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고난을 방치하시는가? (3)
환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책임에 관한 몇 가지 의문들
추가 의문 1.
마태복음에 참새 한 마리도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참새가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발생되었다 이렇게 봐도 되는 것인지요?) 이 뜻으로 많은 신자들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요. 허용보다는 허락이라는 개념이라면 조금 더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함은 고난과 질병과 자연재해와 같은 수많은 일들이 직접적인 원인은 인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셨으니 발생이 된 것이라고 보면 고난의 원인에 있어 하나님의 뜻도 있는 게 아닐런지요? 모든 일은 하나님과 소통하며 해결하라고 하시면서 고난의 원인만큼은 하나님께 따질 수 없음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회복의 때에는 내가 건져주었다 하시며 고난은 인간의 탓이며 모든 고난을 해결할 이유와 책임이 없다고 하신다면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추가 답변 1.
참새 한 마리도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신자들의 의식주를 궁극적으로 책임져 주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강조하려고 예로 든 비유입니다. 하나님이 셀 수도 없는 참새들 한 마리마다 일일이 계획을 갖고 주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새들도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생존환경 안에서만 생활하지 그 밖을 벗어나지 않듯이 신자도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도 자연을 인간의 일용생활에 필요한 자원으로 마련해 주었고 그것을 잘 활용할 고급한 이성도 나눠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새 같은 짐승은 자연계의 법칙대로 생존하는 것이 첫째 목적이자 삶의 전부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그런 뜻을 모르니까 짐승처럼 오직 먹고 마실 것만 구하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당신의 백성은 그런 것들에 대한 염려에 하루 이상 묶이지 말고 하나님의 뜻부터 먼저 구하라고 명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며 당신의 의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질병과 자연재해 등은 앞에서 설명 드린 대로 인간이 이 땅에 살면 반드시 따라오는 증상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런 일들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를 허용한 것이지 개별적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일들은 인간의 자유재량에 맡겨서 자기 책임 하에 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허락했다고 해서 고난의 책임과 해결책을 하나님께 묻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공부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다 마련해주었는데도 성적이 떨어져 낙제를 하자 부모더러 강제로 공부시켜주지 않았고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는 꼴입니다. 부모도 하나님처럼 자식이 어차피 공부 못할 것을 알기에 그에게 가장 합당한 다른 길로 인도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일으킨 어떤 고난에도 원인을 제공하거나 해결해 줄 책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자에 한해선 문제가 생긴 후에 회개하고 다시 주님만 의탁하면, 아니 그전에 일을 시작할 때부터 주님께서 보호 인도해달라고 기도하면 당신만의 방식으로 선하게 이끌어주십니다. 나아가 광대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다 행하게 두고서도 당신의 거룩한 뜻과 계획을 실현함에 전혀 영향 받지 않습니다. 그런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께 신자가 바칠 것은 오직 감사와 경배뿐입니다.
추가 의문 2.
만약 두 명의 환자가 있습니다. 한 명은 고침을 받고, 다른 이는 고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고침 받은 사람은 당연히 주님의 뜻으로 고침 받았다 할 것인데, 고침 받지 못한 자는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야할까요? 아니면 인간의 죄로 질병이 생겼으니 그냥 인간의 욕심으로 생긴 결과물이구나라고 생각해야하는 겁니까? 만약 후자라면 상황에 따라 왜 주님의 뜻이 되기도 하고,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까? 고침 받은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고침 받지 못한 것도 주님의 뜻 아닙니까? (직설적으로 말하면 왜 회복의 결과물에 대한 책임만 가져가시며, 고난의 발생 원인에서는 제외되시는 겁니까?)
추가 답변 2.
모든 질병은 유전적이거나 환경적 폐해로(이번 펜데믹처럼) 불가항력적인 것 외에는 본인의 건강관리실패가 전적인 원인입니다. 유전적 질병도 오랜 기간 누적된 인간들의 죄로 부실해진 육신상태가 유전자에 변화를 일으켜 후대에까지 전해진 것이라 인간의 죄에 책임이 있습니다. 알기 쉬운 예로 동성애와 AIDS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환경적 폐해도 인간의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인간은 믿음과 무관하게 건강하게 가꿀 책임이 있습니다. 질병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어쨌든 질병이 들었으면 통용되는 의술대로 자기 판단 하에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케이스에 능통한 의사를 만나 가장 적합한 치료법과 약을 처방 받게 하고 치료과정에서 실수가 없고 자신도 병을 이기며 규칙적인 섭생을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낫고 나면 의사는 물론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기적적인 치유가 아닌 이상 고침 받는데 기여한 것은 하나님보다 의사의 역할이 더 클 것입니다. 고침 받지 못한 것은 말기 암처럼 이미 손을 쓰기에 너무 늦었거나 치료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고난의 발생 원인과 경과에 하나님이 기여하지 않았는데 왜 결과에까지 책임져야 합니까? 인간은 자기가 실컷 놀면서 어질러놓고는 뒷설거지는 하나님이 해주어야 한다고 고집부립니다. 병에 걸렸을 때에는 믿음이 없는 불신자도 낫게 해달라고 절대자에게 기도합니다. 병이 걸리기 전부터 그 병을 막아달라고(어떤 병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령 암이나 치매가 두려워서 미리부터 막아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들 노화나 건강관리 실패나 스트레스 등으로 발병됩니다.
말하자면 신자라도 기도하지 않고 일상적 병을 일상적 방식으로 고치고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아도 그분은 전혀 탓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도했더라면 더 빨리 더 완벽하게 고쳐졌을 수 있고 하나님과 믿음 안에서 교제한 영적 체험은 쌓여갈 것입니다.
추가 의문 3.
가끔은 신자들의 자기합리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난 속에서라도 뭐라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긍정적인 면을 찾아야지만 버틸 수 있어서... 예를 들면 더 겸손하게 하려고 하는 걸꺼야 라고 위안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작은 일에도 주님의 뜻이 있을 거야라며 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인간의 삶을 이치대로 흘러가는 걸 허용했어라고 하시면, 현생에서는 하나님께 굳이 많은 것을 여쭤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치대로 흘러가는 인간사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대부분인데, 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인지요.
추가 답변 3.
기도가 단순히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기가 계획한 대로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를 나누는 씨름이 아닙니다. 그럼 신자가 기도로 하나님을 자기 노예로 부려먹으려는 불경 아니 큰 죄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수시로 그 연약한 이성과 의지는 물론 믿음도 들쭉날쭉 하고 자신의 욕심 고집 죄성까지 개입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일에 세상 사람의 방해와 사탄의 훼방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잘 분별하거나 최소한 자신이 결정적 실수를 하지 않고 또 외부의 방해를 막아주어서 끝까지 이 일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매사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제기하고 계신 의문들의 바탕에는 하나님은 신자가 행하는 범사에 개입하되 반드시 선한 길로, 최소한 고난은 생기지 않게 이끌어야 한다는 오해 내지 고집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니면 미리부터 그런 길을 계획해놓고 절대로 다른 길로 가지 못하게 막아주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신자의 자유의지를 그대로 두고도 하나님은 완벽하게 당신의 거룩한 뜻을 드러내고 실현하십니다. 따라서 신자들이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로 자기 합리화가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무궁무진하고 신자가 기도할 내용도 많습니다. 기도를 꾸준히 하고 범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분별하려 노력하는 신자는 고난 가운데 오히려 그분의 은혜를 더 풍부하게 발견해 누릴 수 있습니다.
추가 의문 4.
앞선 글에서 파생된 질문입니다만, 우연과 기도응답(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구별이 될까요? 하루는 지인이 '아파트에 지정주차공간이 없어서 고민을 하였는데, 이웃이 이사 가는 바람에 주차공간이 생겼다며, 하나님께서 해주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역시 하나님은 작은 것까지도 예비해 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기도로 간구하지 않은) 비신자에게도 우연히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며, 갑자기 생기는 행운은 누구나 인생사에서 생기기 마련이지 않을까라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신자들은 작은 것 하나까지도 모두 그분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기도로 간구하였기 때문에 길을 열어주셨다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이것이 단순히 자연의 이치에 따라 이루진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해주셨다고 생각해라'라고 하신다면, 반대로 기도로 간구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이것도 주님께서 막고 계신다. 주님이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구나라고 해석해도 되는 것인지요?
제가 느낀 바로는, 상기 지인의 경우와 같은 경우에 주차공간이 생긴다면 간증거리가 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혹은 원래 주차 공간이 생기기 어려운 상황이었어 하고 말아버립니다. 제 질문은 어떤 때에는 주님의 응답이라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냥 인간사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기도응답이 되는 경우에만 주님이 역사하셨다고 하니, 가끔은 그냥 끼워 맞추기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추가 답변 4.
누구에게나 행운처럼 보이는 일은 다 생깁니다. 불신자들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니까 행운도 자기 공로 아니면 운수로 돌립니다. 반면에 신자는 세상만사에 우연은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필연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그 필연이 신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뚝딱하고 해주는 식은 절대 아닙니다. 신자가 행하는 대로 두고도 그런 결과가 일어나게끔 역사하시므로 필연인 것입니다. 주차공간이 우연히 생기면 행운으로 가볍게 여기면 불신자이고, 하나님의 역사라고 받아들이면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입술의 말은 물론 마음의 묵상까지 꿰뚫어 아십니다.(시139편) 평소에 전용주차공간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면 그분은 당연히 알고 계셨고 신자가 그런 기도까지 했다면 그에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런 소망을 품거나 기도를 해도 들어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차공간을 주신 것은 신자가 몸이 불편하거나 어린 아이가 있기 때문일 수 있고, 주지 않은 경우는 거꾸로 불신자 (혹은 신자) 이웃에게 그 공간이 꼭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자가 모든 일에서 그분의 뜻을 분명하게 미리 분별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범사를 하나님의 필연이라는 자세로 대하면서 그분 중심으로 묵상해나가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분께 감사할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추가 의문 5
한 예로 제가 시험에 합격했다는 가정을 하겠습니다. 내가 잘해서 합격했다고 하면 교만하다고... 주님께서 지혜를 허락해서 붙여주셨으니 감사하고 겸손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했지만 시험에 떨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안 주셔서 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운이 따르지 않았다거나 노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것이라고 다음에 더 열심히 하라고 하십니다. 왜 결과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되기도, 노력부족이 되기도 하는 것일까요? 이중적인 논리라고 느껴지는 이 두 가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추가 답변 5.
우선 시험에 합격하고 불합격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믿음은 물론 기도와는 무관합니다. 하나님이 관여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실력을 쌓았고 시험 당일에 당황하지 않고 쌓은 실력을 제대로 발휘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교회끼리 친선운동시합을 하면 하나님은 어느 쪽도 편을 들어 주지 않고 실력이 앞서고 단합이 잘되는 교회가 이길 뿐입니다. 극히 예외적으로 예컨대 신실한 신자가 시험 전 며칠 동안 가난한 이웃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시키고 간호하느라 미처 시험 준비를 못했는데 마침 평소에 익히 알고 있는 문제들만 나오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이중적인 논리로 나누는 것부터 잘못이며 신자가 운이 따르지 않아서 떨어졌다는 말은 절대로 해선 안 됩니다.
입이 아프도록 강조하지만 평소부터 열심히 공부하면서 최선을 다해 공부에 매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당일 날은 더더욱 실수하지 않고 담대하게 평소 실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매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성공이든 실패든 그분 독단으로 결정 시행한다고 믿는 것은 그분 중심의 사고도 아니며 심지어 믿음도 아닙니다.
평소에 매사를 기도하면서 수행하는 신자라면 모든 결과가 드러난 후에는 어디까지 자신이 노력한 것이고 어디서부터 주님이 도와주셨는지 비교적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자기 힘으로 불가능한 일들 중심으로 기도하니까 그런 일들이 응답되면, 또는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전혀 예상치 않은 선한 결과가 나타나면 당연히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가 의문 6.
어디까지가 인간의 자유의지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인지를, 인간의 수준으로는 구별하기 어렵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어떤 태도로 삶을 바라보아야할까요? 작은 것 하나도 주님의 뜻과 연관지어 생각해야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면 왜 주차공간을 허락해주시지 않는 것일까? 기도를 계속해야겠구나) 아니면 그냥 일상생활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일까요? 주차공간의 생긴 경우에도 그냥 생겼겠거니...하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요?
많은 일들이 인간의 자유의지로 생기는 것인데, 이를 (그 상황에 원인이 없는) 하나님께 해명하라고 요구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럼 반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로 생긴 일을 (그 상황에 원인도 없는) 하나님께 공을 돌리고 감사드리는 건 이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감사는 원인 관계가 맞지 않아도 해도 되는 것일까요?
추가 답변 6.
신자에게 일어나는 일도 자연의 이치에 따른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일상사는 신자에게 완전히 맡겨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기도하고 또 신앙적으로 의심을 갖는 문제의 대부분이 현실고난에 국한 되어 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신앙을 갖는 목적이 현실 고통을 없애는 것에 국한된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예수를 믿고 삼년까지는 기도를 잘 들어주지만 그 다음부터는 잘 응답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대체로 자기노력으로 도무지 해결 안 되는 환난이 생겼기에(현실 고난, 마음의 상처, 인간관계 파손 등 무엇이 되었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나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당신께 기도하는 자를 도와주신다는 확신부터 심어주려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선 기도응답이 잘 되지 않는 것은 신자로 세상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뜻이 현실문제 해결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려는 뜻입니다. 삼년 정도 성경을 통해 예수 십자가 구원 진리를 배우면 믿음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현실적 풍요를 주려고 오신 메시아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심지어 병을 치료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피해 다른 동네에 복음부터 전하러 갔습니다.(막1:35-38)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신자로 세상 앞에 제사장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 죄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평생 고난만 해결 받는 것은 너무 가난한 신앙이며 심지어 그것이 믿음의 전부라고 믿는다면 실은 구원받지 않은 신자일 것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무엇을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 땅에 이뤄져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나와 내가 하는 일과 내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임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가르침이 이어서 따르지만(11절) 당시에는 하루 세끼 해결하는 것이 생업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일용할 양식이 있다면 구태여 현실문제는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불신자들이나 염려하는 일이고 신자더러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인간의 자유의지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인지를 인간의 수준으로는 구별하기 어렵다고 생각이 듭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그럴 수 없고 또 정확이 구별하려 드는 것부터 욥이 저지른 잘못과 같아집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성경에서 배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특별히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주님이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에 평생을 걸어야 합니다. 선교사 목사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십자가 복음을 주변 사람들로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럼 그 일을 잘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받은 재능과 은사를 사용해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면 됩니다.
자기 재량에 맡겨진 일상생활을 위해서도 당연히 기도하고 그 과정과 결과가 어떠하든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재능 은사 자원 여건 모든 것을 그분이 마련해주었습니다. 그 일을 하는 동안에 실수하지 않고 죄에 넘어지지 않고 세상과 마귀의 방해가 없도록 계속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범사에 기도하는 자는 일상적인 일에서도 자기가 기도한 것보다 훨씬 자기에게 유익하고 특별히 믿음이 성숙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방식으로 인도해주셨음을 반드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2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