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18-20)
프로이드와 함께 현대 심리학의 양대 거두이며 분석심리학파를 창시한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의 의지를 뛰어 넘는 것이 두 개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인간 외부의 세계와 인간 내면에서 솟는 것이 그것인데 그의 분석은 너무나 정확했습니다.
지진, 태풍, 가뭄, 홍수 같은 자연 재앙 뿐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 동식물과 산과 들과 바다 등은 인간 의지로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해와 달과 그 수많은 별들과 광대한 우주를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그것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범위는 너무나 미약합니다. 어쩌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모래알 한 움큼을 들어 올리는 것, 아니 기껏 한 개를 집는 정도밖에 안 될 것입니다.
또 우리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솟구치는 온갖 감정과 생각의 소용돌이를 가만히 따져 보십시오. 도무지 일관된 경향이나 방향이 없으며 우리의 그 얄팍한 양심으로 판단해 보아도 선하고 의로운 생각보다는 악하고 죄악 된 것과 온갖 미혹과 몽상들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럭비공처럼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도무지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너무 싫어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융 자신도 인간의 내면을 1)무의식의 밑바닥에 있는 어둠의 세계로 우리 생각이 닿지 않는 '자기'(self)와, 2)의식과 분별을 할 수 있는 '자아'(ego)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자아는 자기와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아서 인간의 삶은 결국 바다 위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천 마일 깊이를 가진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의식하는 우리는 진짜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융의 지적과 본문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표현만 다르지 인간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 두 가지를 지적했다는 면에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융은 문제만 지적한 것으로 그쳤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해법을 인간 안에서 찾는 자가당착을 범했습니다. 인간 의지로 통제를 전혀 못하면 그 해결책은 결국 인간 밖에서 찾아야 함에도 그는 오히려 인간 내부로 더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자아가 자기를 찾음으로써 자아실현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그 방법, 즉 의식이 무의식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는 꿈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꿈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숙제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변한 셈이며 실제로 그는 꿈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성경은 아무리 무식한 자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알만한 계시를 인간의 마음과 자연에 이미 내포시켜 놓았다고 선언합니다. 융의 지적대로 인간 마음의 움직임과 자연의 섭리를 보면 인간 의지로 도저히 통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인간 밖의 어떤 절대적 존재가 그것들을 주관하고 있다”라는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이 당면한 가장 근본적인 두 문제의 해결책이 무엇이 됩니까? 오직 하나님입니다.
융은 스위스 정신과 의사로 일종의 천재였고 현대 심리학에 남긴 업적은 대단했습니다. 그런 자가 성경이 어떤 자라도 쉽게 알 수 있다는 하나님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롬1;22,23), 즉 자신의 인간적 총명함과 맞바꾸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그의 발치도 못 따라갑니다. 솔직히 자연과 인간을 보고서 하나님을 발견하기는커녕 인간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근본적 문제라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나와 내 식구들이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사나에만 관심이 있었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일을 추구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 앞에 무릎 꿇게 되었습니까?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도 그 구체적 과정은 잘 모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주는 것 하나 없이 싫고 밉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아무 조건 없이 좋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융의 표현대로 하자면 어둡던 무의식의 세계가 어느 날 밝아진 것입니다. 자아가 자기를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하나님의 빛이 가득 차서 자아가 평안해진 것입니다. 혼란스럽고 갈급하며 허망했던 내면에 참 자유가 깃든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한 결 같이 꿈꾸는 자아실현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우리 영혼이 새롭게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지로 통제가 안 되는 내부가 하나님으로 인해 깨끗하게 정리가 되자 외부의 통제가 안 되는 것들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해와 달이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달아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에게는 해와 달도 나 하나보다 덜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환언하면 모든 인류가 전 역사를 통해 풀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 두 개를 절대자의 은총으로 순식간에 해결 받은 셈입니다. 융 같은 천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둔치가 말입니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의 강림이 없었다면 우리 또한 아직도 이 두 문제에 매달려 씨름하고 어쩌면 꿈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그 크신 구원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까? 나아가 인류의 근본적 문제의 해결책이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뿐임을 확신합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졌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이전 불신자 시절처럼 참 자기를 찾으며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헤매고 있습니까?
인간이 스스로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꿈이 그 해결책이 될 것이며 훨씬 작은 자아가 그와 비교도 안 되도록 큰 자기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불신자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해결하려고 덤비니 평생토록 인생의 헛됨을 탓하다가 무(無)라고 신음하며 죽는 운명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자아가 완전히 실현된 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에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단지 우리의 자유함을 방해하는 대적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기만 하면 됩니다. 이 권세를 발휘해서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까?
5/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