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 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의 차이는?

조회 수 546 추천 수 9 2012.02.17 02:15:39
타 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의 차이는?


[질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성경 말씀을 “먼저 너의 마음 그릇을 닦아라.”는 뜻으로 알고 있어도 되는지요? 예를 들어 말로써 남에게 상처 주는 일 같은 제 성격상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제 마음의 그릇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또 기타 종교 혹은 무종교에서의 마음 닦기와 기독교의 그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스스로 수양하는 것과 기도하여 성령에 의지 하는 것의 차이인가요? 타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육의 문제는 금방 와 닿는데 영의 문제는 솔직히 막연하고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육의 문제의 연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스트레스와 고통이 없다는 천국을 가본 적이 없어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도 지금 여기서부터 그것을 구하는 것은 영의 문제라기보다 육의 문제에 대한 기도가 아닐까요? 영혼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영혼을 위한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나아가 여호와를 믿는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다른, 유일한 기준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義)로 온전히 덧입었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를 믿은 후에도 그 내면에 여전히 죄의 본성은 살아 꿈틀거리지만 하나님께 이미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 신분이 주님의 자녀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확신하기에, 인생의 목적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으로 확실하게 수정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세상 사람과 정반대의 방식(재물 대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으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질문의 결론이었던 바로 이 기준에 따라 질문하신 두 번째 주제인 타종교와 기독교의 마음 닦이의 차이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마음닦이를 하는 출발이 즉,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후의 실천적 과정과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열매 또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과연 정상에 오를 수 있는가?

기독교 신자는 예수를 믿는 순간 영원한 구원을 얻고 천국의 영광이 보장됩니다. 과거에 지은 모든 죄는 물론 앞으로 지을 죄도 다 용서 받습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징계도 때론 받지만 영원한 형벌 즉, 지옥 가는 심판에선 완전히 면제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미 용서 받은 죄인”이며, 불신자(타종교인과 무신론자를 합친 비기독교인을 통칭함)는 “아직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한 분임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다 인정합니다. 그래서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하나의 산 정상(頂上) 즉, 영혼의 구원을 목표로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 오르는 길과 방식만 다르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언뜻 합리적인 주장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주장이 성립하려면 인간 스스로 자신의 죄를 완벽하게 다스리고 또 온전히 깨끗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또 인간의 선함과 악함에 우열을 가려서 하나님이 착한 자를 구원해 준다고도 합니다. 이 또한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분의 의의 기준으로는 모든 세대 모든 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산 정상에서 인간들이 자력으로 노력하여 올라오길 기다리지 않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분이자 인간의 타락 원인과 과정을 너무나도 정확히 아시기에 스스로는 도무지 정상에 올라올 수 없음도 아시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하나님 그분이 직접 산 밑으로 내려와서 인간을 품에 안고 정상으로 올라가 주시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계신 정상에 오르려는 것이 타종교이고, 기독교는 도무지 그럴 수 없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거꾸로 산에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소유하는 신앙의 출발과 방향이 정반대이기에 서로 융화, 조정, 통합될 수 없습니다.  그 근본적 차이가 가르치는 철학과 도덕의 우열(優劣)에 있지 않고, 인간 스스로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는지 여부에 달렸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전적인 신본주의(God-centered)를 지향하지만, 타종교와 무신론자들은 아무리 고상하고 경건하게 신(神)과 구원을 논해도 인본주의(Human-oriented)의 언저리에 머물게 됩니다. 두 마음 닦이의 궁극적인 차이도 하나님의 은혜인지 인간의 능력인지로 나뉜다는 뜻입니다.  
      
마음닦이의 목적

이미 용서 받았음을 확신하는 죄인(기독교인)과 아직 그런 확신이 없고 죽어봐야만 알 수 있다는 죄인(타종교인)은 그 마음 닦이의 목적부터 각기 다릅니다.

신자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온전한 통치 아래에 들어와 있음을 매일 확인 체험하며 살고 있는 자입니다. 당연히 그분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고 싶은 열망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려고 노력 훈련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과 수시로 기도와 말씀으로 교통하면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려 합니다.

그렇다고 천국에서의 상급을 더 받으려는 목적만으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그분을 따라가는 삶 자체가 너무 좋고 기쁘기에 머리 둘 곳 없이 좁고 협착한 길이라도 기꺼이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아 누리는 주님의 사랑과 권능이 너무나 크고 아름다운데다 주위에 아직도 사탄에 미혹된 영혼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해서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게 됩니다.  

요컨대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성품을 갈고 닦는 것입니다. 이미 완전히 용서 받았기에 새삼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기 위한 목적으로 성품을 가꾸고 선을 행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자기 스스로 결심 작정하여 마음을 닦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이 그렇게 하도록 강권합니다. 말하자면 예수 믿는다는 의미 자체가 단지 구원 얻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주님 뜻대로 살고 있다는, 사람에 따라 그 실천의 정도 차이는 있어도 최소한 그런 확고한 결심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타종교인은 이 땅에서 행한 것을 죽어서야 평가 받고 구원과 심판이 갈립니다. 필연적으로 어떻게 하든 자기들 신(神)의 비위를 맞추어야 합니다. 인간의 공적과 의를 최대한 많이 쌓아야 합니다. 또 그 쌓은 만큼 이 땅에서 받는 복도 비례해서 차등이 있다고 여깁니다. 결국 그들에게 계명대로 사는 것은 죽은 후의 구원과 이 땅에서의 복을 얻기 위한 조건이자 의무입니다. 반면에 신자가 성경 말씀대로 따르는 것은 구원을 확보한 자가 누리는 축복이자 특권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바리새인들이 만든 세세한 율법의 추가적 규정을 지키느라 힘들어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안타까이 여겼던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29)고 당부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현실의 환난이 아니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 즉,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고안해 낸 지키기 까다로운 온갖 종교적 금령들이었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에 오리까지는 여행해도 십리는 가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유명한 산상수훈에서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짐이 가벼운 이유는 안식일은 인간이 주인이지 인간이 안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종교인의 경우 유감스럽게도 아무리 그 계명을 다 지키더라도 구원을 얻었다는 마음의 안식이 없습니다. 죽을 때 내뱉는 한 마디는 “무(無)” 즉, 인생이 허무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닦이는 오직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첫째, 절대적인 진리를 터득하여 스스로 득도(得道) 내지 구원을 얻으려 합니다. 영원토록 절대적인 진리인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제하고는 인간은 결코 온전한 구원과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둘째, 죄를 씻고 신의 합격점에 들어야만 구원되는데 그 죄를 자신이 실제로 행한 결과로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죄를 범했기에 죄인이라고 여기기에 어떡하든 죄를 안 지으려고만 노력하는 것입니다. 과부가 욕정이 생기면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듯이, 면벽 수행을 하면서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음란한 생각이 들면 오직 그 자체를 없애려 노력하니까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타락한 결과로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죄악 된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져 완악해진 영혼이 모든 죄의 근원으로 봅니다. 따라서 죄인의 존재 전부를  새사람으로 변화시켜야만 비로소 그 품성도 거룩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얻을 수 있고, 또 예수를 알고 난 이후라야 비로소 참 회개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는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이유로 마음을 닦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성령의 역사로 자연히 그렇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키려는 목적입니다. 타종교인의 경우는 참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생각은 끝까지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진리 내지 구원을 얻으려고만 행하는 것입니다.    

마음닦이의 기준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의 마음닦이는 조금 상황이 다릅니다. 그들은 절대적 진리나 영원한 구원을 추구하려는 경향은 거의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눈에 보이는 현실적 삶에만 그 사고의 폭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의 결단과 인간 사회에서의 필요에 의해서만 마음닦이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종교적 동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본성이 아담의 원죄로 타락은 했지만 그 희미한 흔적이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우선 절대자와 교통하려는 종교성입니다.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근원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미개 종족이 나름대로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거나, 차츰 인간이 깨이면서 이성적 도덕적 종교를 창출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앞에서 설명 드린 타종교인의 마음닦이에 해당됩니다.

둘째는 양심입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아 도덕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폭행, 동성애 같은 근본적인 악을 분별하여 금기시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 사회에는 고유의 도덕적 규칙이나 관습이 있는 까닭입니다. 무신론자들마저 십계명은 인정하며 또 그것을 어긴 적이 없기에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고 반박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신론자도 생래적인 양심 때문에 어쨌든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인간이 물질에서 진화되었기에 아예 도덕과 무관한 존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양심도 순전히 후대의 교육과 훈련에 따른 결과로 여깁니다. 그러나  최초에 생긴 도덕은 절대로 교육에 의해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거나 짐짓 부인한 것입니다.

어쨌든 철저한 진화론자와 무신론자들도 인간 사회 전체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최소한의 규칙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살인처럼 남에게 직접 피해를 주는 일은 법률로 엄격히 다스립니다. 대신에 간음이나 동성애는 인간의 자유에 속한 것이고 당사자만 좋으면 아무 죄가 안 된다고 간주합니다. 쉽게 말해 남에게 피해만 안 주고 살면 선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불신자의 근본적인 사상입니다.        

그럼 문제는 불신자들이 따르는 도덕률이나 법규가 완전한지 여부입니다. 기본 양심에 따라 정해진 도덕률도 상대적이며 성경적 기준으로는 악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의 양심 자체가 불완전하고 죄에 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낙태, 간음, 동성애 등이 청교도 국가로 출발한 미국에서마저 더 이상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또 절대적 신을 따른다는 이들도 테러를 자행하고 아직도 여자를 박해하며 운전도 못하게 하지 않습니까?  

대신에 성경의 도덕 기준은 완전합니다. 비록 구약의 율법 가운데 그렇지 않게 보이는 것들이 있어도 당시의 유대인들의 상황에 맞추어 실제로 지킬 수 있는 계명을 준 것일 뿐이며 그 배경에 있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에는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에 왕을 두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 뜻과는 어긋나지만 현실적으로 인정해주면서 왕정제도의 폐해를 자세히 가르치고 오직 당신만 따르라고 강조한 것과 같습니다. 또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것 같아도, 유대인들끼리는 노예를 두지 말라고 했고 동시에 이방인과 종들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함께 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여성의 가문 상속까지 인정한 것은 당시로선 파격적입니다.

그러다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예수님은 스스로도 완벽하게 율법대로 사셨을 뿐 아니라 새로운 완전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모든 불신자들도 종교 중에 가장 좋은 계명이라고 인정하는 산상수훈입니다. 각 계명의 서두에 “너희가 이렇게 저렇게 배웠으나 나는 새롭게 이렇게 가르치겠다.”라고 자주 말씀하신 까닭은 바리새인의 유전을 뒤엎고 구약 율법을 제대로 해석 적용시키려는 뜻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덕기준을 새롭게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대표적인 예 하나를 들었습니다.  간음치 말라는 일곱째 계명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또 잘 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행동뿐 아니라 음란한 마음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죄를 지은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더 심한 죄로 발전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실은 불신자들도 마음에 불붙는 음욕을 다스리려고 온갖 힘을 짜내어 수련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본성을 예리하게 지적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누가 봐도 가장 좋은 계명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들도 모든 인간이 생래적으로 추하고 악한 죄의 본성을 갖고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인정한 것입니다.  

신자는 단지 인간 사회에서 의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에 따라 살려고 마음 닦이를 합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방도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간음과 동성애 등은 절대적 죄로 간주하여 끝까지 반대하되 예수님을 닮아 그 죄를 범한 자들은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려고 마음닦이를 합니다. 반면에 타종교인과 무신론자들은 불완전한 자신의 양심과 상대적인 도덕기준에 따라, 혹은 최소한의 법률만 지키려 수양하는 것이 신자와 다른 것입니다.  

마음닦이의 과정

산상수훈을 최고 도덕률로 인정하는 불신자들도 미처 모르는 사항이 있습니다. 수훈이 단지 기독교의 수준 높은 도덕률이 아니라 천국 구원과 연결된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유대인 무리들로 천국으로 초대하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렸음을 간과한 것입니다. 수훈의 핵심은 당신을 믿은 신자더러 천국에 이미 들어간 자녀답게 당신의 절대적 기준에 따라 거룩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또 참 신자가 되어야만 비로소 수훈을 제대로 이해하여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니라.”(21절) 산상수훈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완벽하게 사신 유일한 분입니다.

그 말씀의 앞에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가, 뒤에는 반석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가 나옵니다. 나무가 완전히 다른 나무가 되었기에 열매(결과)가 다르게 달리며, 또 집의 구조나 자재(행동)가 아니라 그 기초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 다 사람의 근본 자체가 바뀐 것 즉,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를 뜻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7:13,14) 당신이 주신 계명들을 지키려면 필연적으로 좁은 문과 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이미 좁은 문 안으로 들어선 자입니다. 또 좁고 협착한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수훈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좁고 협착한 길로 기꺼이 가고 있는 자라야 제대로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예수 믿기 전에는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간음이자 절대적인 죄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지 않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기준 앞에선 죄인 중의 괴수로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겸비하게 실토하는 일도 오직 성령의 간섭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지정의적 노력만으로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줄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선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고 여기기에 사랑까지 하지 않고 단지 미워하지 않고 용서만 해도 아주 선하게 간주합니다. 아니 정당한 복수를 하는 것은, 예컨대 부모의 원수를 갚으면 효자라고 칭송 받듯이, 훌륭한 선이라고 가르칩니다.  

신자가 예수 믿었다고 당장 거룩한 자로 바뀌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화목해져 그분의 자녀 된 신분으로 바뀐 것일 뿐 여전히 죄의 본성은 살아 있습니다. 대신에 신자에겐 자신의 지정의를 온전히 통제 조절해 줄 수 있는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여 평생토록 떠나지 않습니다. 또 신자가 잘못 된 길로 가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주십니다. 질문자님께서 이미 지적한 대로 마음닦이에서 불신자와 가장 다른 점입니다.

신자의 마음닦이는 혼자만의 의지적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내주하신 성령님의 간섭과 인도에 따라 조금씩 주님을 닮게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

초자연적인 성령의 인도라고 해서 신자가 가만있어도 저절로 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의 지정의를 동원해 정말로 열심히 성경 말씀을 연구, 묵상, 순종, 실천해야 합니다. 또 자신의 부족하고 잘못된 성품과 습관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에 성령의 거룩한 간섭이 임하여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확고하게 붙들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또 기도나 말씀을 보기 전부터 자기 죄와 허물부터 철저히 회개하고 또 자신이 미련을 가진 세상의 보물과 모든 현실적 수고와 짐을 완전히 하나님께 내려놓고 마음을 그분께 온전히 열어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놀랍고도 풍성한 역사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일생에 일어나도록 소망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성령 안에서 자기 마음의 온전한 안식과 평강과 자유를 체험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오직 예수님의 은혜임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거룩해지려는 소망부터 예수로 인해 생겼고, 또 그것을 이루는 과정도 예수의 영의 인도로 되며, 최종 도착할 목적지도 예수를 닮아가고 그분의 삶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자신의 지정의로만 죄에서 자유스러워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로마서 7장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flesh)이 단순히 육체(body)를 뜻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음란한 정욕이 일어나는 것, 편하게 살려고만 하는 재물 욕심 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려는 끈질기고도 완악한 본성입니다. 또 바로 그런 본성에서 재물 권세 명예에 과도한 욕심이 생기며 악한 행동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미 새롭게 변화된 자신의 영에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소망이 있었으나, 자기 힘만으로 스스로 선해지려고 노력하다가 자꾸만 실패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3,5,6) 신자가 사망에 이를만한 악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든 불신자시절보다 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스스로 정한 도덕적 종교적 의를 자기 힘으로만 만족시키려 들다가 온전한 생명과 평안을 얻지 못했기에 성령의 간섭과 인도를 구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의 마음닦이는 그 과정을 이끄는 이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 뜻을 주위에 실현하려면 그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항상 교통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불신자의 경우는 스스로 득도하거나 의로워지려고 자신의 지정의적 노력만으로 마음 닦이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닦이의 결과

타종교인과 불신자들이 가장 오해하는 것은 어쩌면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신자들마저 확실하게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불신자의 반발에 제대로 변증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구원의 길이 다르든, 성령이 역사하든 간에 어쨌든 마음닦이는 인간이 노력해야 하고 또 결과적으로 현실에 나타나는 모습은 착하게 살면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구태여 예수만 믿어야 하고 또 성령에 의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언뜻 그 말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외부에서 기독교 신앙을 볼 때 자기들 종교처럼 도덕적 종교적 차원에서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들도 같은 관점을 갖고 있는데, 교회에서 예수님의 복음과 성경의 진리에 대해 온전히 가르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 첫째 원인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어떤 위대한 인간 선각자가 깨달은 인간과 삶과 죽음에 대한 진리를 배우고 그가 제정한 도덕적 계명을 따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요컨대 세계 4대 종교는 사대 성자에 의해 창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종교가 불완전하고 부족하며 죄에 찌든 인간 이성의 한계에 묶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종교는 각기 상대적이고 나름대로 진리가 있기에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골라 믿고 따르면 되고, 종교끼리도 관용해야 한다는 논리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유일한 절대자 참 하나님이 직접 계시해 놓은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인간 이성으로 고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영원토록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걸려 있으며 또 그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 소관 사항이라고 합니다. 한 위대한 인간 예수가 창안한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이 직접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서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참 생명입니다.

정상에서 내려온 하나님이신 예수를 믿고 따르면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죄악과 사단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자기 주위에서부터 실제로 그분의 아름다운 나라를 세워서 날로 확장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실체입니다. 성령을 통해 전해지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신과 이웃에게 하늘의 풍성한 과실을 맺게 만드는 것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9)

물론 불신자들도 자기 목숨을 바치며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선행을 할 수 있고 실제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측면은 없습니다. 인간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또 그것을 실현했다고 우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까지 던지는 그런 선행을 통해서도 당사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행한 선행과 인간에 대한 감사로 그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신자의 마음닦이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이 자신은 물론 자신의 주위에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지향합니다. 또 성령의 인도로 바르게만 행했다면 자연히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법이 없다지 않습니까? 재차 강조하지만 기독교의 믿음은 도덕적으로 의로워지고 종교적으로 경건해지는 것이 일차 목표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과 직접 교통하며 성령의 인도대로 그분 뜻대로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품을 선하게 바꾸고 또 실행에 옮기는 것은 종교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더 크게 거룩하고 더 많은 선행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그럼 예수 믿는 것이 상대적으로 좋은 길에 불과해집니다. 예수 믿는 것이 유일한 생명임을 밝히 드러내어야 합니다. 단순한 선행은 기독교 신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할 수 없고 신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생명을 만나는 이마다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마음닦이의 열매가 본인의 성장과 인간적 선행으로 그치는 것은 타 종교의 경우입니다. 신자의 열매는 자기 안에 예수의 참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고 주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만이 높여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드린 설명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결론

불신자(타종교인과 무신론자)들은 참 하나님이 배제된 채 스스로 자기만 성숙시키는 마음닦이를 합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는 이 땅의 인간 사회는 흑암의 세력이 주도하는데도 그것의 공존과 번영만 달성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 욕심을 줄이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악한 행동만 금하는 것이 일차 목적입니다. 또 모든 수양이 오직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해 반복되는 명상과 훈련으로 행해집니다. 그것도 불완전하고 때로는 악할 수도 있는 양심과 상대적 윤리 기준에 따라서 말입니다.  

물론 주위에 사랑을 실천하려고도 하지만 자신의 의가 쌓이는 적선(積善)이거나, 자신에게 남는 것으로 돕는 것이 주입니다. 간혹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의도로 사랑을 베풀긴 하지만, 나와 상대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씻어서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으로 함께 거듭나고 풍성해지는 일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아니 하나님과의 실제적 교통과 또 그로 인한 그분의 나라가 이 땅에서부터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인지라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온전한 마음닦이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신자의 그것은 한 종교인으로서 단순히 도덕적인 선과 종교적 경건을 이루려는 것이 결코 목표가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와 각 개인의 삶을 영원토록 통치하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분의 일을 이 땅에서 대행하는 청지기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키려고 마음닦이를 합니다.

자신은 죄의 형벌에서 완전히 자유케 되었기에 주위의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들이 너무나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자신의 성숙을 넘어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이를 섬기며 그분의 자녀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자기가 속한 모든 집단에 이뤄지게끔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이 땅에서의 현실적 안락만 목표로 하던 인생이 완전히 유턴하여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신자의 실제적 마음닦이입니다. 당연히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 자기 지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의의 기준인 성경 말씀에 따라서만 마음닦이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훈련합니다. 비록 자기가 자기 의지로 자기를 성숙시키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 신자로 새롭게 바꾸고 성장시키며 나아가 당신의 일에 쓰임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이 자신의 영혼육 존재 전체와, 삶의 세밀한 구석구석까지, 또 일생 동안 하는 일 모두를 전적으로 주관하도록 만드는 것이 신자의 마음닦이인 것입니다. 또 이처럼 성령의 인도로만 신자의 성숙이 이뤄진다는 맥락에서 질문자께서 제기한 셋째 주제인 육과 영의 문제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16/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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