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왕상18:37-39)
이스라엘 왕 아합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벌로 3년간 비가 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하는 죄를 더합니다. 이에 엘리야가 단신으로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벌였습니다. 각기 번제물을 단 위에 차려놓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어느 쪽 제물을 태우는가 보기로 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온갖 열심과 치성을 다해 빌었고 나중에는 몸에 자해(自害)를 해 피까지 흘려 바쳤지만 오정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미동(微動)도 응답될 기미도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원래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엘리야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만 아니라, 제물을 쌓은 단과 그 밑에 받친 나무와 흙으로 만든 도랑과 도랑 속에 가득 흐르는 물까지 다 태웠습니다. 그 태우는 모습을 “물을 핥은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길이 혀 같이 날름거리며 도랑의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완전히 증발시켰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인간이 나무에 불을 붙였다면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므로 도랑의 물까지 다 증발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은 이미 섭씨 수만 도의 세기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거나 신자의 일에 간섭하실 때는 반드시 당신 특유의 방법으로 하십니다. 꼭 큰 기적이나 대박이 터지는 모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신자가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전혀 예기치 않고 상상도 못했던 방법과 때에 정말 그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과 사건에 선한 영향력이 발휘되며 특별히 신자에게는 반드시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응답을 두고도 단순히 큰 기적으로 응답하셨다고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가 처음 대결을 벌릴 때부터 기적은 전제되었습니다. 지난 3년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바싹 마른하늘에서 천둥 벼락이 칠 리는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구름이 몰려와 번개가 쳤다든지, 어디선가 조그만 불똥이 날라 와 아주 천천히 태웠다면 자칫 바알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구실을 줍니다. 번개는 일상적 자연현상으로, 작은 불씨는 엘리야의 속임수로 몰아부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랑의 물을 핥는” 모습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됐습니다. 심지어 아합도 찍 소리 한 번 못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다 죽이는데도 곁에서 구경만 하고 전혀 말리지 못했습니다. 참 하나님의 너무나 큰 능력을 보았고 또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대로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백성들도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신자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기적이나 대박이 터지는 방식으로만 응답되길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멜산의 대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것만도 초자연적 기적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것,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간구하여 응답이 되는 것 자체만으로 큰 기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린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대신에 그는 꼭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하셔서 모든 백성으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엄청난 세기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에 주목하지 마시고 바알 선지자들과 아합조차도 일언반구 대꾸도 못했다는 것, 즉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 완전하게 드러났다는 것에 초점을 두셔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의 응답도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의 기도에도 하나님 특유의 선과 영광만이 드러나길 소원해야 합니다. 또 다시 질적 양적으로 좋고 큰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소원하는 바를 크게 부풀려 놓고 그대로 응답되리라 억지로 믿으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의 기도라도 욕심과 교만에 바탕을 둔 잘못된 판단과 계획이 어느 정도 개입될 소지가 있습니다. 신자가 하는 어떤 기도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완전하지 않고 많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미리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소원하고 있는 것과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대로 응답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지기를 더 소원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뢰고 울부짖되 그 간구한 모든 문제에 대한 자기의 집착은 버려야 합니다. 그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키되 일이 되어가는 방향과 모습을 두고도 계속해서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선만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제가 다시 한 번 그 크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며 찬양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모든 기도에 함께 수반되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이 기도가 모든 기도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의 소원과 문제에 대해선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또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우리에게 듣기를 원하시는 기도는 바로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이루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저는 단지 그 영광을 전하는 도구로 삼아 주시옵소서!” 입니다.
지금 엘리야의 기도에서도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입니다. 기적을 보고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돌이키라고 합니다. 나아가 그것도 주께서 그렇게 돌이켜 주신다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화되어 오는 것이며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경과를 본 아합은 끝까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곧 이어 3년간의 가뭄이 그치고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으며 그 속을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엘리야가 마차보다 더 빨리 앞장서 달리는 것을 보고도 그랬습니다. 나아가 현장에서 입술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 고백한 백성들 중에 과연 마음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믿은 자가 얼마였는지도 의문입니다.
이 대결을 시작할 때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엘리야는 엄중하게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왕상18:21)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고 또 주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도 초자연적인 신비한 현상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입니다. 주를 마음으로 믿게 된 자는 주만 온전히 좇습니다. 절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지 않습니다. 간혹 시험과 죄악에 빠질 때도 있지만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것도 입술로만 하는 회개가 아니라 행동으로 주를 좇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갈멜산 엘리야의 기도는 반만 응답이 되고 반은 응답이 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로 여호와는 큰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그들이 마음으로 완전히 돌이키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거나 그렇게 하실 뜻이 없어서가 절대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큰 기적으로 자신의 삶만 풍요롭게 되길 원하는 뿌리 깊은 죄악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오늘날의 신자도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야단을 맞아 쌉니다.
혹시 여러분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 줄은 알지만 마음으로는 완전히 돌이키지 않은 것은 아닌지요? 다른 말로 하면 아직도 내 기도의 제목의 질과 양만 불리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비전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세상과 그분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지는 않습니까?
4/25/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