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7:11–19) 평생 처음 드리는 성경적 추수감사절
2020추수 감사절 설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17:11-19)
지금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권력 재물 지성 그리고 믿음과 상관없이 동일한 고통을 동시에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도, 원인이 있는 것도, 선택한 것도 전혀 아닙니다. 근 일 년 가까이 집안에 격리되어 꼼짝 못하니 우울증을 넘어 까닭모를 분노와 상대도 없는 미움에 차있습니다. 생활방식이 바뀌니까 사고방식도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백신이 두 가지 개발되어 이르면 내달부터 접종이 가능해졌지만 정상으로 돌아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신자들도 이 사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고 아무리 합심 기도해도 고통이 지속되니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올해의 추수감사절 예배는 차라리 생략하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진정성과 순수성이 결여된 감사는 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아무리 환난 중이라도 열심히 찾아보면 사소한 감사는 누구에게나 있고 그래도 없다면 생각의 패러다임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윤리이지 구태여 교회가 가르칠 내용이 아닙니다. 문둥이 열 명이 예수님의 기적적인 치유를 받고도 한 명만 돌아와 감사했다는 본문기사를 통해 참된 감사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어떤 마을에 들어갔더니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났습니다. 나병환자가 멀리 떨어져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문둥병자에게 적용되는 몇 가지 규칙이 있었습니다.
병에 걸리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하는데 죽은 자를 애도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윗입술을 가려야 하는데 자기 입술을 스스로 치는 것을 상징하고 이는 자신을 극도로 비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길을 걸을 때는 반드시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고 성 밖에서 따로 모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인데 집에 격리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지금 우리의 처지가 그들처럼 되었습니다.
지금 열 명의 나병환자가 동시에 나타났다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작심하고 격리된 거주 지역을 빠져 나와서 치료 받으려고 예수님을 기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공사역 말기인지라 예수님의 신령한 치유 능력이 이미 유대 온 지역에 퍼져서 세상과 동떨어진 문둥이 촌에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는데 치료해달라는 히브리어 관용구입니다. 예수님도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만 했는데도 열 명 모두가 그대로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고서 고쳐주었습니다.(눅5:13) 그 소식은 문둥이 촌에 가장 먼저 전해졌을 것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한 랍비가 어떤 불치병도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 후에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갈릴리 바다 광풍도 잠재웠습니다.
무엇보다 로마 백부장이 아끼는 종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에 사람을 보내어 유대인 랍비가 이방인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말씀으로만 고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그 가상한 믿음을 보시고 나았다고 선언했는데 그 사람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나았습니다.(눅7:10)
지금은 백부장 때와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이들도 예수님이 말씀만 해도 반드시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을 믿었기에 순종한 것이며 실제로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에 다 나았습니다. 주님이 제사장에게 검사받으라고만 말씀하셨는데 병이 나아야만 가능하므로 치료는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소원하는 일이 완전히 실현된 후의 모습으로 당신의 약속에 대한 보장으로 주십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눈에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전부를 실제로 그분께 의탁하며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아홉 명은 감사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동일한 믿음으로 동일하게 순종해서 동일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아홉 명은 입을 싹 닦아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 감사하지 않았다고 쉽게 단정지어선 안 됩니다. 그들은 코로나 환자처럼 사랑하는 가족과도 만나지 못하고 직업도 못 가지고 평생을 격리된 채로 살아야 합니다. 거기다 치료법이 전혀 없어서 그렇게 살다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서 그저 목숨만 연장하고 있지 아무 기쁨은 물론 의미가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걸아가면서 쉴 새 없이 “부정하다. 부정하다”외쳐야 했습니다. 나병이 깊어지면 목 근육도 썩고 코도 떨어져 나가므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로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멀리 계신 주님이 들릴 수 있도록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함쳤고 걸어가면서도 부정하다 외쳤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지 모르게 흐르던 진물이 멈추고 더러운 냄새도 사라지고 움푹 파였던 피부가 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반쯤 떨어져 나간 손가락 마디나 코에 깨끗한 새 살이 돋아났습니다. 너무 신기해 놀라면서 생애 최고의 기쁨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는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죽음에서 건져준 예수님의 은혜를 몰랐거나 잊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신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양심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무리 완악한 악인이라도 다른 이에게서 공짜로 선물을 받으면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문제는 그렇게 자연적으로 생기는 감사하는 마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그럼 그 본성적인 감사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게 막은 더 강력한 어떤 이유가 그들에게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보다 제사장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인 모습이 그것을 말할 뿐 아니라 본문 안에 그들의 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힌트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 감사하러 돌아온 자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출신지역을 구태여 기록한 것은 나머지는 다 유대인이었다는 뜻입니다.
사마리아인이란 알다시피 앗수르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에 히브리인들과 혼혈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앗수르 인의 피가 반이 섞인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민족의 반역자로 매도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는데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이삼 일이 더 걸려도 그 땅을 밟지 않고 둘러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문둥이들을 격리 수용한 곳에선 그런 차별 없이 함께 잘 지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구원 밖에 있는 동등한 처지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같이 왔고 또 주님이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명했을 때도 함께 출발했습니다.
유대인 9명은 가는 길에 완치되자 화장실에 갈 때와 갔다 와서 표정이 다르다는 속담대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병이 낫기 전에는 유대사회에서 추방되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으나 이젠 정상인이 되었으니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해진 것입니다.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들의 생각은 이해해줄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그 일이 절대로 불가능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충분히 알고도 짐짓 모른 척 넘어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의 인사를 하자니 조금 께름칙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말기인지라 유대 공회가 주님과 그 추종자를 미워해서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격리 소외된 사람일수록 바깥 사회가 그리워서 소문에 빨리 반응하는 법입니다. 거기다 주님은 사마리아인은 물론 이방인까지 차별 없이 대한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럼 사마리아인과도 다시 교제를 이어가야만 합니다.
어쩌면 사마리아인 병자더러 제사장한테는 네가 갈 곳이 안 되니 네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먼저 말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유대 제사장이 사마리아인의 완치를 확인해줄 의무도 없고 만나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똑같은 문둥이로 죽음만 기다리던 동료 사이였으나 병이 완치되자마자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벌어져버렸습니다.
구출과 구원의 차이
사마리아인도 지금껏 유대인들이 동병상련으로 친구처럼 대해주었지만 병이 낫자 현실은 냉정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을 것입니다. 유대 제사장이 자기를 상대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말씀으로만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유일신 신앙을 가졌고 모세오경을 철저히 믿고 따랐습니다. 그들에게도 여호와가 아닌 인간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싶어도 인간이 인간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격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가 당신에게 엎드린 일을 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했으니 당신께서 하나님이라고 간접적으로 확인해준 것입니다.
문둥병은 인간의 의술로는 도무지 치료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새 살이 돋았는데 그것도 예수님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미리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창세기 기록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낫게 되자 바로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함께 하신 성령의 역사로 창조주의 큰 권능이 자기에게 임했다는 간증입니다. 또 그렇게 치유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어느 누가 강요 권면하지 않아도 저절로 솟구치는 뜨거운 감격에 이끌려 한 걸음에 달려와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도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유대인 아홉 명도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대로 순종해서 병이 완치되었지만 구원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소문에 듣던 대로 신비하고 엄청난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은사를 지닌 선지자 메시아 정도로만 간주했지 죄에서 구원해서 심판을 면케 해주는 하나님 본체이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관심은 없고 오직 치료해주는 능력의 덕만 보려 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전의 유대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가족과 동료들이 보고 싶었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았고 거룩한 율법을 지키고 있으니 더 이상 구원은 염려할 것 없다는 시온주의로 돌아간 것입니다. 재수 없게 문둥병에 걸려 잠시 여호와의 총회에서 추방되었지만 이제 병이 나았으니까 성전 제사부터 참여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예수를 만나게 되면 감사의 표시로 금전적으로 사례만 하면 되겠지 정도로 여겼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히6:4-6)에 해당됩니다. 분명 삼위 하나님의 권능을 몸으로 체험했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신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해서 기도해주어서 귀신 들림이나 중병에서 치료 받고도 주님에 대해 알아볼 생각도 않고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을 통해 세상 어느 민족도 받아보지 못한, 아니 알지도 못하는 최고의 기적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이 자기들을 출애굽 시켜주었다고 선언하면서 그 앞에서 음란하게 먹고 마시고 춤추며 섬겼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은 그들로 거룩하게 살도록 모세에게 율법을 수여하는 중인데도 말입니다. 가데스바네야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을 텐데도 처자들의 안전을 핑계 삼아 꽁무니를 쳐버렸습니다. 예수님의 권능만은 철저히 믿은 본문의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이 가진 믿음만큼도 없었습니다.
여호와가 주신 율법대로 거룩하게 살아서 열방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귀찮게 여겼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이방인들과 똑같이 세상에서 신나게 먹고 마시는 용도뿐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 계속 심판을 받고도 정신 못 차리고 동일한 죄를 반복해서 범했고 그것을 경고하러 보낸 선지자들도 죽여 버렸습니다. 율법을 외적으로만 준행했고 성전 제사를 형식적으로 지키며 지도자들부터 권력과 재물을 쌓기에 바빴습니다. 모세오경과 선지자가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소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대로 하자면 한순간에 다 유황불을 내려서 심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큰 교만과 죄악마저 당신만의 인내와 긍휼로 용서해주셨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시고 인도하신 당신의 백성이었고 당신과 제사장 나라 언약을 맺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향한 뜻은 언제나 재앙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능력으로 그들의 육신적 형편을 더 나아지게 해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대속의 사랑으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주러 온 것입니다.
유대인 문둥이들은 예수님의 치유가 임하기 직전까지 계속 부정하다고 외치면서 스스로 죽은 자와 같다고 인정했습니다. 병이 낫자 곧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행동만 치장하는 종교적 의인에 불과합니다.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이나,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육신만 고난에서 구출 받았지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는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왜 나 같은 자에게(why me)?
구원을 얻는 믿음은 본문의 사마리아인과 같아야 합니다. 유대인 랍비가 사마리아인인 자기를 전혀 차별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하고 완벽하게 치료해 주었습니다. 지금껏 사마리아인을 상대해준 유대인도 처음 봤지만 문둥병을 치료해주는 분은 더더욱 처음입니다. 주님 앞에 엎드린 것은 자신을 최대한 낮춘 것입니다.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데도 넘치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러 이 땅에 오셨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구분 없이 모두 다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뜻을 잘 살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을 단지 치료만 해줄 양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말씀만으로 순간적으로 다 고쳐줄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대인들도 당연히 주님께 감사하고 여호와께도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나아가 사마리아인과도 계속 친한척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진심을 보길 원했던 것입니다. 아니 유대인들이 틀림없이 다시 유대사회로 돌아가기만 원했지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이미 다 아셨습니다. 그들의 심령까지도 꿰뚫어 알고 있기에 너희 소원대로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과 아무런 개인적인 관계도 없어지고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너희가 구원 밖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완고한 선민의식을 철저히 깨트리려는 뜻이었습니다. 주위의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나아가 오늘날 성경독자에게 십자가에 따른 은혜 구원과 율법을 지키는 행위 구원을 정확하게 대조시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이라고 하지 않고 이방인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된 자(유대인)는 구원에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이방인)는 구원에서 먼저 된다는 가르침을 실제 증거로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먼저 된 자임에도 오히려 주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서 나중 되고 있지는 않는지 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본성적으로 자연히 우러나온 감사로 그쳤고 그마저도 참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감사하는 마음 자체에 거짓은 없었으나 문제는 자신들에게 그것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인식이 아예 없었습니다. 어떤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자격이나 공로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있다고 여기면 100% 순전한 감사는 절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빌려서 육신이 형통되기만 바랐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 적극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택해 복의 근원으로 세운 목적도 현재 자기들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가장 순전한 감사는 자기는 받을 자격이 도무지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의 원수의 자리에 있는데 무상으로 용서와 구원을 받았을 때 나옵니다. 당신의 전부를 먼저 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선 인간의 가진 의, 선행, 공적 그 어떤 것도 휴지 조각이 됩니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아니 상상도 못했던 은혜입니다. 신자에게만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진 감사는 참 감사가 아닙니다.
주님 은혜 안에 있다는 것도 잘 믿기만 하면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스스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성실히 헌신하고 있어도 자기에겐 주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주님의 사랑이라고 절감하는 것입니다. 범사가 나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여 맡겨주신 소명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임을 알기에 실제로 충성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란 하나님께 범사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된 자입니다.
코로나 사태에 감사할 것들
추수감사절은 추수라는 말이 하나님이 무상으로 베푸신 것이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잔치입니다. 사람에게 은혜 받은 것에 대해서 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도 아홉 명의 유대인들처럼 형통한 것에 대해 본성적인 감사가 아니라, 한명의 신자인 사마리아인처럼 드리는 참 감사여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을 보시길 원하십니다. 아니 누가 알곡이고 쭉정이인지 이미 다 꿰뚫어 알고 계십니다.
우선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부터 신자에게 주는 고난과 시련이 아니라 큰 축복입니다. 당장에 예배의 중요성, 공동체의 의미, 마음껏 목청 높여 찬양하고 기도하는 즐거움, 성도 간에 권면 위로 도전 받는 사귐 등등을 그 동안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얼마나 소홀했는지 절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마다 신자마다 회개의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회개의 내용이 성경적 진리에 따른 것인지는 따져볼 여지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저런 잘못들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함께 합심해서 이 사태가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실감하게 되는 바람에 구원을 소망하거나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실제로 텍사스의 게이트웨이 교회의 몇 주 전 온라인 설교에서 이번 사태로 무려 만 명의 교인이 늘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크리스천 포스트라는 미국기독교 신문 11/18자 인터넷 판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로 가장 젊은 Z세대가 믿음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오히려 가장 높고 이전보다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어서 빨리 공식 예배로 모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신자들이 이 큰 고난 중에도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평강을 잃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임을 실제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도 어렵지만 주변에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해주고 실제로 도움을 주어야 할 일들이 늘어났습니다. 병원, 구제, 봉사활동 등에 자원해 재능을 기부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생각도 못했으나 지금 모든 이가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신자가 이웃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눌 기회가 늘어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피부로 다가와 내가 가진 구원과 믿음을 다시 진지하게 점검할 수 있습니다. 강제로 외출 금지 되면서 성경을 더 가까이 접하고 기도도 아무래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가족과도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며 더 친밀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비록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불쌍하긴 해도 자신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이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입이 줄어들어서 필요 없는 낭비를 없애 자원도 아끼기 시작했습니다. 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에 다시 큰 경각심이 생겼고 모든 나라가 협력해 개선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인생에서 정말로 무엇이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살펴봐도 억지로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아도 고난 중에도 진정으로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번 사태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끝없는 탐욕과 죄악으로 이 땅을 무차별적으로 어질러 놓은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강제적으로 일이년간 기도원에 들여보내어서 새롭게 만드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묵묵히 이 땅을 새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전혀 회개하지 않았음에도 당신만의 은혜를 베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신자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소금과 빛으로 살아간다면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고 각각의 인생도 살아갈만한 가치가 얼마나 늘어나겠습니까?
나병환자들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면역력이 완전히 없어져서 균이 하나만 들어와도 저항을 하지 못하기에 썩어 들어가는 것이 문둥병입니다. 병이 들면 몸에 열이 나고 아픈 이유가 백혈구가 세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육신에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병이 나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들로선 고통이 생기는 것이 최고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런 큰 문제가 없었던 예년의 추수감사절에는 현실적으로 좋았던 몇 가지 일만 감사하고 치웠습니다. 신자이면서도 형통했거나 고난이 끝났기에 드리는 감사는 아무리 새벽예배에 개근하며 간절히 기도했어도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만 간절히 믿은 셈입니다. 거기다 그 기도와 예배가 자신의 공적으로 변질되어서 감사도 오염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겐 코로나 사태가 아니면 주님이 베풀 수 없었던 은혜가, 특별히 자신을 죄에서 깨끗케 하고 당신의 종으로 더욱 헌신케 해주시는 은혜가 자신과 주위에 지금도 수도 없이 널려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코로나 사태마저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을 때에 평생에 처음 진정으로 드리는 추수감사절이 될 것입니다.
(11/22/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