직 주님의 은혜로 다시 빛을 보는 체험을 한 바울도 욥과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이런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게 된 경위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그 이치를 아는지 백 개가량의 질문을 던졌으나 욥은 단 한 개의 질문에 한마디도 대답을 못했습니다.(38-41장) 눈에 빤히 보이는 물질계의 이치도 모르면서 영계에서 사탄을 종으로 삼아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아무리 욥이라도 도무지 알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평생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누차 강조하지만 욥기의 주제는 인생에는 평생을 두고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으며 그 안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그런 고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끌거나 명하신 일이라면 목숨 바쳐서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불시에 그것도 자연 재앙으로 데려갔지만 아브라함더러는 직접 외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백세 때에, 욥이 아들들을 잃었을 때보다 훨씬 더 늙은 후에 기적적으로 주신 약속의 아들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것도 직접 죽여서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명합니다. 물론 이삭도 욥의 아들들처럼 아브라함의 이 믿음의 시험에 아무 연관도 없고 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아무 의심과 불평 없이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러 하더니”(창22:10) 아브라함이 종교적 의무감으로 짐짓 순종하는 흉내를 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죽이려 칼을 완전히 치켜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순전한 믿음을 보신 후에야 미리 예비해 놓은 어린 양을 고개를 돌려 발견토록 해주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후손인 우리도 이와 같은 종류의 시험을 의심과 불만 없이 통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래서 제자더러 제일 먼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길 기도하라고 가르친(마6:10) 것입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을 욥의 경우에 대입시켜 봅시다. 욥의 아들들을 다 죽이기로 하늘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럼 욥더러 자기 아들이 다 죽도록 기도하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욥은 그런 엄청난 계획을 전혀 몰랐고 하나님이 그렇게 시킬 리도 없지만 엄밀히 적용하면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믿음에 대해 절대로 피상적으로 이해하여서 적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무소불능한 능력만 붙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그 이유를 아예 알지도 못하는 엄청난 고난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 고난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순교를 당할 여건으로 이끌면, 그런 자야말로 아무 잘못과 죄가 없고 그 반대인데도, 당연히 순종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끝까지 억울한(?) 욥

 

욥기의 결론도 자세히 보면 욥 본인은 왜 자기 아들들이 죽었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끝까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알려고 했던 것이 자기 잘못이자 신자가 행할 바를 넘어선 것이라는 진리만 단순히 깨달았을 뿐입니다. 이는 참으로 어렵고도 심각한 결론입니다. 그럼 신자의 평생 동안의 영적인 여정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신자만 너무 억울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지만 천국에서 주님을 다시 만날 때에나,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완성 시킬 때는 이 땅에서 몰랐거나 희미하게 알았던 것들을 온전히 다 알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5-18)

 

이 땅에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의 원인과 과정과 배후에 작용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천국에서 주님과 얼굴을 맞대면 하면 수건이 벗기고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명확히 알 수 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특별히 주께서 우리를 아는 것 같이 나도 그분과 그분의 사역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의 모든 일들을 당신의 전지성에 의거하여 주관하십니다. 인류의 역사를 태초의 창조에서 종말의 완성까지 당신만의 선하신 계획에 따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신자 각 개인의 존재와 삶과 일생은 그분의 그런 완벽한 주권 안에서 아주 짧은 특정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그 찰나 밖에 안 되는 신자의 일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신자 본인은 물론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당신의 영광을 이뤄나가는 과정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찰나를 사는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절대로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정한 일은 하늘에 올라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이 땅에선 자기와 자기 주변의 가시적 현상만 알뿐 태초부터 영원까지 완벽한 계획으로 자기를 주관하신 내용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그분의 전지성으로 세워진 바로 그 계획과 그 실현과정과 그로 인한 영광스런 결실까지 다 알고 맛보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욥의 자녀들이 일시에 죽은 것도 하나님의 그런 영광스런 인도하심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욥은 이 땅에선 감히 알려고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고백하며 말문을 닫았습니다. 이만해도 상당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면 그분의 놀라운 계획과 영광 앞에 진짜로 유구무언이 되어서 오직 그분께 세세토록 영광과 찬양과 경배만 돌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신자에게 이유도 모르는 환난 재앙 사고 등이 빈발합니다. 그 모든 불행마저도 하늘에서 정해져 땅에서 이뤄진 결과인데 그 의미는 하늘에 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더욱 천국에 대한 소망을 키워야 합니다. 그곳에는 단순히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이 역사하는 곳으로 어떤 모순 불의 거짓 왜곡 모략 미혹 의심 등이라곤 없습니다. 신자가 그야말로 진리 안에서 넘치는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리는 곳입니다. 신자가 가진 믿음의 특권이며 궁극적으로 욥이 이 땅에서 완성치 못한 믿음이 정금 같이 나오는 곳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땅에선 하나님의 전지성에 대한 믿음이 부재 내지 결핍하고 대신에 전능성만 붙드는 바람에 고난을 견디기 너무 힘듭니다. 그러나 고난과 죄악이 아예 존재도 않는 천국에선 하나님의 전능성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반면에 천국 신자에겐 전지성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생성되고 그분의 완벽한 진리 안에도 함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담대히 원한다”(고후5:8)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자의 특권입니다. 이 땅에서 고난의 이유를 미처 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알 수 없기에 자유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마저 하나님의 배려인 셈입니다. 나아가 천국에선 어차피 그 모든 것을 알고 오히려 더 감사하게 될 것이니까 말입니다.

 

아버지 때문에 희생한(?) 아들들

 

질문자께서 “아버지의 연단 때문에 자녀들은 희생양이 되어도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 의문도 정답 중의 하나입니다. 욥의 연단을 위해 아들들이 희생을 당한 것도 일부 진리이며 사실입니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꿰뚫어서 아시는 분의 뜻과 계획에 따라 죽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우상 신들처럼 자기감정대로 행하는 분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결코 불완전 부족 잘못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식들이 일시에 잘못 없이 죽었으니까 욥기를 읽는 신자로선 자연히 감정적으로 아주 힘들어지고 그분에 대해 완전히 이해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적 관점을 좀 더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 과정을 잘 반추해보십시오. 처음부터 믿음의 가정에 태어난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설령 믿음의 가정이라고 해도 반드시 최초로 믿은 사람은 있습니다.

 

그럼 그들이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많은 불신자 선조들은 물론 바로 자기 부모가 지옥 심판을 받은 희생의 결과입니다. 이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실제로도 한 명의 죄인이 구원을 받음에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알게 모르게 기도하고 섬긴 결실입니다. 또 하나님 그분이 신자의 문 밖에서 계속 두드리고 또 두드린 결과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독생자 구세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한 생명과 맞바꾸어준 도무지 감당은 물론 형용할 수도 없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욥의 자녀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한다면 바로 우리 부모나 선조의 희생에도 동일한 아니 더 큰 아픔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죽음 앞에 평생을 눈물 흘리며 애통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판국에 과연 욥의 자녀들만 너무 억울한 것 아닌가, 물론 그 심정과 생각은 이해가 되지만, 따지는 것이 신자로써 올바른 자세일지 자기 자신의 믿음부터 욥, 아브라함, 바울 등과 비교해서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자 뿌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절대로 놓치거나 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인간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맞대면 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어떤 것을 동원해도, 아무리 경건하고 심오하고 의로운 도덕 철학 종교 선행이라도 그분의 의에 결코 도달시키지 못합니다. 예수 십자가 이전의 모든 이들은 오직 절망과 죽음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를 아무 때나 그분의 (영원하고 완벽한) 뜻에 따라 죽여도 인간은 그분 앞에 단 한마디 항변은커녕 불만과 의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믿음의 핵심입니다. 신자는 그 반대되는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또 “왜 내 같은 자에게 구원을 베풀었는지”(Why me?) 아무도 모릅니다. 이 땅에선 욥의 아들이 죽은 이유를 모르듯이 신자가 구원 받은 이유도 도무지 알 수 없고 천국에 가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런 교리를 알고 동의한다고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절대적 택하심에는 신자와의 일대일 인격적 만남을 통해 성령의 거듭남이 반드시 따릅니다. 정말로 예수를 자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일생일대의 뒤집어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 그분과 신자 자신은 압니다. 그래서 왜 나를 구원해주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이전과 같이 살지 않을 것이며 그분을 따르겠다는 결단 헌신 순종이 이어집니다. 비록 때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그것도 그분의 도우심에 따라 계속 한 걸음 한 걸음 외롭고 지치며 세상의 온갖 멸시 천대를 받으며 천국으로 향하며 걸어갑니다.

 

물론 참 신자라면 이 땅에서도 언젠가는 아브라함이 도달한 모리아산의 정상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고난을 많이 겪어서 인생의 헛됨을 절감하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하나님 하시는 일은 다 옳습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오직 음란 궤휼 살인 도둑 간음 거짓뿐임을 날이 갈수록 절감하였고 주님의 긍휼 없이는 도무지 한 시도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시작과 끝이요 알파요 오메가라는 고백이 저절로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자신이 왜 구원 받았는지, 왜 지금도 주님이 나를 붙들고 은혜를 계속 베푸는 지도 모르기에 다른 사람의 일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진토 같은 인간인지라 가까운 사람들, 특별히 자식의 희생에는 가슴이 너무나 아픕니다. 그럼에도 그분께 불의함이 한 치도 없으시며 이 땅에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원하신 은혜를 하늘에 가면 알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희생당한 자들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임을“(사57:1) 깨닫고서 말입니다.

 

요컨대 신앙생활이란 매일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부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여정입니다. 자신을 깨트려 나가며 오직 주님과 그분과 함께 거할 천국을 소망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에 제대로 반응하며 살아가기에도 너무나 부족하고 많은 잘못을 범하는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신자의 인생에도 평생 이유를 알지 못하는 큰 고난이 수시로 닥칩니다. 따라서 신자로서 아니 신자이니까 행할 수 있는 바는 주님이 나에게 현재 베풀어주는 은혜와 긍휼을, 이마저도 그 이유를 평생 알 수 없지만, 감사히 여기며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분의 자녀답게 마땅히 살아가야 할 모습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3/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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