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8:21,22) 주님 안에서 서로 형제가 되려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삼진 아웃의 법칙

 

세상 법정에는 야구의 규칙을 빌려서 삼진아웃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같은 죄를 연속해서 범하면 세 번째는 몇 배의 중형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들끼리도 삼 세 번까지는 용서해도 그 이상 넘어가면 절대 용서 못하고 아예 상종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잘못을 세 번이나 참아주는 것도 피해자로선 참으로 대단한 인내요 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르는 남이라면 당장 물적 정신적 피해보상부터 요구할 것이며 그런 보상이 없다면 원수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아파트의 층간 소음으로 심하면 살인까지 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바로 위층 사람이면 이웃인데도 그러합니다. 설령 피해 보상을 받아도 그것으로 끝이지 그들 사이에 어떤 인간적 교류도 생성되지 않고 다시 생판 남으로 돌아갑니다.

 

이는 어느 세대 어느 나라에나 동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세태가 그렇게 무정 잔혹하게 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성정은 항상 동일하기에 항상 있어온 일입니다. 요컨대 세 번이 인간이 남의 잘못을, 그것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이웃에게 용서해줄 수 있는 일반적인 한계인 셈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주 자신 있게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신자로써 책임을 다하는 것 아니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알다시피 일곱을 유대인들은 완전한 숫자로 여기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의에 도달하지 않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베드로는 참으로 우리와, 특별히 성질 급하고 감정적인 한국 사람들과 많이 닮았다고 여겨집니다. 때로는 귀엽고 우리 대신 주님께 물어보고는 야단까지 대신 맞아주니 고마울 정도입니다.

 

주님은 그 질문에 대해 아주 놀라운 답을 주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완전 숫자 7 하나로 족할 줄 알았는데, 주님은 (7X10)X7=490번으로 완전 숫자를 세 번, 그것도 곱하여서 대답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회수를 듣자 틀림없이 베드로의 코는 납작해졌을 것이며 함께 있던 제자들도 한참 동안 멍해졌을 것입니다.

 

그 의미가 490번까지 용서하고 491번째는 큰 벌을 주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습니까? 매일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490번까지 용서를 못합니다. 베드로처럼 7번까지는 될지언정 그것을 넘어가면 아예 포기하고 자식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 자식이라도 교도소를 490번 들락거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용서가 아니라 그냥 부모 된 의무로 사식과 영치금이나 넣어주고 치울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주님 안에서 형제 된 사람들끼리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490번까지 용서했다가 491번째에 용서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고 따지고 보면 용서를 안 한 것이 됩니다. 어떤 면에선 처음부터 벌이라도 주었으면 회개할 기회가 더 빨라졌을 수 있습니다. 본의는 아니지만 회개할 기회가 늦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그의 머리에 더 쌓게 만든 결과가 됩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와 인간에게 지은 죄

 

주님의 대답은 사실상 인간으로서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용서입니다. 거기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차원마저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어서 천국에 관해서 어떤 임금이 종들과 회계하는 비유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3-35절) 그 비유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주었더니 그 자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도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임금이 그 자를 다시 잡아다가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일 품삯이며,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맞먹습니다. 일만 달란트면 육천만 데나리온입니다. 일백 달란트의 빚에 비하면 60만 배나 큰 빚입니다. 그것을 365일로 나누면 16만년이 넘고 80평생으로 치면 이천 번을 살아야만 겨우 갚을 돈입니다. 한마디로 일만 달란트는 인간으로선 영원히 갚을 수 없고 갚으려는 꿈도 아예 꿀 수 없는 금액입니다.

 

주님은 그만한 빚을 탕감해준 임금이 바로 천국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아 구원 얻은 것은 인간이 평생을 갚아도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이 비유와 연결시키면 예수님의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됩니까? 첫째로 베드로와 그에게 죄를 범하는 형제는 똑같이 하나님에게 일만 달란트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으나 십자가 은혜로 탕감 받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 안에서 형제들끼리 범하는 죄는 서로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것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아예 무시해도 되며 용서해줄 것도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길가다 서로 어깨가 잘못 스친 정도의 죄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만난 형제끼리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도덕적 종교적 의미와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우선 베드로의 질문 의도처럼 신자니까 일반인보다 더 용서해야 한다는, 세 번은 물론 일곱 번도 훨씬 넘어서 아주 많이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끝까지 용서하려면 제가 이미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그 사람이 행한 일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끝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 사람을 끝까지 받아들이려면 나부터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절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나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위의 계산대로 하자면 80번을 죽었다 살아도 못 갚을 죄였다고 철저히 고백 회개해야 합니다.

 

그 위에 다른 모든 신자들도 똑같이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점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범해도 백 데나리온도 안 된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잘못을 범하면 외적 모습은 분명 죄이지만 만약에 다 같은 사형수끼리라면 전혀 문제 삼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나부터 너무나 죄 많고 불쌍한 자이고 저도 그러하며 내가 더 그러하므로 네가 몇 번 나에게 잘못을 범해도 다 같이 불쌍한 자들끼리 문제 삼을 것이 없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들어야 합니다. 문제 삼아봐야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서로가 아니 나부터 너무나 부끄럽고 비겁하고 완악해질 뿐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 은혜로 무상으로 용서해준 뜻에 비추면 큰 죄악이 된다고 절감해야 합니다.

 

실제로도 진정으로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면 그 사람 자체를 불쌍히 여기므로 그가 행한 일 한두 가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게 됩니다. 비유컨대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기가 똥오줌을 싼다면 야단치지 않고 오히려 더 보살펴 주는 것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나도 기저귀에 똥오줌을 싼다는 사실을 확신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주님의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의 형제들끼리는 아예 용서라는 말이 필요 없는 사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오직 사랑으로만 그 관계가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성도들끼리 용서 받아야만 할 죄를 일곱 번이 아니라 삼 세 번이라도 범하면 서로 형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역으로 따지면 같은 신자에게 동일한 잘못을 일곱 번이나 범했다는 뜻인데 그 사람은 형제는커녕 심지어 신자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

 

그런 맥락에서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의 형제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 질문을 할 때만 해도 성령이 간섭하기 전으로 아직은 예수 십자가 은혜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형제들도 신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단순히 유대 동족만 형제라고 호칭했습니다. 같은 유대인인 그가 말하는 형제에는 당연히 바리새 사두개인처럼 예수님을 거역 대적하는 자들도 포함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불신자입니다.

 

그럼 베드로의 질문은 불신자가 신자에게 여러 번 죄를 범해놓고 피해 보상은커녕 사죄도 않을 때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심지어 비방 멸시 핍박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주라고 명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랬듯이 말입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고 그 전에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신자도 불신자의 잘못에 대해 똑같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로서의 소명이자 행할 바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끼리는 죄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죄를 범해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갈 동안에는 반드시 서로 돕는 자로서 오직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그러지 못해도 신자라면 최소한 그들에게 용서받아야 할 일은 아예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불신자가 잘못하면 불신자의 행위를 용서하기에 앞서서 그 사람 자체를 끝까지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수십 배의 결실을 맺는 성육신의 원리로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그것을 탕감 받는 일이 더 급하지 너희끼리 일백 데나리온 빚 가지고 아웅다웅 다투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큰 빚을 단지 먼저 탕감 받은 것뿐입니다. 그 다음에 신자가 행할 일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아직도 그 큰 빚을 탕감 받지 못한 자에게 주님을 소개해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일을 제대로 하려면 서로 용서 자체가 필요 없는 사이가 되는 것,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로선 신자로써 정말로 궁금했었고 또 정말로 용서를 잘하는 의로운 신자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에는 잘하고 못하고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하려면 용서만 하면 되는 것이지 491번째에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 안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의 질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고 엄밀히 말하면 신자에겐 성립이 안 되는 질문이라는 것이 바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따지자면 아무리 극악한 불신자라도 또 그런 자가 아무리 핍박해도 490번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선 선뜻 이해하기 힘든 아래와 같은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의로운 행위를 해야 구원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다른 이의 과실을 끝까지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로 임금과 종이 회계하는 이 비유의 결론으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3/2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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