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2:1-10) 베드로 인생 최고의 날

조회 수 1335 추천 수 123 2006.04.24 19: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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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며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행12:1-10)



중국 지하 교회의 지도자 윈형제의 간증집 “하늘에 속한 사람”이란 책에 보면 본문과 똑 같은 경우가 나옵니다. 중국 공산당의 감옥에 갇혀 물도 안 마시는 수십일 간의 금식 끝에 다 죽어가던 어느 날 기적 같은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일어나 걸어 나가라는 성령의 말씀에 따라 간수와 죄수들이 잔뜩 있는 복도와 마당을 거쳐 감옥 담장 밖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철문들이 이미 다 열려있고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본문의 경우도 간수들은 아무도 자기들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쇠문이 절로 열리는데도 그 소리마저 듣지 못했습니다. 당나귀의 입을 열어 사람의 말을 하게 하거나 게하시의 눈을 열어 불 병거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이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권능으로 당신의 자녀를 보호 인도하시며 그 모든 일에 선하게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두 경우 다 어렸을 때 누구나 꿈꿔봤던 일종의 투명인간이 된 셈입니다. 만약 우리가 투명 인간이 되어 철통같은 감시망을 총칼 하나의 제지도 없이 유유자적하게 빠져 나왔다면 얼마나 신나고 즐거웠겠습니까? 마치 자기가 슈퍼맨이나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베드로가 정말로 기뻐했던 순간은 탈옥한 후가 아니라 그 전 감옥에 갇혀 있었던 때인 것 같습니다.

헤롯왕이 야고보를 죽인 후 유대인들의 환심을 더 크게 사려고 예수 믿는 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베드로를 잡아다 처형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겹쳐 죽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도 유월절을 피하기 위해 밤새도록 재판을 한 후 급하게 그 전날에 처형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베드로는 자기 스승이자 주님이 가셨던 길을 똑 같이 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전후 형편이 같았습니다. 그 전후 사정을 알게 된 그로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당연히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우선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스승의 말씀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의분에 차서 말렸을 때 오히려 사단이라고 야단맞은 일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로마를 물리쳐 유대를 해방시킬 수도 있는데 왜 주님이 억울하게 죽는다는 말인가? 그 일을 말린 나더러 왜 도리어 사단이라고 야단치는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던 베드로가 이제 주님과 같이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했습니다. 또 죄악에 묶여 있던 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 구원은 대제사장 하속의 귀를 칼로 친다고 결코 일어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은혜로만 얻을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묵묵히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신 스승이 자기가 고백한대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정의의 사자인양 로마에게 억울하게 당한 것을 바로 잡자고 설쳤던 자기는 사단을 좇았던 것임을 이제 진심으로 수긍하게 됐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수치와 죄를 부활하신 주님은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똑 같이 세 번을 다짐시키며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이제 자기도 주님처럼 죽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번 주의 사자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탈옥을 경험했습니다.(행 11:19) 그래서 이번에도 하나님의 기적이 으레 일어나리라 기대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천사가 와서 아무 탈 없이 옥에서 꺼내주고 있는데도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처음 한 번은 기적으로 구원해 주셨지만 이번에는 꼼짝 없이 죽나보다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첫 기적 때에도 그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행5:41)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전하다 핍박만 받아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과 똑 같은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헤롯이 유대인들 즉 대제사장을 비롯한 관원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환심을 더 크게 사기 위해 베드로를 죽일 예정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교의 우두머리 격인 베드로만 없애면 이 골치 아픈 종교의 교세가 꺾이리라 짐작했는지 모릅니다.

말하자면 헤롯이 베드로를 예수님과 동격으로 취급했으니 그 당사자로선 얼마나 몸 둘 바를 모르며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유월절을 피해서 처형을 하겠다고 하니 더더욱 주님에 대한 회상이 꼬리를 물었을 것입니다. 전도하다 핍박을 받아도 기뻤는데, 주님 가시는 길을 같이 가게 되었으면 더욱 기뻤을 것이며, 심지어 자기가 주님처럼 취급당하고 있으니 그 감격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부활의 주님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40일간 같이 있었습니다. 또 성령의 은사로 담대한 복음의 사자가 되어 주님과 똑 같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그로선 눈앞에 닥친 죽음이 두려웠겠습니까? 이제 곧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될 터인데, 그래서 주님에게 온갖 이야기를 할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신나고 설레었겠습니까?

“주님이 저더러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고 했고 또 대제사장 하속의 귀를 칼로 쳤을 때 칭찬은커녕 오히려 검을 집어넣으라고 해 너무 섭섭했는데 이제야 그 뜻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을 데려 갈 것이라고 하신 말씀, 귀신이 도망가는 것보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을 볼 수 있다는 말씀, 수도 없이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이적을 보고도 제대로 알지 못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너무나 억울했던 십자가 죽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저도 주님 가신 그 길을 가게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특별히 주님을 만나면 “부활하신 후 주님이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제가 입술로는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때도 솔직히 완전하게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아무 말 안 해도 제가 주님을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다 알고 계시지요?”라는 말을 맨 처음 해야지 다짐 하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졸지에 먼저 죽은 자식을 이제 곧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이 뛰며 설레겠습니까? 물론 죽음이 가져올 육신적 고통과 아직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베드로에게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기 몸에서 낳은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그만큼 주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하고도 깊은 감정의 교통을 나눈 자는 없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지금 주님과 같은 영광을 자리를 차지해 있고 곧 주님을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흥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탈출 전야는 베드로 생애 최고의 기쁜 날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봅니다. 주님을 다시 만날 기대에 설레입니까? 그래서 주님과 나눌 이야기 거리가 많이 있습니까? 주님 가신 길을 똑같이 걸어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하게 쓰임 받는 것으로 기뻐합니까? 아니 최소한 그렇게 소원이라도 하고 있습니까?

신자에게 세상의 핍박과 환난이 닥칠수록 주님의 능력은 오히려 더 크게 드러납니다. 누구라도 윈형제나 베드로 같은 기적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주님 가시는 길을 뒤 따라가고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아니 그 길을 가기를 기꺼이 원하기만 해도 세상과 죄악과 사단은 신자를 절대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실제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면 매일이 생애 최고의 날입니다. 날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에겐 생애 최고의 날이 어제나 내일이나 먼 장래 부활의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비록 감옥에 갇혀 도저히 살아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신자를 그 감옥에서 반드시 건져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 가시는 길을 신자가 기꺼이 따라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애 최고의 날은 과연 언제입니까?

4/24/2006


날마다순종

2020.10.09 15:21:43
*.14.99.253

혹 갈지자로 또는 느릿하고 가는중에 넘어지더라도 바로 앞에 계셔 언제나 손내미시고 계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그 가신 길 따라 꼭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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