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조회 수 38 추천 수 0 2018.11.09 14:29:24

(레17:11) 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구약성경강해(6) / 레위기강해(6)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죄가 붉은가 검은가?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행할 사역을 1:18에서 이렇게 밝혀 놓았습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의 본질과 죄가 만들어 내는 결과는 일반적으로 더럽고 추악하다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대체로 죄는 시커멓다고 표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붉다고 묘사했는데 이처럼 죄를 붉다고 묘사하는 것은 성경이 유일합니다. 그 근거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피가 죄를 속하는데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죽음만이 우리의 죄 값을 갚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검은 것을 희게 해준다고 했다면 죄 자체만, 정확히 말해 죄가 만들어내 폐해와 오염만 제거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일반인들과 다른 모든 종교가 죄를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죄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인이 만들어낸 결과만 바로 잡을 뿐입니다.

 

반면에 성경이 붉은 죄를 희게 한다는 것은 시커먼 죄들을 범한 죄인들을 완전히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방식으로 구원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아가 행할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차 메시아가 행할 사역이라고 해서 새롭게 시행되는 구원의 방식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신약시대와 달랐거나 부족해서 예수님을 보내어 새롭고도 완전한 방식으로 구원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 탓이며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민족 문화 인종 종교를 넘어서 온 세대 온 세상에 오직 한분입니다. 신약이나 구약이나 시대 구분 없이 동일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 구원의 방식도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오직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셔서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몰랐습니다. 또 그 사건에 계시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믿은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꼭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 이유와 그 십자가 구원이 성립되는 근거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절대적 기준이므로 구약시대 사람도 본문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앞에 항복하는 자라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바꿔 말해 죽었다 살아나는 방식의 구원이기에 단순히 성경에 진술된 교리에 납득 동의하는 차원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 받았고 또 그 바탕에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당신보다 약 이천 년 전의 사람임에도 당신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했다고 즉, 소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내 때를 보고 기뻐했다고 즉, 당신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선언했습니다.(요8:56)

 

아브라함이 구원 얻은 경과를 설명하자면 길지만 간단히 하나만 들겠습니다. 마누라를 두 번이나 자기 혼자만 살려고 팔아넘겼습니다. 아내를 두 번이나 살인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살인 죄인까지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럼 그의 진심어린 회개가 있었다는 뜻이므로 그는 분명히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그랬다면 그 후손들의 믿음도 그래야 즉,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어야 함도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출애굽 후에 광야를 방황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그보다 약 오백 년 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주셨는데 그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선언합니다.(고전10:4) 들어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광야로 인도해놓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는 예수 믿어 구원 얻었다는 것입니다.

 

아담도 예수 믿어 구원 얻었다.

 

더 주목할 것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도 정작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깰 것이라는 십자가 복음의 약속을 처음으로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이 직접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혔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스스로 지어 입은 나뭇잎 옷만으로는 앞으로 낙원에서 쫓겨 나와서 겪어야 할 광야 같은 인생의 고난들을 이길 수 없기에 그들을 튼튼한 옷으로 보호해준다는 차원만이 아닙니다. 가죽 옷을 지으려면 짐승을 잡아야만 합니다. 성경기록은 없어도 어린 양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아담과 이브는 생전 처음으로 죽음을, 또 피를, 나아가 피가 붉다는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그 붉은 피를 보는 순간 저절로 심령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며 또 감정이 갑자기 격동하며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전까지의 에덴동산에는 각종 생물이 아름답게 성장하고 열매가 풍성히 열리는 모습뿐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도 서로 벌거벗었으나 하나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순수하게 사랑했기에 하루하루의 삶에 기쁨과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린 양을 죽이자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고 몇 번 몸을 부르르 떨더니 호흡이 끊기고 돌처럼 굳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피조물 중에 가장 아름답고 총명하고 고귀하게 인간을 만드시고 먹고 마실 것이 전혀 부족하지 않는 낙원에 살게 했습니다. 대신에 딱 하나만 당부했습니다. 동산의 과일은 전부 다 맘껏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사탄의 꾐에 빠졌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인간들이 당신처럼 되는 것을 시기하여 못 먹게 했으니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그들을 속였습니다. 그들은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도 무시하고 “하나님이 무슨 필요 있어!” 하며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지금까지 동산을 자기들 스스로 잘 관리해왔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동산은 물론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은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신이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었으나 먹자마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신적인 능력이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힘이 다 빠지고 기쁨과 만족은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갑자기 서로 쳐다보기가 부끄러워졌고 까닭모를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뭇잎을 따서 옷을 지어 몸을 겨우 가리고선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숲속 깊숙이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땅 끝까지 간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또 당신께서 지으신 최초 인간들을 하나님이 그대로 버려둘 리도 없습니다. 그들을 찾아와서 어린 양을 죽였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이미 정신적 영적으로 완전한 절망에 처해 죽음의 나락에 떨어져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어린 양이 실제로 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경고하신 말씀의 뜻이 즉, 죽음이 육체적 생명까지 완전히 종료시키는 것임을 비로소 생생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우리가 저렇게 죽었어야 함에도 하나님이 양을 대신 죽이시고 우리를 살려 주셨다는 사실까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숨어 있던 자기들을 먼저 찾아와서 부르신 말씀도 무슨 뜻이지 정확하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 네가 어디 있느냐?”(창3:9)며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고 꾸중하지도 묻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 물었을 리는 없습니다. 이미 숨어 있는 곳까지 찾아오셨지 않습니까?

 

그 말에 담긴 하나님의 진심은 “아담아 네가 지금 나를 피한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부끄러워지고 무서워진다. 나를 떠나 숨은 그곳은 절대로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무슨 짓을 했던 심지어 살인죄를 범했어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내 품으로 돌아오라. 그럼 이전의 사랑이 충만했던 관계로 되돌려서 너희 삶에 기쁨이 넘치도록 해주겠다.”였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진정으로 항복했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이 어린 양을 대신 죽여서 그 피로 그들을 용서해주었습니다. 결국 아담과 이브도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레위기 오늘 본문의 의미가 그들의 구원에 실현된 것입니다.

 

왜 피가 하필 주홍(朱紅)색인가?

 

피가 왜 하필 주홍색일까요? 또 붉은 색을 보면 왜 모든 사람에게 저절로 강렬한 인상이 새겨지고 감정이 격동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순전히 가정이지만 피가 만약 흰 색이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컨대 야채를 씻으며 칼에 살짝 베여서 피가 흘러내려도 크게 아프지 않으니까 손에 묻은 물인 줄 알 것입니다. 피가 생명에 있으니까 모든 색 중에 가장 눈에 잘 띄는 붉은 색으로 만들어서 혹시라도 피를 흘리는 경우가 생기면 어서 빨리 지혈(止血)시키라는 하나님의 경고이자 배려입니다.

 

이처럼 누구나 붉은 피를 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폭행이나 살인을 절대로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아주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인간끼리는 전쟁을 치르지 말고 오직 서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그 붉은 색이 정반대의 역할도 하게 되었습니다. 붉은 피를 보는 순간 감정이 극도로 흥분되고 사람을 격동시켜서 과격한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피가 두렵기만 했다면 인류 역사에 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가히 전쟁의 역사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누구나 전쟁에 나가면 두렵지만 아군이 피를 쏟는 것을 보면 말 그대로 눈이 뒤집어지고 적군을 무참히 죽이게 됩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후예였던 라멕이 살인을 밥 먹듯이 자행한 인류 최초의 사이코패스가 된 것이 그 확실한 증거입니다.

 

결국 피를 붉게 만든 하나님의 뜻은 둘입니다. 사람들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려는 것과 반대로 감정이 격발되어서 생명을 경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서나 사람들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둘만 놓아두신다는 뜻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한 쪽은 분홍 카펫이 깔린 길이고 다른 쪽은 가시덤불이 무성한 자갈길 둘로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라도 그 선택에 어려운 점이 없습니다. 또 믿음도 기도도 전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피를 붉은 색이나 흰 색 중에 어느 색으로 만들지 인간더러 선택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주권으로 붉은 색으로 만드시고 대신에 그 안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모든 인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쪽의 입장에선 현재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딪혀서 싸워나갈 여건과 사건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에 대한 완전한 계획을 갖고 내 인생을 이끌고 계신다는 확신에 따라 그 싸움을 행하면 생명의 길이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존재하지도 않기에 그분을 거역하며 오직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행하면 죽음의 길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그 범죄 행동에 대한 형벌로 사형을 선고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에덴동산 즉, 이 세상과 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 따로 있으므로 절대로 그 엄연한 사실을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는 순간 수치와 두려움만 생기고 무슨 일을 해도 갈급하고 허망해질 뿐인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동산 모든 과일을 다 따먹어도 되지만 즉, 인간끼리의 다툼에서 혹시 폭행 심지어 살인을 해서 피를 흘리고 그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품으로 진정으로 겸손히 회개하고 돌아오면 생명이 살아나고 기쁨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메시아가 와서 희게 해준다고 예언하기 바로 앞의 구절 1:15에선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라멕 같은 사이코패스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들의 재판에서 공의는 실종되어서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이 수탈당했습니다. 율법의 규정, 그것도 인간들이 만든 사소한 종교적 계명을 위반했다고 지옥에 갈 자라고 말로 저주하고 유대 사회에서 추방했습니다. 아내가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는 핑계로 이혼 증서를 써주고 맘대로 내쫓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격과 영혼에 대한 살인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주홍 같은 죄를 지었어도 당신께서 지으신 백성이기에 그 죄를 따라 일일이 벌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저부터도 이 자리에서 이런 설교를 할 수 없고 단 한 명도 살아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는 죽기까지 저주하기에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고 죄인인 당신이 지으신 당신의 자녀는 죽기까지 사랑하기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피가 붉은 색이고 피를 흘려야만 죄가 사해진다는 까닭이 뭔가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드는 원시 종교의 잔재가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스스로는 도무지 씻을 길이 없기에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가 교회 생활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힘든 고난을 잘 견디리라는 기대나 소원도 아닙니다. 어쨌든 남들보다 더 착하게 살 수 있는 방안을 배워 실천하려는 노려과 헌신도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 그분의 죽음과 나의 생명이 일대일로 맞교환 된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생명 둘 중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에 들어서서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예수님께 건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면 생명이고 그분을 거역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절대적 진리이자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 진리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며 자신의 인생을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動力)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살고 죽음을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은 정말로 지금도 살아계시며 범사를 역사하십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그래서 네가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럼 네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도 알게 되고 또 그러면 네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반대로 불신자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이 땅이 전부이고 하나님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나라는 존재도 육신적 죽음으로 완전히 멸절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 사회의 법규를 어겨 감옥에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쾌락을 누리고 사는 것이 최고로 현명한 자가 됩니다.

 

저라도 정말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확실한 사실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혼도 몇 번하고 맛있는 것 먹고 신나는 일 제 마음대로 해가며 살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불신자들의 인생 목표가 버킷리스트를 달성해가며 한 번뿐인 요로(yolo-you only live once.)의 인생을 최대한 즐기며 사는 것이지 않습니까?

 

인간이 그래도 만물의 영장으로 고귀한 존재인데 그렇게 살 수 없지 않다고 반발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도덕 사상 종교로 고상하고 경건하게 치장을 해도 결국은 그 또한 자기만의 또 다른 차원과 방식의 쾌락을 누리고 사는 것일 뿐입니다. 남들보다는 자기는 여러 면에서 우월하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과시한 것뿐으로 너무나 헛되고 헛됩니다. 칠팔십 년 밖에 안 되는 짧은 인생인데다 죽으면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이고 아무도 기억해주지도 않는다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누구나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품 안에서 생명의 길을 걸어왔기에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이 영원히 그분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죽음 이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정답을 이미 받아 소지한 것입니다. 내가 잘 죽을 준비가 완료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하나님이 내 생명을 앗아가도 그분에게 한 치의 하자나 불공평이 없음을 압니다. 오히려 내가 눈을 뜨면 이 세상과 비교도 안 되는 희락과 사랑이 넘치는 낙원에 있을 것도 전혀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잘 죽을 준비를 이미 마쳤다는 것은 이 땅에서 정말로 잘 살아갈 준비도 마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손을 절대 놓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그분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고 살 수 있음을 알기에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순간을 대비하라.

 

제가 이제 육십 대 후반이 되니까 날이 갈수록 절실히 깨달아지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믿은 후부터, 정확히 말해 불신자시절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인데,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자로 택함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순간과 사건들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목사로서 마땅히 전해야 하는 도덕적 종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저의 현실적인 삶이 풍요하든 궁핍하든 상관없이 저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만 더욱 가까이 가게 만들더라는 뜻입니다.

 

궁핍할 때는 당연히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나 그런 것들이 그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발견하고 누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풍요할 때는 아무래도 기분이 좋고 기쁘지만 그 기쁨이 너무나 잠시뿐이고 오히려 끝난 뒤에는 씁쓸함마저 남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겸손히 엎드리고 감사 경배하는 즐거움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제가 예수 십자가 은혜를 알기 전에 그들과 똑같았기에 더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최근 교회와 목사들이 온갖 옳지 못한 스캔들을 일으킵니다. 예수쟁이들이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기독교 진리를 거역하고 그 모두를 사그리 싸잡아서 비방합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의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들 즉,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죄일 뿐입니다. 또 그래서 예수 십자가의 사랑만이 더더욱 진리이자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인생을 마감할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대일로 서야 합니다. 이 땅이 전부이고 하나님이 없다고 철저히 믿는다면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그분과 일대일로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 만이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물론 교회와 목사들이 분명히 나쁜 짓을 수시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인 줄 잘 알고 그래서 기독교를 비방했다고 해서 정작 본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남들이야 어떠하든지 간에 정작 자신의 영원한 운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 죽을 수 있는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인지도 사실은 모릅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선하게 아니면 욕을 안 먹을 정도로 풍요하고 안락한 삶만 목표로 죽기 살기로 살다가 그냥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허망합니다. 아무 의미도 가치도 참 만족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 이후는 전혀 대비하지 않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매순간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

 

그런데 이런 원리는 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현실이나 다른 사람으로 인해 영적으로 낙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주 가까운 남편 아내, 심지어 자식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원망만 되고 기도하기마저 힘들 수 있습니다. 도무지 사태가 호전될 기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절망에 빠져 있으면 결국은 본인만 손해입니다.

 

신앙이란 간단히 말해 언제 어디서 어떤 여건에 처하여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를 어떻게 순전하고 거룩하게 유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불신자는 물론 신자도 포함하여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던졌던 질문을 똑같이 묻고 있습니다. “OO야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성경은 교회에 나오라, 기독교를 믿으라, 심지어 일반적으로 전도하는 식의 예수를 믿으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항상 이 질문을 잘 들을 수 있고 또 그에 온전하게 반응할 수 있는 실력입니다.

 

그럼 믿음에서의 모든 실패도 이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서 옵니다.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음성에는 귀를 닫고 대신에 다른 이더러 네가 어디 있느냐고 내 스스로 따져 묻고 또 그곳에서 끌고나와 고치려 드는 데서 신앙이 실패합니다. 비록 상대를 바르게 이끌려는 선한 의도가 있고 또 열심히 기도해줘도 그러합니다.

 

자기부터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세우지 않고선 어떤 의로운 선행도 경건한 종교 의식도 아무 의미가 없고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신자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권능은 대답합니다. 또 다른 성도들에게도 모두 성령이 내주하고 있고 불신자들조차 영적인 존재입니다. 신자 본인부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면 성령의 권능이 주변에 반드시 역사합니다. 그래서 비뚤어진 관계가 바로 되고 문제와 고난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그것도 아주 짧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분께 모든 것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잘 죽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정답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 간에 부끄러울 필요도 없습니다. 정말로 잘 살 준비도 완비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기에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도 알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도 압니다. 그렇게 사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레위기 본문과 십자가 구원의 진리가 말하는 바입니다.

 

10/1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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