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고난을 방치하시는가? (1)
[질문] 고난에 대한 허락과 방치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고난을 형성하거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니고 세상에 있도록 허용만 하셨기에 대부분의 고난은 인간의 죄악과 잘못 때문임을 압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무고한 생명이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일을 방치하는 것 같은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답변의 전제]
환난의 원인을 인간 존재의 특성에서 찾으라.
인생사에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기아로 죽는 것처럼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하며 무엇보다 불의해 보이는 고난들이 아주 많습니다. 신자들은 세상만사를 하나님이 일일이 주관한다는 전제 하에 세상의 모순과 불공정과 불행을 그분의 공의와 사랑에만 견주어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 항상 그분 쪽에서의 원인과 해결책을 모색하게 됩니다.
거기다 하나님에겐 선만 있고 어떤 악함도 없다는 진리를 알기에 모든 고난들이 그 선하심에 상충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으니 점점 미궁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세상 환난을 허락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방치하는 것 같은 의문과 불평이 생깁니다.
세상 환난의 원인과 해답은 하나님보다 인간 쪽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이 인간의 탓이니까 그 책임도 인간이 다 져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이란 존재가 갖는 특성 때문에, 특별히 자유의지 때문에 필연적으로 환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부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범사를 자기 재량껏 행하도록 이미 다 허락해 두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런 환난들을 막아주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일일이 개입해야 합니다. 그럼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용지물이 되므로 그것을 다시 회수하는 꼴이 됩니다. 바꿔 말해 세상 환난을 하나님이 다 막아주려면 인간의 속성부터 먼저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만약 고난만 막아주면 안 되느냐고 따지는 것은 자기가 해야 할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대학입시에는 합격시켜 달라고 무책임하게 떼쓰는 꼴입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인간이 잘못을 저지를 수 없게 완전하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고 하나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야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생명을 지니고서 물질계의 시공간에 제한된 아주 연약한 육신적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동물과 같되 그보다 훨씬 고급한 지정의를 부여 받았습니다. 그 지정의로 창의적인 일들을 할 수 있고 윤리적으로 선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따를지 말지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해 실행할 수 있는 특성은 인간만이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을 만드시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 땅에서 당신의 뜻에 합당하고도 거룩하게 살아감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을 여건과 자원들을 미리 다 마련하신 후에 인간도 그럴 수 있는 이성과 도덕성과 영성을 갖추도록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유의지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당신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하셨기에 더욱 기뻐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아름답고도 거룩하게 다스리게 했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만 주셨으나 인간만은 당신의 형상대로 닮게 해서 이 땅을 정복하여 세상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창1:28)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너무나 고귀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최초 인간은 그 이성과 자유의지를 잘 사용하여서 하나님과 항상 교통하면서 그분의 뜻에 맞게 에덴을 잘 다스렸기에 환난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아셔야 할 사항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이 죄로 타락하기 전이라도 인간의 이성은 제한적이었지 완전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에 순종할 때만 그 이성도 온전하게 작동되어서 불합리 불공정 불의 모순 고난을 산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 대적하며 자기를 높이는 죄로 타락하면 그 이성은 당연히 온전히 작동 못합니다.
둘째로 죄로 타락하여 인간의 본성이 바뀐 것은 하나님을 기꺼이 따르려는 의지만 파괴된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삶과 인생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창조 시에 부여한 당신을 닮게 지어진 형상의 본질 중에 이성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감정과 지성과 의지는 여전히 고급하여서 창의적인 자질과 도덕적인 요소들은 살아있습니다. 비록 불완전하고 왜곡된 면은 있어도 여전히 인간은 믿음 없이도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그 사회를 해치는 악들을 막는 등 기본적으로 선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된지라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형상의 잔재(여전히 고급하고 나름 의로운 이성과 의지)를 자신의 형통과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높이려니까 당연히 세상은 무제한적인 시기 질투 경쟁의 싸움터가 되었고 그로 파생되는 결과도 불의 불공정 불법 환난입니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 자만이 범사에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청지기의 직분을 순전하게 충성하려고 의지를 사용할 때만 이기적 탐욕으로 범하게 되는 잘못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에게도 죄의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종종 시험과 유혹에 넘어갈 뿐 아니라 기도하면서 그분께 순종해도 완전하지 않고 어리석은 이성 때문에 가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환난에 대한 접근법을 바꾸어라.
신자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그래서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엄청난 비극적인 고난까지 포함하여, 생겨도 하나님 앞에 원망 불평하기에 앞서 진심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대신하는 고귀한 청지기 직분을 받은 것에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시8:4-6)
그리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제한된 육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제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부터 겸허하게 수긍해야 합니다. 나아가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이 어리석은 인간의 이성과 온전치 못한 믿음에 따랐기에 실수 실패로 인해 고난 같은 부정적 결과가 종종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하나님이 인간 이성과 의지를 신의 수준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주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도덕성과 영성은 없고 자신이 제한된 피조물인지 자각조차 못하는 짐승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인간은 오직 인간일 뿐입니다. 두 발은 짐승처럼 땅을 딛고서야 하고 두 팔은 하늘로 향하여 뻗어야 하는 아주 특이한 존재입니다. 두 손을 하늘로 뻗을 때는 성공이며 그러지 않을 때는 실패입니다.
따라서 인간 세상에 고난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바로 이 점을 온전히 이해하고 시인하는 것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 땅에선 끝까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이성과 의지는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어주고 주님처럼 신령한 존재로 변하게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그 전까지는 인간이 현재 갖고 있는 본성과 처한 상황 때문에 고난은 반드시 생기게 마련입니다.
신자는 고난에 대해 성경적으로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고난의 원인이 인간 쪽에 있으니까 인간이 몽땅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린아이가 굶어죽는 것 같은 끔찍한 고난을 허락했기에 그분에게 원인이나 책임을 돌리는 것도 아닙니다.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인지라 모든 고난을 미리 다 막아주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고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우선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인간이라는 바로 그 특성 때문에 고난은 반드시 수없이 지속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인정에는 하나님이 어린 생명이 위급하다고 막아주지 않는 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서도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 못해서(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한 차원 낮은 짐승이나 아예 당신과 동격인 신으로 만들어야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새 시대가 왔다고 말하듯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온갖 종류(세기와 충격이 경미한 것에서 아주 심한 것까지)의 고난과 죽어서 천국을 가거나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평생토록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고난을 방지할 수단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자신의 이성과 의지를 최대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율하여서 겸손히 의롭게 살아가는 것 하나입니다.
신자의 경우 불신자 때와 비교하면 고난의 현실적 상황과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과 마지막 결과는 대동소이합니다. 고난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대처하는 방안만 이전에는 혼자서 해결하려다 성경의 진리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는 모습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신 질문에 답변해보겠습니다.
질문 1.
방치와 허용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아프리카에서 많은 아이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방치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비유하자면 아이가 뜨거운 물을 몸에 엎질렀을 때 부모라면 “네가 놀다가 네 실수로 다친 거니 네가 아파도 할 수 없어”라는 식으로는 반응하진 않을 것입니다. 분명 아이의 무지와 잘못으로 발생한 사건이지만 긴급한 순간이라면 도움을 주지 않을까요? 모든 고난을 다 없애주지는 못해도 인간의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지경까지 허용하시는 건 왜일까요? 하나님께 사랑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신데 말이죠. 믿음이 굳건하지 않아서인지 인간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들을 보면 하나님이 가혹하고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답변 1.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땅을 당신을 대신해서 다스리도록 청지기의 소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개인과 공동체는 그 소명에 충실해야만 자연적 인위적 재난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문화명령의 뜻이며 또 그래서 인간에겐 문명을 선하게 발전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자연을 정복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그럴 수 있는 환경과 자원과 재능만 주셨지 처음부터 고난이나 재앙이 생기지 않는 완전무결한 유토피아 같은 환경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이미 받은 이성과 의지로 최선을 다해서 거룩하게 정복하여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는 것이 인간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유익과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아담의 경우도 에덴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관리했을 때에만 고난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서 아이들이 굶주려 죽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그 문화명령에 충성하지 않는 탓입니다. 거의 모두가 참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자신의 욕심대로 살고 있습니다. 위정자들은 부정부패로 타락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빠서 국민들의 복리향상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타락하여 당면하고 있는 비참한 상태를 설명한 로마서 1:18-32 대로 된 것입니다. 인간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지경까지 하나님이 허용하거나 방치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반면에 국민교육수준이 높고 정부가 복지정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나라는 믿음과 상관없이 그런 초보적인 비참한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앞에서 설명 드린 대로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죄로 타락한 이후에도 본질적으로 선한 자질과 요소는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무관하게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하나님과 연결해서 따질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 고난은 인간 세상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일상사일 뿐입니다. 신자라도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으면 언제든 일어나는 사고입니다. 심지어 기도를 열심히 해도 불완전한 이성과 부주의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뜨거운 물을 몸에 엎질렀을 때 부모라면 즉, 하나님이라면 “네가 놀다가 네 실수로 다친 거니 네가 아파도 할 수 없어”라는 식으로는 반응하진 않을 것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일단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부모의 반응을 말하는데 하나님도 사고가 일어난 후라면 당연히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먼저 아이가 실수로 엎지른 것은 아이의 행동반경 안에 뜨거운 물을 놓아두고 평소에 사방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라고 교육시키지 못한 부모의 잘못이 더 큽니다. 믿음 없이도 잘 교육시키고 아이가 다칠 환경을 만들지 않는 부모들이 더 많습니다. 말하자면 아이가 굶어죽는 것 같은 비참한 사고도 이 땅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청지기 명령에 인간들이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그 비극이 발생할 여건과 상황을 인간이 조성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그 일을 허락하거나 방치한 것은 아니라 연약한 본성이라 부주의했던 것뿐입니다. 허락이나 방치를 문제 삼는 것은 미리 그렇게 의도했을 때입니다. 그런 상황이 일어날 줄 알고도 아무 손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 고난도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로 결코 바꾸실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르기에 그분의 방치나 허락이라고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세상과 인생=고난의 바다”라는 등식은 마지막 날까지 절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하여서 물을 엎질러도 그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주시고(요일1:9), 그 전에 지혜를 구하면 넘치도록 주십니다(약1:5). 무엇보다 신자도 현실적 실력을 쌓아서 인생사를 자기 이성과 의지를 최고로 동원하여 고난을 미리 막아가며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정말로 순전하게 주님만 의지하면 주님이 큰 능력을 발휘해서 고난을 미리 막아주기도 하고 심지어 신자가 잘못했어도 합력해서 선한 결과로 바꿔주십니다(롬8:28). 잘못을 범한 신자를 하나님은 절대로 네 잘못이니 네가 알아서 다 책임지라고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신자입니다.(살전5:16-18).
나아가 하나님은 신자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고난을 일부러 허락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큰 고난을 겪은 욥의 믿음이 결국에는 정금 같이 자랐고, 또 아브라함에게 기근을 두 번이나 겪게 해서 아내를 팔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결과는 더 선하게 되고 그의 믿음이 성숙해진 것처럼 말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린아이가 기아로 죽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탐욕 때문이지만 신자더러 더더욱 이웃 사랑과 구제에 힘쓰라는 뜻입니다. 불신자에게는 그런 죄가 갖는 파괴적 본질 자체로 심판을 주신 것이며 나아가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당신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질문 2.
고난의 상황은 대부분 인간의 잘못인데 고난의 회복은 주님의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고난의 상황을 만든 것처럼 고난의 회복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로 해결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왜 고난의 원인은 인간이고 회복은 (인간의 노력과 자유의지 보다는) 주님의 은총이라고 하는 걸까요?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존재인가요? 고난이 발생된 첫째 원인은 인간의 의지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해주셨기에 가능했다면 하나님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 이 때는 오직 인간만의 전적책임인 것처럼 말하는지요? 불손한 생각임을 알지만 역으로 따지자면 그렇지 않나 싶어서입니다.
답변 2.
고난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기에 그 회복도 당연히 인간의 자유의지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알기 쉽게 비유해보겠습니다.
신자가 중병에 걸리는 것은 평소에 불규칙적인 생활과 음식섭취의 불균형과 운동부족 등으로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스트레스를 영적으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본인의 잘못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위반한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믿음과 무관하게 누구나 아는 건강 상식을 지키지 않은 것이며 자신이 무절제할 때부터 이러다 큰 병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일입니다. 귀찮고 게을러서 그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다 다시 정신 차리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음식조절을 하며 기도와 말씀으로 스트레스도 해결하고 의사의 치료를 받아서 그 병을 낫게 되면 당연히 본인의 이성과 의지에 의한 회복입니다.
그럼 또 적절한 치료로 완치하게 인도해준 의사에게 당연히 감사하게 됩니다. 나아가 신자 스스로 꾸준히 운동하고 식이요법을 할 수 있는 의지와 여건을 마련해 주고 또 훌륭한 의사를 만나서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은총으로 나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동에서 한 교회가 단기 선교여행을 갔다가 테러리스트에 납치 되었다가 한국 정부의 노력으로 풀려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이슬람 지역에선 언제든 그런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갔습니다. 자칫 순교도 될 수 있다는 각오로 출발했으며 선교 여행 내내 교인들이 안전하게 선교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기 전에 염려했던 바로 그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국 선교사들이 풀려난 것은 일차적으로 한국 정부의 노력과 대가를 지불한 때문이고 믿음과 관계없는 인간의 의지로 행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테러리스트들이 혹시라도 생각을 바꾸지 말도록 또 석방협상이 순탄하게 이뤄져서 전원이 무사히 풀려나오길 교회는 정말로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태가 해결된 뒤에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감사하며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한국정부에 감사를 하지 않은 것도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질병이나 선교 중의 납치 같은 문제가 발생하기 까지는 하나님의 허락이나 방치와는 무관하며 신자들의 믿음과도 무관한 일입니다. 로마 시대의 극심한 박해도 하나님의 허락과 방치와 전혀 무관하며 포악한 세속의 황제들로 인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지 않습니까? 당시 신자들도 이미 그런 줄 알고 각오했습니다. 황제숭배에 도무지 동조할 수 없으니 순교도 담대히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그 결과를 두고 궁극적인 맥락에서 인류의 구속사를 진행시켜나가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과 섭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1/1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