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종을 위하여 집을 세우실 것을 이미 듣게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주 앞에서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주의 종에게 허락하시고 이제 주께서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대상17:25-27)
부르스 윌킨슨이 지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4:10)를 주석한 간단한 내용의 책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신자가 담대하게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복주의 사상을 고취한다는 반론도 심심찮았지만 기도의 능력을 강조해 신자들더러 더욱 기도에 힘쓰도록 만든 유익은 분명 있었습니다.
기도의 가장 일차적이고도 근본적인 내용은 야베스의 것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많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온갖 환난과 근심이 끊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해결해 주시고 복을 더해서 지경을 넓혀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그 수준에만 머물러 있으면 자칫 하나님은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거인이요, 기도는 그 램프를 문지르며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아집니다.
야베스의 기도에 대비해 본문의 다윗의 기도는 참으로 음미할 만한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갖고 성전을 짓겠다고 나섰지만 정작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오히려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찌라”(17:10)고 하셨습니다. 대신에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짓고 또 그 후손의 위를 영영히 견고케 해주시겠다는 언약으로 축복해주었습니다. 본문은 그 언약을 들은 다윗이 드린 감사 기도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엄청난 환난을 앞두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환난을 무조건 없애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즉 그 잔이 하나님이 나를 향한 뜻과 계획이라면 환난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기도의 주 내용이자 결론이었습니다.
나아가 성경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가진 소원도 하나님이 심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원이든 다 하나님께 빌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한 소원이 따로 있는데 그것을 신자가 알 수 있도록 해 주시며 또 그것을 기도하면 행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들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후손에게까지 미치는 영원한 계획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윗의 일생이 그가 원하고 계획했던 대로 진행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의 일생도 전부 하나님의 주권 하에 행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계획을 들어 본 후에 그동안 너는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느라 너무 수고했으니 인생 말년을 편히 쉬고 아들에게 그 수고를 맡길 것이라고 그의 계획을 수정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후로는 성막에 계시면서 백성과 더불어 행하는 곳마다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성전이 없었더라도 한 번도 자기 백성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따진 적도 없다고 합니다. 당신께서 사방 대적을 다 물리쳐 주시고 한 곳을 정하여 자기 백성을 심어 준 후에 성막 대신에 성전을 짓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성전 건축에 관한 구체적인 일정표까지 이미 다 당신께서 마련해 두셨던 것입니다. 요컨대 다윗에게 그런 소원을 심어주고 또 그 소원이 이뤄져 나가도록 행하신 이도 바로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간사는 내용적으로는 하나님 당신의 전적 주권으로 진행시켜 가지만 표면적으로는 사람이 소원한 것을 최선을 다해 해 가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모습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기도라는 통로로만 수행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인간이 책임지고 대신 이루겠다는 헌신이자 또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면 신자는 기도에 등한해집니다. 그 반대로 기도의 능력만 강조하면 신자는 기도 만능주의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의 책임이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 너희가 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집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동기, 목적, 내용의 일차적인 출발이 신자 쪽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이 들려주신 계획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먼저 묻는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합니다. 무조건 기도한대로 다 이뤄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뜻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신자가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 인간사를 이뤄나가며 신자를 당신을 대신해 역사를 바꾸는 주인공으로 삼으셨는데 당신의 뜻을 들려주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기도할 수는 없기에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일정표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그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에 대해선 확실하게 물어 봐야 합니다. 또 그것을 알고 나면 더 이상 기도 응답에 관해선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히 언젠가는 당신의 뜻대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어주실 텐데 안절부절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소원대로만 기도해 놓고 “언제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에만 신경을 씁니다.
지금 다윗은 어떤 말로 기도를 끝맺었습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하겠다는 간구에 대해 하나님은 그것은 아들이 할 것이며 또 다윗에 대한 언급보다는 후손들의 위가 영영히 견고케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 다윗이 기도한 것은 이뤄지지 않았고 대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약속대로 이뤄질 테니까 지금부터 그 복을 영원히 누리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참된 기도이며 완전한 기도입니까?
신자는 야베스의 기도를 할 수 있으며 때로는 지경이 넓어지는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만으로는 신자의 일생에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결코 다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 계획과는 전혀 엉뚱한 것을 붙들고 기도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 정작 기도도 하나님이 시켜야만 할 수 있고 또 그분이 시키는 기도를 해야만 완벽하게 응답되기 때문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기도를 마칠 때마다 “하나님이 이런저런 복을 주실 것을 이미 저에게 듣게 하셨으므로 저는 그 복들을 영원히 누리겠나이다”라는 말로 마칠 수 있다면 우리의 삶과 일생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너무나 신나지 않습니까?
5/6/2006
하나님께서 저를 통하여 이루어 가실 수많은 계획과 주님의 뜻이 나타날 결과들을 생각하면 마냥 신나고 감사합니다.
오직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만이 나타나고 하나님만 드러나시길 소원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