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활과 살들을 취하소서 활과 살들을 취하매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취소서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왕하13:15-19)
엘리사가 죽기 직전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하나님이 아람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유언으로 받는 장면입니다. 활과 살은 당연히 대적을 막을 수단이며 동편 창을 열고 쏘라는 것은 아람 쪽을 향해 당당하게 대적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또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한 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아람을 물리칠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살을 들고 땅을 치라고 했습니다. 화살로 땅을 향해 쏘는 것이 아니라 살만 들고 땅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살을 쏜 것은 아람을 향한 선전포고였다면 살로 땅을 친 것은 그들을 완전히 파할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말로만 해도 될 유언을 구태여 이렇게 소도구를 사용해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그 예언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나아가 왕이 직접 행하게 한 것은 지도자가 먼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세 번을 쳤더니 많이 치지 않았다고 꾸중을 하고 또 아람을 진멸치 못하고 왕이 친 횟수대로 세 번만 승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왕더러 살을 가능한 많이 치라든지, 최소한 오륙 번은 치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치라고 했습니다. 왕으로서 세 번을 친 것은 어쩌면 많이 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 많이 치면 칠수록 승리가 그만큼 보장된다는 의미였을까요? 다른 말로 하면 신자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헌신하고 순종하느냐에 따라 받는 은혜와 권능도 그에 정비례해 늘어납니까? 물론 원칙적으로 맞지만 자칫 그렇게 단순하게만 이해하면 신자의 기도가 주문 수준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예컨대 특별 작정 새벽 기도 40일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울부짖으면 응답 안 될 일이 없다는 식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40일간 기도했다는 형식이 응답의 근거가 됩니다. 알리바바가 도적과 한패도 아니면서 “열려라 참깨”만 해도 동굴이 열리듯 형식만 갖추면 응답이 되는 것은 주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치성과 열심을 아무리 많이 바쳐도 그 중심이 따라오지 않으면 응답하지 않습니다. 진심이 열심을 낳는 것이지 열심을 내었다고 진심이 생기는 법은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엘리사가 사실 문제 삼은 것은 왕이 땅을 친 회수가 아니라 왕의 중심이었습니다. 왕이 활을 쏠 때는 성경은 분명히 “곧 손으로 잡으매” 또 “곧 쏘매”라고 그 동작이 아주 신속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을 칠 때는 “곧”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졌습니다. “곧”이란 확신에 차서 진심으로 순종하기에 신속하게 행동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곧”이 없는 행동은 느릿느릿 마지못해 한 행동입니다. 확신 대신에 의심이나 불만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엘리사는 왕의 태도를 보고 그 중심을 읽은 것입니다. 확신에 차서 땅을 치면 자기도 모르게 오륙 번 정도는 순식간에(“곧”) 치게 되는데 그러지 못해 주저하다보니 세 번 밖에 치지 않았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방금까지 가졌던 그 확신이 어디 갔는가라고 따진 것입니다.
요아스 왕이 왜 그랬을까요? 우선 자신의 체면을 생각한 것입니다. 왕이 활을 쏘는 것은 상식적으로 얼마든지 멋있고 그 품위에 합당하지만 활도 아니고 살을 들고 땅을 치는 것은 아무래도 궁색한 모습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보통 전투에 대한 결의를 다질 때에나 어떤 위급한 일이 닥칠 때에는 만백성이 쳐다보는 성루 위에 서서 왕이 맨 손으로 멋지게 살을 부러뜨리지 않습니까?
왕으로선 지금 엘리사가 시키는 그 행동이 못마땅했습니다. 살은 쏘라고 있는 것이지 땅을 치라고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땅을 치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아마 동쪽 창을 향해 왕이 원하는 대로 쏘라고 했다면 열 번이라도, 그것도 순식간에 쏘았을지 모릅니다. 마음에 의심과 불만이 가득 찬 왕으로선 세 번도 많이 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즉각적인 순종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열정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정은 그분에 대한 온전한 확신에서 나옵니다. 지금 요아스의 경우 왕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하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생긴 불만과 의심이 확신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왕의 체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면서 엘리사에게 나가 내 아버지라고 두 번이나 간절히 불렀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칭송했던 열정이 식어버렸습니다.
열심과 치성을 의지적으로 동원한다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위의 모든 권세로 그 자녀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의 자녀에게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만유의 왕이신 주님이 사람의 형체 그것도 비천한 죄수의 자리에까지 내려온 것은 스스로 당신의 모든 것을 먼저 벗어버렸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분 앞에 나아갈 때는 모든 것, 특별히 자존심과 체면을 벗어버리지 않고는 절대로 그분의 모든 것을 받지 못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때때로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여건 속에 우리를 밀어 넣으시고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을 시킵니다.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그 중심을 보고서 당신에 대한 우리 열정의 크기를 재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못 믿거나 심중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의심이 생기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일수록 믿음으로 통과해 당신의 은혜를 맛보아야만 우리의 확신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향한 우리의 열정을 더 뜨겁게 달구어 당신께서 예비해 놓은 은혜와 권능을 우리더러 양껏 찾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그분의 열정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신자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끊거나 줄일 수 없습니다. 신자 스스로의 자존심과 의심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 살을 들고 땅을 오륙 번 “곧” 쳐야 할 때임에도 마지못해 한두 번만 치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중심을 과연 우리의 기대나 착각같이 모를 수 있을까요?
4/30/2006
언제 어디서든 어떠한 일에서도 아직 순전히 순종치 못하고 주저, 망설이는 자신을 볼때면 그 직후 곧바로 스스로에 대해 개탄스러움이 밀려옵니다. 허나 또 곧이어 주님께서 예비하신 진실된 은혜와 선으로 이끄심을 바로 깨우쳐 주시어 이에 순종할 수 있도록 저를 사랑해 주심에 감사와 찬양 드립니다. 이젠 진실로 제자신을 못믿으며 언제나 오직 선하시며 의로우신 주님만을 믿고 의지합니다. 늘 함께 저와 동행해 주옵시고 온전히 늘 순종케 저를 이끌어 주옵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