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문신을 해도 되는가?

조회 수 1590 추천 수 0 2018.11.09 14:38:21

(레19:27,28) 신자가 문신을 해도 되는가? 

구약성경강해(9) / 레위기강해(9)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27,28)

 

질문이 더 문제다.

 

오래 전 한국의 유명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목회 초기엔 도시 빈민을 섬겼고 반독재 투쟁을 해서 투옥도 되어 당시 청년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대학교에서 강연한 후 질의응답 시간에 학생들로부터 거의 매번 신자가 술 담배를 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럼 기독 청년이 기껏 그런 질문 밖에 할 것이 없느냐 신앙을 그렇게 협소하게 접근하지 말라는 꾸중 아닌 꾸중부터 하고는 답변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홈페이지를 통해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받으면 답변을 하면서 그 목사님과 같은 언급을 빠트리지 않습니다. 그런 질문들 중에는 신자가 머리에 염색을 해도 되는지, 몸에 문신을 해도 되는지 등이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는 생활 여건과 방식이 아주 단순했습니다. 오늘날은 하루가 멀다 않고 새로운 이슈들이 발생합니다. 신자들의 삶도 복잡하고 다양해진 인간 사회의 환경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명시적 규정이 없는 일들이 자꾸 생기므로 신앙적으로 궁금증은 늘어나지만 주위에 물어봐도 뾰족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들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술 담배를 하거나 몸에 문신하는 것보다 더 문제입니다. 죄송하지만 말씀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목사들의 잘못이 큽니다. 기독교 신앙을 도덕이나 율법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바람에 신자들도 그렇게 길들여졌습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선한지 악한지 둘 중 하나로만 구분하여 시행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의 거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그렇고 그것이 전부이지만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는 전혀 다릅니다.

 

신자 본인과 그 행하는 일과 사람들과의 만남과 소속된 공동체는 평생토록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를 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신자의 개인적으로 체험적인 친밀한 관계가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 들지 말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명하는 계명을 실천하더라도 정작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없다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장로로 구제와 십일조와 기도와 봉사에 최고로 열심을 내어도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체험이 없고 대신에 자신의 의를 앞세우고 은근히 교인들의 칭찬을 즐기고 사람들이 자기 쪽으로 모이는 것을 이용 내지 방치하는 장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의인이라고 칭찬을 받으나 구원도 받지 못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으나 심령을 꿰뚫어보는 아니 심령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만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그런 자들을 보면 나중에 도대체 주님의 엄중한 심판을 어떻게 감당하려는지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합니다.

 

성전 중앙에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던 바리새인은 종교로 자기를 치장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자랑한 위선자였습니다. 예수님께 영생을 물으러 온 젊은 부자 관원은 하나님보다 돈과 친밀한 교제를 했습니다. 그 두 사람 다 하나님이 외면하셨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반면에 사람들 보기에 비천하고 어리석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도무지 수준이 낮아 상대하기 싫은 사람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전 구석에서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의 긍휼만 바란 세리처럼 자신의 모든 죄를, 심지어 살인죄라도 내려놓고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기쁘게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세리 삭개오의 집에서 유숙하여 교제하면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인 지침이 없는 신앙상의 문제나 질문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형성 유지 성숙시키는데 장애가 되는지 아닌지로 따지면 쉽게 정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술 담배는 십자가상의 살인강도의 예에서 보듯이, 구원 받는 데 전혀 문제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술에 취하거나 숙취가 지속되면 기도나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에 지장을 받습니다. 술 담배로 건강을 잃으면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과 사역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술에 취하지 말라고 했지 완전한 금주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독으로 금단현상까지 가지 않는 한 본인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스스로 조절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머리에 염색을 하고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술 담배만큼 정신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명을 수행하는데 직접적인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원칙적으로 신자가 해도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레위기 율법이 금지하고 있는데 반성경적인 해석이 됩니까? 레위기가 문신을 금하는 이유를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레위기의 구조와 기본 주제를 제대로 아셔야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 자해하지 말라.

 

레위기는 17장까지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제사법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후 18장부터는 여호와 신앙을 삶과 연결하여 실천하는 계명들입니다. 그 실천적인 지침을 말씀하기 전에 전제를 하나 두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를 절대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레18:3)

 

그들은 종교적으로 음란한 규례를 따랐습니다. 자연히 일상의 생활방식에도 오염이 되었고 죄책감은커녕 죄라는 인식도 없이 예사로 행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그 더럽고 추한 풍속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위기가 금지하는 사항들 전부가 가나안 족속들이 예사로 범하고 있는 종교적 도덕적 죄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본문은 먼저 머리를 둥글게 또 수염도 그렇게 깍지 말라고 합니다.(27절) 자기들 신을 기념하고 숭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개역개정에서 문신으로 번역된 28절 초반 말씀은 원어로는 “몸을 칼로 베지 말라” 즉, 자해(自害)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그것도 죽은 자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장례식의 한 절차라는 뜻은 아닙니다.

 

열왕기상 18장에 자해의 대표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바알신의 선지자들, 가나안 족속이 아닌 유대인들 450명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보다 못해 혹시 너희 신이 주무시는지 모르니 깨워야 하지 않느냐고 조롱 섞인 힐난을 했습니다.(왕상18:27)

 

그러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며, 놀랍게도 규례 즉, 자기들의 공식적인 제사 절차에 따라서 피가 흐르도록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왕상18:28) 건장한 남자 사제 450명이 동시에 그랬으니 야쿠자들이 집단으로 서약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끔찍하고 기괴한 모습이었겠습니까? 사탄이 분명히 우롱하며 조종하는데도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오히려 잘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끝내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그 신이 주무신 것도 아니요 아예 실존조차 않는데 기도 응답은커녕 찍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에게 인간으로 최대한의 치성을 바치려는 것입니다. 자녀를 불 태워 바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어떻게든 기도하는 대로 응답해 달라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내용을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뤄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줄 수 없다면 제발 훼방만은 하지 말라고 그 신의 심술과 분노를 잠재우려는 것입니다. 어쨌든 내 뜻대로 하고 싶은데 인생을 살다보면 뭔가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힘이 뭔지 정확한 실체도 모르고 알 수도 없으니 일단 아무 형상이라도 만들어 놓고 인간끼리 스스로 결단하여 힘을 내거나 서로 위로하려는 짓거리일 뿐입니다.

 

레위기 본문에서 죽은 자를 위해 자해하는 의미는 바알 선지자들이 신을 부르거나 기도 응답을 요구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죽을 자를 위해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럼 그 죽은 조상 덕에 후손도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뭔가 굉장히 익숙한 생각 아닙니까?

 

한국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을 기념 회상하고 그 유지를 이어받는다는 취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귀신이 후손을 돌보아주기에 때 맞춰 절하고 음식을 바쳐야 한다는 믿음으로 제사 드리기에 반 기독교적이며 신자는 참여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문신하지 말라는(28절) 것은 가나안 족속들은 문신이 악귀를 쫓는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직폭력배들이 자기들 힘을 과시하여 겁을 주고 자기 단체를 결속하려는 의미와 달랐습니다. 또 젊은이들이 순전히 멋지게 남들보다 튀어 보이려는 의미도 아니었습니다.

 

이 또한 뭔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부착합니다. 혹시라도 흑암의 세력이 나를 무너트리러 올 때에 나를 지켜줄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 목걸이가 우상이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완전히 허사로 만드는 죄입니다. 신자에겐 이미 성령이 내주하여 평생을 떠나지 않는다는 기본적 사실도 모르는 탓이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 믿어 구원 얻었는지 재점검해봐야 합니다.

 

미국의 스킨헤드 백인 폭주족들이 십자가나 독일 나치 문신을 온 몸에 합니다. 악귀를 막을 수 있다는 인식이 전혀 없는 완전한 무신론자들이라면 그냥 멋으로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신자가 부적의 의미로 십자가 목걸이 하고 다니는 것이 영적으로는 그들보다 훨씬 더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은혜를 잊지 말겠다는 뜻으로 또 목걸이를 하고 싶은데 이왕이면 십자가 장식으로 택했다는 순진한 의도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요컨대 신자라면 삶의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의 영적 진리와 연결해서 정확히 해석해서 삶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 고려해야 할 사항

 

신자가 몸에 문신이나 머리를 염색해도 되느냐는 질문은 정말로 예수 십자가의 은혜와 권능을 안다면 구태여 할 필요가 없는 질문입니다.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신분과 특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실제로 매일의 삶에서 말씀과 기도로 교제 동행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자해(自害)는 피가 생명에 있기에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는 성경적 진리를 구태여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신자 아니 인간이라면 해선 안 되는 짓입니다. 반면에 문신과, 너무 과하게 해서 자해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염색은 각자의 믿음에 맡기면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성숙한 신자라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은 실존하지 않기에 우상제사에 바쳐진 고기라도 실제로는 더럽혀진 것이 아니므로 신자라도 마음껏 먹을 자유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진리를 모르고 왜 우상에 바친 고기를 신자가 먹느냐고 따지고 시험에 드는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자들을 위해서 자신은 평생을 두고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청년들이 염색하고 문신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관계없습니다. 악령을 퇴치한다는 인식이 없이 단순히 치장하기 위해서 즉, 교회 다니는 청년들도 순전히 멋을 내려는 의미라면 해도 됩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신자가 문신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있거나 교회의 분위기를 해칠 우려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에 바로 선 청년 신자라면 바울처럼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남들이 그렇게 한 것을 두고 비난 정죄는 물로 하지 말라고 금해선 안 됩니다. 이미 문신을 조금 지나치게 한 신자에 한해선 그것도 담임 목사가 예배 시간에만 조금 가려지는 옷을 입고 오시라고 개인적으로 간곡히 부탁하는 정도로 그쳐야만 합니다.

 

심각하게 따져볼 질문 하나

 

지금껏 말씀드린 것은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대신에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 주일예배에 온몸에 문신을 한 조폭 출신이 메탈 체인을 치렁치렁 달고 그것도 얼마 전에 살인죄와 성폭행 죄를 저질러서 전자발찌를 달고 참석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아무런 내색 않고 다른 정상인이 처음 교회를 찾아오는 것처럼 새로 신자 한 명이 늘 것을 기대하면서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반갑고도 따뜻하게 맞아줄 자신이 있습니까? 그 상대가 우리에게서 두려워하거나 싫어하거나 주저한다는 부자연스러운 낌새를 하나도 느끼지 않게 말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나 다른 모임에 갔을 때에 자기들을 쳐다보거나 대하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까? 생전 처음으로 자기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인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다시 강조하지만 주일 예배 드리고, 기도 간절히 하고,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개인적 친밀한 관계를 맺고서 그런 바탕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의식과 행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예수님의 이름이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11:26에는 안디옥 교인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원어의 뜻이 바로 “작은 예수”입니다. 크리스천 즉 신자는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당시 아무도 상대도 않았고 혹시 눈에 보이면 멀리 도망갔던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서 교제 했습니다. 온몸에 추한 냄새가 나고 썩어가는 문둥병자들을 만나 손으로 만지며 고쳐주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팔자가 기구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 같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려고 유대인들은 아예 들어가지도 않은 곳을 찾아가 구원해주었습니다. 너무 무서워 근처에 가지도 않은 군대귀신 들린 자도 찾아가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민족의 배반자라고 아예 저주 받던 삭개오는 그 집에서 같이 누어자면서 교제를 나눴습니다.

 

나중에는 그런 사람들 쪽에서 먼저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호응하며 따랐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불치병을 치유해준 기적과 말씀으로 가르침 받는 은혜와 기도해주는 따뜻한 사랑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평생 처음으로 정상인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당시로선 상상도 못하는 유대인 랍비에게서 말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란 것은 아주 큰 사랑이 아니라 아무 가식이 없고 진정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정상인 대우였습니다.

 

제가 잘 아는 엘에이에 있는 한 사람은 길을 가다가 히잡(무슬림 여인이 머리를 가리는 수건)을 쓴 여인이나, 터번을 쓴 중동 남자나, 몸에 문신하고 체인을 단 청년이나, 홈리스 들을 보면 꼭 먼저 다가가 전도지를 전합니다. 홈리스들에겐 포켓에 있는 돈을 꺼내 햄버거라도 사먹으라고 전해주고 때론 입고 있는 옷도 벗어줍니다. 그런 자들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고 싫어하는 기색도 주저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아무도 못합니다. 저는 물론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소외되고 고달픈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분도 아주 무섭고 싫어서 쉽게 그럴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오직 예수를 모르는 그들이 너무 불쌍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각오로 큰 용기를 내서 다가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도리어 자기를 잘 대해준다는 것입니다. 의외로 마음이 아주 여리고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학대당한 사람들이 많은데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술술 잘 털어놓는다고 합니다. 자기들에게 특별히 더 잘해주는 것은 아니라 정상인처럼 대해주는 사람을 처음 혹은 너무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면서 말입니다. 항상 박대 외면만 당했던 사람들이라 진정으로 사람답게 대해준다는 것을 그들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능력이나 믿음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전도지와 함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전하면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여 영과 영으로 교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을 마음 문을 열게 만들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항상 “Jesus loves you!”라는 말을 잊지 않고 건넨다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바꾸지 못할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문신하라고 미장원에 데려다 주어라.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더러 당장에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라면 최소한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대해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인 돈, 권력, 외모, 가문, 학벌 등으로 더 이상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 정도의 믿음은 우리 모두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남들이 싫어하고 미워하여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것도 충분히 미움을 받을만한 잘못과 허물을 범했음에도 차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대해야 합니다. 홈리스들이 냄새가 나고 추해도 박대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잘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상인처럼만 대해주어도 됩니다.

 

솔직히 그것마저 무리일 수 있습니다. 주변의 이웃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그래야 합니다. 아무리 잘못과 허물이 있어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하고 최소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컨대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제 곧 청소년기에 도달해 머리에 염색하고 몸에 작은 꽃이나 하트 모양으로 문신하고 싶다고 조를 수 있습니다. 그럼 무조건 안 된다고 야단치지 말고 오늘 말씀드린 성경적 원리를 잘 기억해두었다 그대로 가르치고 가능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타이르십시오.

 

그래도 친구들이 다 하니까 자기도 꼭 하고 싶다면 허락하시고 미장원에까지 직접 아빠가 차를 태워주고 그 돈을 지불하십시오. 그럼 반드시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우선 미장원 문 앞에서 아이가 먼저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빠 말이 맞는 것 같아. 나 문신 안 해도 되. 그냥 돌아가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문신을 했다면 바로 아빠의 주님 닮은 사랑 때문에 대학교에 가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교회 출석을 성실히 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믿는 신자가 어떻게 문신을 할 수 있어. 하나님도 싫어하고 율법으로 금지했어. 교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아빠가 장로인데 아빠 체면도 있지 절대로 못해!” 야단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도덕도 종교도 아니라 원죄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 사람들 앞에서 체면만 가장 앞세운 대표가 바로 성전에서 기도한 바리새인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것이므로 원죄에 묶여 있다는 뜻 아닙니까?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종교적 위선을 부모에게서 보았기에 대학교에 가면 교회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로 현실적으로 고달픈데다 어렸을 때 말도 안 되는 학대를 당해 온갖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곳은 이민 사회가 적어서 비교적 눈에 안 띌지 몰라도 한국이나 엘에이에는 아주 많습니다.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이곳도 한국교민이 겨우 삼천 명에 불과한데 교회는 열 곳이 넘고 서로 상종하지 못할 자처럼 멀리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능력을 지녔는지 아는 것이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사랑이 필요 없는 자 단 한 명도 없음을 알고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 자기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나눠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에 때를 얻든 못 얻든 담대히 전하라고 말합니다. 그 뜻이 가게 영업시간 중에도 쳐들어가 무작정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몸에 문신한 자들이나 홈리스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담대히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볼 때에 도무지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고 도리어 화를 낼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때를 못 얻을 것 같은데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즉, 때를 얻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입니다. 정말로 순종 헌신하겠다는 열심만 있으면 됩니다. 그럼 가장 먼저 다른 이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한 마음을 신자에게 심어주십니다. 또 그럼 조직폭력배든 홈리스든 진정으로 먼저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문둥이들에게 전도하려 문둥이 촌에 들어가 결국 자기도 문둥이가 된 성자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또 미국에는 온몸에 문신한 오토바이 폭주족을 전도하려고 일부러 자기 몸에 문신하고 폭주족이 되어서 함께 어울리는 목사도 있습니다. 이 둘이야 말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 본체이면서도 타락하고 고난 가운데 신음하는 비참하고 연약한 인간을 구원하려고 그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직접 오셨지 않습니까? 신자가 문신을 해도 되는지 따져서 금지시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문신을 한 자들을 먼저 찾아가 주님 사랑으로 섬기는 것, 최소한 그들을 정상인으로 대해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11/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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