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마음의 상처는 회복되었을까요?
[질문]
생명 외에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었던 욥이 잃었던 것들을 다시 회복 받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의 상처와 상실의 아픔 또한 함께 회복 되었을까요? 욥에게 본래 있던 자녀와 부와 아내와 종을 아무리 2배, 3배 더해 주신다고 해도 그게 욥 자신에게는 회복이고 복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그 기억과 아픔과 고통이 그의 마음과 생각에, 육신에 여전히 존재하는데 아무리 후에 갑절의 복이 주어진다한들 이미 육적, 영적으로 소진한 상태인 그에게 그것이 무슨 복이 되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답변]
고난에 대한 욥의 첫째 반응
욥은 아무 잘못 없이 모든 것을 졸지에 잃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자식들은 정말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 이유만이라도 알려달라고 매달렸으나, 결국에는 “주께서는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데도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일을 논했다”(욥42:2,3)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전지전능성 앞에 항복했습니다.
그 후 여호와께선 처음보다 더 복을 주었고 고난 없이 살다 죽도록 했습니다.(42:12-17) 자식은 잃은 숫자(1:2 & 42:13) 그대로, 가축은 두 배로(1:3 & 42:12) 다시 받았습니다. 말년에 더 큰 복을 받았으나 언뜻 병 주고 약 주어서 욥만 괴롭게 만든 하나님 같습니다.
처음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고난을 당했을 때에 욥은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어떤 불경한 언사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 하겠느뇨”(1:10)라고 담담히 그 고난을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의 살고 죽음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렸다는 절대적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의 감정이 평안에 차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정반대되는 인간의 피조물로서의 절대적 한계성을 시인한 것뿐입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잃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부모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흔히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평생을 두고 죽은 자식으로 인해 가슴앓이 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욥이 하나님이 죽이면 어쩔 수 없이 당해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당연히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동방의 거부요 현자로 살게 해준 것은 크나큰 은혜였다고 먼저 고백했습니다. 생사(生死)는 물론 화복(禍福)의 주관자이심을 철두철미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게 신실한 욥에게도 끝까지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5)
욥으로선 아들들이 잔치를 벌이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위해서도 일일이 번제를 지냈기에 그들이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하나님이 그들을 죽인 이유에 궁금해졌던 것입니다. 또 그래서 친구들이 하나님이 죄도 없이 사람을 죽일 리는 없다는 변론(예 4:7, 8:4)에 대해서 틀린 생각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던(예 10:7)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욥의 마지막 반응
욥기에 대한 다른 질문(#534 “욥의 자녀들이 왜 죄 없이 죽어야 하는가요?”)의 답변에서 밝혔듯이 그 고난은 영계에서 하나님이 사탄과 내기한 결과로 일어난 일입니다.(1,2장) 물질계에 제한 된 지혜와 불완전한 믿음으로 짧은 인생을 한 번만 살아야 하는 인간으로선 죽을 때까지도 그 원인을 모르는 고난이라고 전제하고 욥기는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욥은 그래서 마지막에는 알지도 헤아리지도 못하는 일을 논했다고 겸손히 자기 잘못을, 나쁜 일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능력 밖의 일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이때도 욥은 인간의 제한된 존재라는 숙명 때문에 무조건 항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고백 전에 하나님의 물질계의 이치에 대한 질문들에 단 한마디도 대답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도 알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더더욱 알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또 그 질문들에 대해 답하려고 자연계의 이치를 가만히 따져보니 그분의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고 장엄하고 완벽한 섭리가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욥은 자연에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아름답고도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면 이 고난에도 비록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욥은 고난의 초기에는 그 이유는 몰라도 하나님이 복을 주셨으니까 고난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고난의 목적 이유와 결과는 끝까지 몰라도 당신의 의로운 뜻은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두 확신의 바탕에서 앞으로는 범사에 이유를 따지지 않고 감사하며 순종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말년의 복을 받기에 충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사탄과의 내기로 욥에게 도무지 수긍이 안 되는 고난을 허락했지만, 다른 말로 욥이 행한 것과는 완전히 상관없이 당신만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고난을 주셨지만 욥의 인생을 그 상태로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 정말로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인간을 갖고 노는 우상 신들의 수준으로 격하됩니다. 인간으로선 어떻게 하든 최고의 정성을 바쳐서 그 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기분을 맞춰주어야 합니다.
흔히 뜨겁게 믿고 열심히 섬기고 많이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기복주의도 실은 아주 큰, 정확히 말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우상숭배의 잔재입니다. 욥에게 영계에서 아무 이유 없는 고난을 땅에 내린 이유 중에 하나는 기복주의는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려는 뜻입니다. 지금도 한국기독교의 주도적 흐름이 되어 있는 사상을 성경은 무려 지금부터 4500여 년 전에 아예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욥이나 그의 아들들을 순교시킨 것이 아닙니다. 욥이나 그 아들들은 아무 잘못이나 죄 없음에도 욥의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 더 중요하고 정확한 의미로는 후대의 성경독자들에게 욥이 깨달은 영적인 진리를 알게 해주려고 희생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이 신경질적인 우상과 완전히 다름을 보여주어야 했고 그래서 욥에게 처음의 복을 다시 허락하신 것입니다. 독선적으로 벌과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만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공의에 따라 행하신다는 것을 보이고 성경의 기록으로 남기려는 뜻이었습니다.
욥의 믿음과 감정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유익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유익 중에 가장 중요하고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욥의 아들들처럼 아무 잘못, 죄, 이유 없이 그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욥기가 말하는 영적 진리가 계속 생각난다면 인간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하루도 제대로 살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마저 자신의 삶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사탄과의 싸움이라는 점을 자주 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망각의 은사로 준 것이 아니라 원죄로 타락했던 자기 중심의 본성이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사탄이 여전히 우는 사자로 우리를 삼키려고 문 앞에 엎드려 자꾸만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신자가 갖고 있는 자기만 높이려는 본성의 대표적인 양상은 남의 허물은 귀신같이 잡아내고 자기의 너무나 큰 죄는 잘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습성이 범사에, 말하자면 범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에게까지 적용됩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욥과 달리 하나님께 받은 복은 금방 잊어버리고 화는 끝까지 의심 불만 원망합니다. 또 욥이 내린 결론인 범사를 하나님이 절대로 주관하시고 반드시 의로운 뜻이 있다는 점을 잊거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닥칠 때마다 조금 기도해보고 해결이 안 되면 하나님께 의심 불만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그 큰 고난을 겪었음에도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는다고 곧바로 고백한 욥의 믿음은 우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이미 자기 가슴에 묻혔고 그 슬픔은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자 오래 몸부림쳤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마지막까지도 그 구체적인 이유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그 이유를 몰랐기에 자기 몸의 분신처럼 된 고통스런 기억이 지어질 리는 결코 없습니다.
자식이 평생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이 개차반처럼 살다 사형 당했다면 차라리 잘 죽었다고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는 그렇게 해도 마음은 그 자식이 너무나 헛된 인생을 살다 허무하게 죽었기에 더더욱 애처로울 것입니다. 욥은 자식들을 위해서 항상 결례와 번제를 드릴 만큼 그들을 특별하게 사랑했는데 그 슬픔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깨달은 영적진리는 물론 의로운 믿음과도 별개로 이는 그의 감정에 속한 문제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욥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기에 더더욱 하나님께 이유를 알자고 따진 것입니다. 말년에 비록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았지만 밤중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트라우마로 남아 계속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또 바로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두 배로 주신 것입니다. 일찍 죽은 자식들이 불쌍하니까 더더욱 새로 얻은 자식을 잘 돌보고 사랑하라고 또 그럼으로써 그 슬픈 과거를 이겨내라고 말입니다.
비슷한 고난을 겪은 다윗
성경에 이 질문에 답이 될 만한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사이에 난 아들을 하나님이 나자마자 데려갔습니다. 물론 다윗의 죄에 대한 형벌로 죄 없는 그 자식이 희생되었기에 욥의 경우와 조금 다르지만 세상 모든 부모의 심정은 똑 같습니다. 다윗도 자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줄 깨닫고 식음을 전폐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성전에서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삼하12:15-17)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다는 보고를 듣자 당장 금식을 그치고 의복을 고쳐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습니다. 죽었으면 오히려 슬퍼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 때 다윗은 욥과 같은 어쩌면 그보다 더 심오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언뜻 부모로서 도저히 행해선 안 되는 말 같기도 합니다.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12:23) 생사는 하나님이 주관할 뿐 아니라 이미 죽음으로 끝난 일을 더 기도해야 아무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나도 어차피 그분이 부르시면 언제든 죽을 수밖에 없는 너무나 미약하고 제한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그 잘못이나 슬픔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그 사건에 대한 자기 심정을 기록한 것이 시편 51편입니다. 그의 진정어린 회개를 받으시고 하나님은 밧세바와의 사이에 솔로몬을 다시 주었고 그 솔로몬으로 당신의 성전을 짓게 했습니다. 손에 피를 많이 묻힌 다윗에게 평화를 빌어야 하는 성전을 짓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그러했지만 평소 솔로몬은 성전건축이 아버지의 필생의 숙원임을 알았고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비로부터 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을 볼 때마다 난지 7일 만에 죽은 그 형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슴이 저렸을 것입니다. 자식의 죽음은 심지어 엄마 배속에서 유산을 해도 결코 잊을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을 통해 그 슬픔을 잊고 위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솔로몬의 교육에 철저했을 것입니다. 욥도 새로 얻은 아이들로 먼저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을 잊고 위로 받으며 그들을 더욱 올바르게 양육했을 것입니다.
자식으로 인해 이보다 더 큰 슬픔을 나중에 다윗은 또 겪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첫 아들 압살롬이 배다른 형제 암논을 죽이고 그술 왕에게로 도망갔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삼하13:37) 왕의 심정을 눈치 챈 신하들의 간청에 못 이기는 척하고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그런 압살롬이 결국에는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애첩과 백주에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 통간하는 엄청난 불효와 불충의 죄악을 저질렀습니다.(삼하16:20-22) 그 반역을 요압이 진압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은 살려두라고 명합니다.(삼하18:5) 요압이 후환을 없애려 압살롬을 죽이자 너무나 애통해 하고(삼하18:33), 유언으로 솔로몬에게 요압을 없애라고까지 명합니다.(왕상2:5)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 다윗도 아버지인 자기에게 절대로 범해선 안 되는 너무나 큰 잘못을 범한 압살롬마저 이렇게까지 애통해 했습니다.
고난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
고난을 겪고 오랜 후에도 아니 죽기까지 욥의 감정의 부침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상처하거나 이혼 후의 아픔만 해도 크고 평생을 잊지 못하지만 재혼하여 새 배우자를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며 새롭고 보람찬 인생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자식을 일찍 잃으면 너무나 큰 고통이지만 다시 얻은 아이를 더 사랑하고 부부간의 사랑도 더 깊어집니다. 고난조차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핸디캡 첫아들이 태어나자 그 후로 자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새로 태어나는 정상인 아들이 더 좋아져서 불구 첫아들에게 등한히 하게 될 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떤 장애인을 둔 부모는 그럴수록 새로운 아이를 가져야 비교가 되어 불구아들이 더 불쌍해지고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합니다. 둘 다 믿음의 올바른 반응으로 어떤 것이 더 옳고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아 평생 사랑한 손양원 목사님도 있었지 않습니까?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이전의 고난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은 평생을 갑니다. 욥처럼 좋은 일로 회복되면 좋지만 때로는 더 힘든 고난이 생기고 해결되지 않은 채 일생을 마치기도 합니다. 이전의 고난의 경험으로 새로운 복이든 고난이든 믿음으로 잘 반응하라는 것이 욥기 결론이 뜻하는 바입니다.
믿음이 고난을 없애거나 빨리 탈출하는 심지어 잊게 만드는 용도가 아닙니다. 인생은 어차피 고난의 연속으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욥이나 다윗도 예외는 아닙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고난이 많으며 또 고난을 많이 겪은 자일수록 믿음이 성숙해집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피할 수 없는 고난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자세 태도입니다. 고난 이후에 더욱 성숙하여서 정금같이 되도록 하는 것이 믿음의 역할입니다 역으로 말해 인생으로 이전의 고난을 잊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도 화복을 겹쳐서 주시는 것이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성경의 두 구절로 이 질문의 답으로 결론 내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4-6)
3/10/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