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가로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들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삼상5:10-12)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첫 싸움에서 패하자 언약궤를 진중에 가져 오면 이길 줄 믿었고 또 블레셋도 그 소식을 듣고는 자기들이 패할 줄 알고 크게 겁을 먹었는데 오히려 사태는 반대로 이스라엘의 패배로 이어진 것입니다. 물론 이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범죄, 특별히 엘리 제사장과 그 두 아들의 패역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작용했습니다. 언약궤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들이 성결한 가운데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생생한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블레셋 진영으로 옮겨진 이후로는 또 다시 사태는 완전히 반전됩니다. 법궤 혼자서 마치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마법상자처럼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고대 민족들은 각기 고유의 신들을 믿었고 전쟁에서 이긴 것은 자기들 신이 상대 민족의 신보다 힘이 센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전쟁에 이기면 상대의 신들(우상 조각)을 탈취해서 자기들 신전에 기념으로 세워둡니다. 자기들 신에 꼼짝 못하고 당했으니 자기들 신의 포로로 세워두어 무력화(無力化) 시키는 셈입니다.
블레셋의 다곤 신당에 옮기워진 첫날밤부터 법궤의 활극(?)이 신나게 펼쳐집니다. 다곤 신이 넘어져 머리와 두 손목이 끊깁니다. 머리도 없어지고 두 팔이 떨어졌으니 그야말로 법궤 대신에 블레셋 사람의 신이 완전히 힘을 잃었습니다. 그 후 독종 재앙으로 블레셋을 심판하므로 아스돗에서 가드로 법궤를 옮겼더니 더 큰 환난으로 쳐서, 다시 에그론으로 보내니 그 일을 익히 알고 있던 주민들이 우리마저 다 죽이려 드느냐 차라리 빨리 이스라엘 지경으로 돌려 보내자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야말로 법궤 자체의 능력이 크게 드러났습니다.
법궤가 이스라엘 안에 있을 때에는 그 군대가 블레셋과 전투를 하니까 직접 나설 필요가 없었고 블레셋 진영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하나도 없으니 스스로 능력을 드러내어야만 했던 것일까요? 그 보다는 비록 법궤 자체가 하나님 당신은 아니지만 실추된 당신의 명예는 하나님 스스로 반드시 바로 잡으려 하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은 “법궤=여호와”로 알았습니다. 이방 민족 안에서도 당신의 영광은 절대 빼앗기지 않기 때문이며 더구나 우상에 불과한 다곤의 포로로 잡혀 있는 모습은 한 시라도 연출할 수 없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되는 모든 경로(삼상5,6장)를 살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힘을 쓴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다시 탈환할 수 있도록 전쟁을 준비하며 승리케 해달라고 간구한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삼상4:22)고 탄식만 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법궤 자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다곤 신당과 독종 재앙의 이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에게 당신의 귀환 방법까지 지시해 주었습니다. 젖을 떼지 아니한 암소 수레에 끌게 해서 과연 그 독종이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로부터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다곤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방 족속들에게도 과연 천하를 주관하는 신이 누구인지를 확연히 보여 주기 위해서 사단 부하들의 생각마저도 다스린 것입니다.
이처럼 법궤의 귀환은 오직 하나님 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전쟁에서 져서 스스로 탈취 당한 것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만약 그 전쟁에 이겼다면 이스라엘이 법궤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으로 믿게 되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다시 찾는 과정을 보십시오. 단순히 마법 상자 같은 그 능력에 주목해선 안 됩니다. 우주 만물을 다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그분이 다곤을 쓰러뜨리고 독종을 일으키고 복술자를 주관하고 암소 마저 움직이는 정도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못할 일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왜 꼭 그런 과정을 거쳤는가 그래서 드러내고자 하는 당신의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 분은 이방 백성 중에는 단 한시도 함께 거주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죄악과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윤리적 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중에 있을 때에 당신의 백성들도 윤리적 죄를 범하기 마찬가지였겠지만 당장 독종으로 치지는 않았습니다. 엘리와 두 아들이 범죄해도 묵묵히 실로의 장막에 거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이스라엘이 당신이 택하고 은혜를 베푸신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단 긍휼과 안타까움과 분노를 삭여가면서 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곁으로 단 한 시라도 빨리 되돌아 오고 싶어서 블레셋 지경에서 그런 활극을 펼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중은 당신의 백성이 실패하거나 죄악 중에 있을 때에 긍휼의 불이 오히려 더 붙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자기들을 떠난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 영광을 더 크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 곁은 절대 떠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 백성이 실패할 때에 더욱 간절한 사랑을 오직 당신의 주권으로 베푸십니다.
인간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것을 두고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빼앗긴 사건에서 보인 반응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실패로 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법궤의 귀환에 이스라엘의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셨듯이, 타락한 인간의 구원에도 인간의 공적은 단 하나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주십니다. 언약괘를 빼앗긴 것이나 선악과를 먹은 것이나 인간의 실패이지 법궤 혹은 하나님 당신의 실패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 가장 잘 드러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에 부응하는 것 뿐입니다. 블레셋 지경으로 옮기워져서는 단 한시도 그곳에 있는 것이 싫으시고 오직 당신의 자녀들 곁으로,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든 말든 당신에 대해 오해하고 있든 말든, 하루 빨리 되돌아 오고 싶어 하는 그 애끓는 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그분이 우리를 향해 갖는 열정과 세기에는 결코 못 미치겠지만 한시라도 그 분 곁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 길 외에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맛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윤리적, 인격적, 종교적 훈련에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데 자칫 그것 자체로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엘리의 두 아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만 가지고 있으면 전쟁에 승리할 것이라고 착각한 잘못을 또 다시 범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신 새 언약은 돌 판 대신 우리 마음에 기록되었고, 돌 판을 담아 둔 언약궤 또한 그 백성의 마음에만 권능을 드러내는 그 십자가의 표상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24/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