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압이 암몬 자손의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매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이제 왕은 남은 군사를 모아 진치고 이 성을 쳐서 취하소서 내가 이 성을 취하면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 하나이다”(삼하12:26-28)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이 있어 도움을 받는 것을 두고 “인복(人福)이 많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다윗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이 물려받아야 할 왕위를 차지할 경쟁자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우정의 언약을 맺은 요나단은 두말할 것도 없고, 전쟁 중에 일종의 포상 휴가를 받은 우리야도 끝까지 군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고 주군을 위해 충성을 바치다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나단 같은 훌륭한 선지자의 깨우침을 수시로 받았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에도 심복 부하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이 그와 함께 고된 피난길을 함께 떠나는 등, 그의 일생은 인복이 흘러넘쳤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군장 요압도 주군을 위한 충성이 대단했습니다. 이제 곧 함락될 적군의 성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이름이 높아질까 두려우니 왕이 와서 빨리 승전의 영광을 차지하시라고 요청했습니다. 전쟁은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잠시라도 빈틈을 보이면 반격 내지 도주의 찬스를 허용하는데도 그랬습니다. 이야말로 인복을 누린 전형적 사건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그런 인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22:1,2) 다윗의 부하들은 모두 가난하고 빚지고 원통하며 환난을 당한 자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와 동일하게 어려운 자들과 그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도움은 나중에 그만큼 보상하면 끝이므로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것으로까지 이끌지는 못하며 심지어 도움을 원수로 갚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다윗도 부하들이 그간 받은 도움을 원수로 갚으려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거주하던 시글락이 아말렉에 함락되고 처자식을 다 빼앗겼을 때에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려”(삼상30:6)했습니다. 크게 군급해진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무 손해 없이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고 오히려 더 크게 탈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부하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는 다윗이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삼상30:20)고 그 공로를 주군에게 돌렸습니다.
다윗은 부하들에게 단지 선을 베푼 것이 아니라 모든 어려움을 함께 겪었고 이처럼 갈등과 다툼의 과정도 거쳤습니다. 나아가 수많은 전쟁터에서 함께 싸웠었습니다. 말하자면 다윗과 부하들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사이였습니다. 시글락 사건 이후 요압을 비롯 그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고 모든 공로와 영광을 주군에게 당연히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죽기 직전 솔로몬에게 요압을 처치하라고 유언을 내립니다. 물론 요압의 결정적 잘못도 있었고, 그 포악하고 독선적인 기질로 인해 솔로몬의 왕정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요압같은 인물은 다윗의 난세에는 도움이 되지만 솔로몬의 평화 시대에는 무용지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일등공신을 죽인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야 때와 같이 자기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아들을 살인에 가담시켰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완벽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평생을 두고 그러하며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다 겪은 말년에 가서도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죄의 질과 양에도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좀 덜 악해지거나 조금 더 선해지는 모습을 보이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영혼은 럭비공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튀고 구릅니다. 인간이 그 선악에 관계없이 구원 받을 길이라고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게 인복이 많다고 해서 그 인복으로 인해 본인의 심령과 존재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복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부쳐주신 사람”과의 사이에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반드시 이 두 조건이 동시에 만족해야만 합니다.
요압은 하나님이 부쳐준 사람은 맞지만 다윗과 요압 둘 다 하나님의 뜻을 위반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야의 경우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윗 스스로 시험에 빠졌습니다. 아마 다윗 평생에 받은 그 수많은 인복 중에 성공적이었던 것은 요나단과 아비가일 정도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도 절반의 축복이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이 부쳐준 사람은 맞지만 요나단은 아비 사울이, 아비가일의 경우는 남편 나발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못해 각기 심판을 받았고 요나단마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갈 때에 과연 완전한 인복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아무리 인격이 고매하고 아는 것이 많은 자라도 일시적으로 영향을 받고 특정한 일에 도움은 될지언정 우리 존재와 인생 자체를 변화 시키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인간관계를 변함없이 이어가지 못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복을 줄 수 없기에 인간은 인간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신자는 인복을 부러워하거나 쌓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생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을 쳐다보면 안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때마다 인복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 다윗 같은 복이 절실한 자입니다. 다윗 같은 복이 절실하다면 그 복을 누리는 방법은 그처럼 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삶에 요나단, 아비가일, 나단, 우리야 같은 자만 부쳐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울, 요압, 골리앗, 압살롬, 나발, 시므이 같은 자들을 훨씬 더 자주 만나게 합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이 부쳐주신 사람이 결코 성도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에 함께 모여 박수치고 찬양 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것은 환난과 죄가 두려워 도망치는 중일 수 있습니다.
물론 대적을 피해 아둘람 굴로 피신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도 주위의 환난을 당하는 자를 우리가 고난 중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위로로 섬겨야 합니다. 또 그 와중에도 간혹 서로 시기하고 다툴 수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 스스로 유혹에 넘어가거나 범죄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다윗처럼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아야 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주는 나의 목자시며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사람을 통해 복을 받으려면 실패 밖에 없습니다. 불완전한 죄인에게선 완전한 것이 절대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사람을 통해 복을 받으려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소원해야합니다. 그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며 사람은 단지 그 복을 통과시키는 경로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서로 간에 통과시키는 경로로 지음 받았는데, 불신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반면에 신자는 그 사실을 깨달아 그렇게 쓰임 받고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은 거룩하고 완전해서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자기 주위 사람과 나누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자연적으로 인복이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의 빚을 주고받은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인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안에서 나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주님의 십자가 긍휼을 함께 맛보고 있습니까? 이길 외에 참 인복을 받고 인생을 진정으로 승리하는 길은 결코 없습니다.
4/15/2006
늘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주위와 나누는 복의 통로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주옵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