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3:11-14)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2020년 송구영신 설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올해의 사건과 인물

 

매년 연말이면 미국의 Times 잡지 같은 매체에서 그 해의 십대 뉴스나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분들을 선정해 발표합니다. 그러나 올해는 이런 일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년 초부터 지금까지 모든 나라의 모든 뉴스 시간을 장악한 것은 코로나 사태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 주역도 사람이 아니라 코비나 19라는 현미경으로나 겨우 볼 수 있는 바이러스였습니다. 다들 집안에 격리되어 사회적 거리두기만 했으므로 구태여 다른 사건이나 인물을 뽑아서 그 리스트를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역병은 항상 있어 왔으나 지역적인 재앙으로 그쳤습니다. 이번에는 교통 운송 수단이 발달되어 세계가 일일 생활권이 되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땅 끝까지 바이러스가 번졌습니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여태껏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백신들이 신속하게 개발되었으나 이번 주에 영국에서 전염성이 거의 배가 되는 변종이 발견되어 나라 전체가 폐쇄되었습니다. 전염병은 집단면역이 생겨야만 끝나는데 코로나는 인구 90%가 접종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백신이 이 변종에도 유효할지 아직 판명되지 않고 있고 여전히 백신을 불신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한줄기 빛이 비취는듯했으나 앞으로의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죽음이 모든 이에게 눈앞의 현실로 실감나게 다가오자 어찌할 바 몰라 우울증을 겪고 있고 심지어 아무에게나 분노와 증오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최선의 대비책은 각자가 마스크를 쓰고 최대한 사람 모이는 곳에 가지 않는 것뿐입니다. 마치 핵전쟁이나 생태계 파괴로 닥칠 지구 종말 때에 방독면을 쓰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잿빛 어두운 기운이 지구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습니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아도 인류 종말이 이런 모습으로 시작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연말을 맞는 올해의 감상도 지금까지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년 같으면 그 해의 잘못과 실수는 반성하고 좋았던 일들은 주변 사람과 하나님께 감사하며 희망찬 새해계획과 각오를 세우며 보냅니다. 올해는 언제 이 사태가 끝날지 모르니 그적 막막한데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마저 생겼습니다. 신자들마저 어떻게 올해를 정리하고 어떻게 새해를 맞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지 몰라 당혹해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11,12절이 그에 대한 해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구원의 때가 처음보다 가까워지고 밤은 지나고 낯이 다가오니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합니다. 언뜻 아주 희망적인 메시지 같으나 당시 사정에 비추어 더 깊은 뜻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의 때가 가까웠다.

 

먼저 11절에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이 세 번 등장하는데 각기 뜻이 조금 다릅니다. 첫째 이 시기를 너희가 안다고 했는데 헬라 원어로는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이라는 뜻으로 본문처럼 시기 또는 시대라고 번역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어떤 일을 성취하는 시기를 알고 있다고 했기에 한 개인이 예수 믿어서 구원 얻거나 고난에서 구출되는 때가 아닙니다.

 

둘째로 “자다가 깰 때”의 때는 특정한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호라’인데 개인이 자다가 일어날 시간을 뜻합니다. 셋째는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다고 했는데 시간을 뜻하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아니고 문장전체로 따져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때는 장차 달성될 공동체적인 구원 즉,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뜻이며 신자 각자가 깨어서 그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AD 57.년경에 기록했을 당시에는 예수님이 곧바로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 중에 죽기 전에 당신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하신 말씀(마16:28)을 재림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엿새 후 변화산으로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내려 세 제자에게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마17:1-13) 더 중요하게는 십자가에 달려죽지만 부활 승천해 당신의 왕권을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후서를 저작한 66년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세대들도 거의 죽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재림이 자기들 생전에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천지는 창조 때부터 그대로 있기에 주의 강림할 약속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났습니다.(벧후3:3,4)

 

재림의 때는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했기에 그 시점은 아무로 모르며 함부로 추측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의 뜻도 주님의 재림이 코앞에 이르렀다고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기를 알거니와”(11절)도 사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때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반드시 때가 되면 재림하신다는 것을 절대적 진리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다”는 것도 예수를 믿은 이후 매일을 살아가면 재림의 때도 그 매일 만큼 가까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의 일생은 재림을 향해 걸어가기에 구원 때가 가깝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자가 반드시 준행해야할 첫째 명령

 

신자라면 가장 먼저 자기 일생 전체가 멀리는 주님의 재림, 가깝게는 자기가 죽어서 덧입을 천국의 영화를 향한 여정이라는 것에 확신해야 합니다. 그런 종말론적 신앙관에 따라서 범사를 분별하고 판단 결정 시행해야 합니다.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고 세상을 포기하고 탈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땅의 것은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으니 오직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영적으로 신령하게 매일을 보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와 정반대로 이 땅의 삶이 아주 소중하고 귀하므로 열심히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모든 여건을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완비하신 후에 주신 첫째 명령도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창1:28)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들이 자기만 편안하고 풍요롭게 되려고 탐욕적으로 자연을 훼손시켜 왔습니다. 이제 구원 얻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그 첫째 명령을 제대로 시행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지구 온난화를 멈추게 하는 것이 신자들이 첫째로 준행할 소명인 셈입니다. 전도로 불신자들을 죄에서 구원받게 인도했다면 당연히 이 첫째 소명도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정확히 알고 진정으로 따르는 자만이 자연이 지닌 숭고한 의미와 가치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언젠가는 코로나가 종식되겠지만 죄에 찌든 인간끼리의 무한경쟁은 변함없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마침 이번 주에 지구 온난화로 시베리아의 얼음이 녹자 수백만 년 전의 털까지 붙은 늑대새끼가 발견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래 박쥐같은 동물에게서 나왔으므로 냉동되어 있던 바이러스가 살아나면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안 됩니다.

 

결국은 예수님이 재림하시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꿔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끝까지 당신의 뜻은 안중에도 없이 지구를 온전히 망쳐 놓았는데도 그대로 멸망하도록 하나님은 버려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당신만의 긍휼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이자 사랑입니까? 지금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그 벅찬 소망을 품고 살아가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림하실 때에 요한은 죄에서 구원해줄 메시아가 오실 것을 대비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럼 신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꿔 주시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하려면 마찬가지로 지구를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대로 아름답게 바꾸고 있어야 합니다. 재림이 하루 후에 혹은 만년 후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 사이에 이 땅은 코로나 같은 고난이 겹치고 또 겹칠 것입니다. 신자라면 앞장서서 지구온난화를 지연시켜야 하며 과학자, 의사, 경찰, 소방관, 교사 등이 아니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공익을 위해 봉사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에게 왜 이 땅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그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리를 세상의 빛으로서 드러내보여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동안에 범한 온갖 잘못 때문에 세상은 오히려 신자를 흉보고 가장 신뢰가 안 되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말로만 전해선 기독교라는 종교를 강요한다고 아예 귀를 닫아 버릴 것입니다.

 

코로나로 기독교에 제2의 개혁과 부흥의 기회가 왔지만 세상의 소금으로서 거룩한 삶으로 전파하지 않으면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중세시대 흑사병이 전 유럽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때에 사제들과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병상을 지킨 것처럼 사랑의 희생을 보여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체계와 세력만 회복 확장시키려 해선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순전한 십자가 복음으로 죽어 가던 영혼들이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끔 인도해야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은 신자 밖에 갖지 못합니다. 그 소망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받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구원 전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 인간이 이 땅에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 그 목적이 실패한 이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까닭과 의미, 부활 승천했으나 다시 재림해야 할 필요 등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은혜를 모르는데 어떻게 재림을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때의 거짓 선생들은 세상은 그냥 그대로 흘러가니 종말과 심판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통치는 물론 그 실존조차 부인하는 불신자들의 생각과 똑 같습니다. 앞으로도 세상에는 그런 생각이 대다수를 차지하기에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흑암이 아니라 빛이다.

 

신자가 재림을 준비하는 첫 걸음은 간단합니다. 불신세상과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진심으로 소망하는 것만으로도 재림과 가까워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지금 당장 죽어도 예수님의 품 안에서 눈을 뜰 확신이 서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의 첫째가는 진리인데 죽자마자 눈을 뜰 수 있고 십자가상의 우편 강도처럼 낙원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난 신자에겐 죽은 후 중간심사과정이 따로 없습니다. 주님의 품 안에 있었던 이 땅에서의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아담이 타락하자 너무나 두렵고 부끄러워 스스로 무화과 잎으로 옷을 지어 입고선 동산 깊숙이 숨어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숨은 장소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니까 이전처럼 내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을 예표 하는 뜻으로 짐승을 잡아서 가죽 옷을 손주 지어 입히셨습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품안으로 다시 옮겨주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서 자기 멋대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서 당신의 품 안으로 옮겨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 쪽에서 종종 뒤도 돌아보고 때로는 세상으로 다시 나가기도 하지만 아담 때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반드시 당신의 품 안으로 회복시켜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면 곧바로 그런 상태 그대로 예수님 앞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자에겐 천국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세상 앞에 당당해지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라면 재림과 상관없이, 아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모든 인간은 당연히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로마의 교인더러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라고 하면서 바울이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다가 깰 때가 가까웠다고 했는데 밝은 해가 뜨기 전입니다. 그래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고 했고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합니다. 반복해서 바울은 밝은 빛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은 후로는 빛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본인이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된 계기도 알다시피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잠시 봉사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찬란한 빛 가운데서 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비로소 예수님이 죄의 노예가 되어 사탄에게 조종당하는 흑암 같은 이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러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준행하는 열심에선 최고라도 자부했으나 십자가 대속구원의 진리를 알고 보니 자신이야말로 가장 어두운 지옥의 문 바로 앞에 서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극렬히 당신을 거역했고 신자들마저 잔인하게 핍박하는데도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사랑을 베풀어주셨고 당신의 거룩한 빛 안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사흘간 봉사가 됨으로써 그 은혜가 할례처럼 자기 몸에 각인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 빛이 자기를 떠난 적이 없고 떠날 리도 없다고 절감했기에 지금 주님의 빛을 계속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저작할 당시는 신자에 대한 핍박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네로 황제가 폭군이 되기 전으로 선정을 베풀고 있었고 글라디오 황제 때에 로마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을 다시 돌아오도록 허락했습니다. 유대가 반란을 일으켜 디도 장군에 의해 AD 70년 예루살렘이 망할 때보다 십여 년 전이라 로마와 비교적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로마로 돌아온 유대인 신자들은 가난해서 빈민촌을 이루고 있어서 알게 모르게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고 주님의 재림을 절실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온갖 추악한 죄악과 우상 숭배가 만연한 지상 최고의 사탄의 도성이었습니다. 패전국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와서 노예로 부려먹으며 향락과 사치를 맘껏 즐기고 있었습니다. 원로원과 군인 같은 정치 세력은 물론 로마 시민권자들 사이에 권력과 재물을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온갖 음모 모략이 성행했습니다. 로마의 그 모든 추악한 실상을 바울은 13절에서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 등으로 함축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인들에겐 출세 형통 쾌락만이 인생으로서 달성할 목표였으며 우상 종교도 신에게 치성을 잘 바치면 그렇게 된다고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그 추악한 로마의 모습이 너무 싫었던 하나님이 남겨둔 일부 로마 시민들과 귀족들이 있었습니다. 또 노예로 잡혀와 죽도록 고생만 하는 소수 민족 중에는 자기 인생에 아무 소망이 없다고 절감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이방인들의 눈에 예수를 먼저 믿은 유대인 신자들이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현실적으로 궁핍하기 짝이 없는데도 로마의 음란한 세태에 전혀 물들지 않고 오히려 거룩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비록 그들의 몸은 궁핍한 현실과 타락한 세상 가운데 살고 있어도 그 영혼만은 예수님이 이 땅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다시 오실 그 나라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그렇게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지했다.

 

신자의 삶이 불신자 때와는 당연히 달라야 하지만 윤리적 차원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본문 14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이후로는 그리스도의 옷을 이미 입고 있으니까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옷이란 항상 걸치고 있으므로 누가 봐도 그 사람인 줄 알 수 있고 또 인간이 옷을 벗은 채 있지 않으니까 신자라는 새롭게 확정된 정체성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덧입어서 하나님께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습니다. 새하얀 새 옷으로 갈아입었기에 다시 그 옷에 흙탕물을 묻힐 수는 없습니다. 아담이 여호와 하나님이 손수 지어 입혀 주신 가죽옷을 벗고 자기가 지은 무화과 잎 옷으로 다시 갈아입을 리는 절대 없지 않습니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바울은 13절에서도 “낮에와 같이” 그런 추한 죄악을 범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재림의 심판에 두려워서 착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네가 낮에 있으니까,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이미 입고 있는 신자니까 이전의 밤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도모하지 말아야 할 육신의 일(14절)도 성욕 재물 권력 욕심 같이 육체적 본능적 탐욕을 뜻하지 않습니다. 육신은 이전에 밤에 있던 때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대로 사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안락과 형통을 위해서 자기만 높이려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하나님도 그 일에 도움을 줄 때만 제대로 섬겼는데 이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벌써 빛 가운데 들어와 있는데도 혹시 흑암이 다시 덮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바뀐 나의 신분 위치 소속에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넘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주님이 다시 와도 주님 은혜 가운데 있기에 담담히 또 당당히 맞을 수 있다는 확신이 신자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준비가 되어 있던 안 되어 있던, 아직은 아니라고 믿고 싶던, 지금 당장 오라고 재촉하든 안하든, 주님은 당신의 때에 반드시 오십니다. 그 때에 빛의 갑옷을 입고 있되 흙탕물을 가능한 적게 묻히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맞고 싶다는 것이 신자 인생의 유일한 목표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므로 매일매일 조금씩 천국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요컨대 이 땅의 삶을 천국처럼 바꾸고 있습니까? 신자에겐 성령이 내주하시기에 신자가 진심으로 소원하면 매일매일 신자와 신자의 주변부터 천국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대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땅에서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인 신자의 매일의 삶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로 멸망과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이 세대의 사악한 영적 흐름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과감히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신인류

 

하나님이 코로나를 허락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두드러진 현상 안에 당신의 뜻이 명료하게 드러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모든 이들이 마스크를 쓰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스크는 사람들의 얼굴을 못 알아보게 만듭니다. 특별히 감정을 드러낼 수 없어서 친밀한 교제가 실종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냥 집안에서 먹고 자며 생존에만 급급한 짐승의 위치로까지 격하되었습니다. 개인의 정체성이 사라진 위에 인간의 존엄성마저 부인되는 것 같습니다. 마스크를 쓰는 신인류가 출현했다는 뜻으로 호모마스쿠스라는 신조어도 생겼습니다.

 

이 세대엔 인간성부터 올바르게 회복하는 일이 절실합니다.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주 귀하게 여기고 자기 이웃부터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고귀해져서 서로 사심 없이 섬길 수 있으려면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자기부터 죄에서 씻음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성품을 부여받아 주님이 걸어가신 삶을 따라가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마스크를 씀으로써 모두가 말을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말보다 행동으로 인간답게 신자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을 거룩하게 바꾸기 위해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거룩한 삶이 아니고는 세상 앞에 증명될 수 없습니다.

 

침묵은 또 힘이 약한 소외 계층이 권력자들의 불법과 불의에 항의하는 최선의 방안도 됩니다. 그런 뜻을 드러내려고 X자가 그려진 마스크를 쓰고 시위하지 않습니까? 지금 코로나 같은 흑암의 세력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신자더러 더렵혀질 대로 더렵혀진 세상의 온갖 죄악들과 그 배경에 있는 사탄의 마수에 대고 강력하게 스트라이크를 하라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코로나에서 생명을 안전히 지켜준 것만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불신자들도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올해 모든 이의 삶이 아무리 흑암 속에 갇혔어도 신자는 그와 반대로 빛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주님의 아름다운 빛이 항상 감싸고 있었습니다.

 

신자가 가는 곳 행하는 일마다 그 빛이 줄어든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리석고 본문처럼 육신의 정욕을 온전히 죽이지 못하고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안락과 풍요에 붙들려서 일시적으로 영적 봉사가 되었다 해도 여전히 주님의 빛 안에서 행한 것입니다. 코로나의 흑암이 그리스도의 빛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믿음이며 본문이 말하는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올해는 오히려 코로나 때문에 재림하실 주님을 더 자주 더 간절히 바라보았고 또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내 삶에 더 밝게 더 많이 비춰졌다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Time 잡지에 올해의 인물로 올라갈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아주 소수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빛 가운데 거하면서 주변에 그 빛을 비춰낸 이름 없는 신자와 십자가 복음의 진리만 전하면서 행동으로 실천한 목회자들입니다. 올해의 사건도 갈 바 모르고 불안에 떠는 세상 사람들을 죽음의 최전선에까지 찾아가서 기도해주고 가진 것을 나누며 섬긴 일이 뽑힐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아가는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겐 항상 올해의 밤이 깊고 내년의 낮이 가까운 것은 완전히 확정된 사실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그리스도의 빛을 더 소망하고, 더 잘 발견할 수 있고, 그 밝음은 더 밝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여전히 어둠 속에서 갈 바 모른 채 맞이하실 것입니까? 주님의 빛 가운데 당당하게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까?

 

(12/2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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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욘1:17-2:4) 내가 쫓겨났어도 다시 주를 바라보리라. master 2020-10-23 38
72 (요15:16-20) 코로나 사태가 신자들의 합심기도로 끝나지 않는다. master 2020-05-25 24
71 고난에 방치하는 하나님에게 화가 납니다. master 2019-12-25 123
70 너무나 번거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master 2019-11-14 21
69 자녀를 일찍 잃은 부모를 위로하려면? master 2019-07-20 25
68 지금껏 잘못 배운 것에 화가 납니다. master 2019-03-28 28
67 욥의 마음의 상처는 회복되었을까요? master 2019-03-11 45
66 욥의 자녀들이 왜 죄 없이 죽어야 하는가요? master 2019-03-05 53
65 고난 후에 정말로 달라졌는가? master 2019-02-22 53
64 성과 속을 너무 구분하지 말라. master 2018-11-09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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