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8-25) 예수 이름에 숨겨진 비밀
2019년 성탄절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1:18-25)
아기 이름도 짓지 못한 부모
유대인들은 사람의 이름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 사람의 정체성, 성품, 일생, 하나님께 받은 소명들이 녹아져 있습니다.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완전한 인간이자 유대인으로 사셨던 예수님의 이름에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는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인데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여호수아였듯이 유대사회에 흔히 있는 이름이라 특별히 예수님을 구분하기 위해서 “나사렛(출신의) 예수”라고 칭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 자라는 뜻으로 메시아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트럼프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직책을 붙여서 “메시아 예수”라고 호칭한 것입니다.
이번 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주간입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18절)고 시작하면서 예수라는 이름의 뜻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어떻게 붙이게 되었는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경위를 정확히 알면 주님의 이름이 주는 의미가 더 깊어져서 성탄절을 더 뜻있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레스는 본문에 대해 아이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기 마련인데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이름을 짖지 못했다고 주해했습니다. 자기 몸으로 직접 낳은 마리아에게도 천사 가브리엘이 직접 찾아와 예수로 지으라고 동일한 계시를 주었습니다.(눅1:31)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짓는 것은 자신을 닮은 분신임을 확인하고, 어떤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표현하고, 처음으로 부모로서 전적인 주권과 사랑을 아이에게 행사하는 일입니다. 부모의 성은 당연하고 때로는 이름까지 물려받듯이 부모자식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이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관계는 특이합니다.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분신이 결코 아니며, 그들이 예수의 일생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성인이 될 때까지의 현실적 보호와 양육은 몰라도 그 인생에 부모로서 권위를 행사할 입장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먼저 요셉은 예수의 육신적 아버지가 아니고 단순히 법적인 책임을 지는 아버지입니다. 일종의 양자 입양인 셈입니다. 베들레헴에 가서 자기 호적에 등재만 해주었습니다. 직접 자기 몸에서 예수를 낳은 마리아라고 해서 그 입장이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녀의 태가 열 달간 예수를 잉태하고 있다가 산고의 고통을 겪으며 출산한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오시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자기 몸에 메시아를 품은 마리아는 인간으로써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아기 예수를 현실적으로 보호 양육할 책임을 맡은 아버지로 택함 받았듯이 마리아도 예수님을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는 통로로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그녀를 숭배할 근거나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갖는 타락한 죄의 본성까지 물려준 것은 아닙니다. 아기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기에 죄에는 전혀 오염되지 않으면서도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죄는 없으나 이 땅에서 모든 시험과 고난을 겪어야 하는 완전한 인간됨에 단 하나의 부족하지 않게끔, 또 그런 시험과 고난을 스스로 완전하고도 거룩하게 주도할 수 있는 자유와 권능을 가진 완전한 하나님 되심에도 단 하나 부족하지 않게끔 태어난 것입니다. 그 외의 구체적인 내용은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의 신비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요셉과 마리아는 이 땅에서의 예수의 육신적 부모의 역할을 잘 수행했기에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요셉이 천사가 현몽한 것을 그대로 믿고 순종한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마태가 “의로운 사람”(19절)이라고 표현했듯이 그 성품과 믿음은 메시아의 아버지가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이름은 없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출생은 그 십자가 죽음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스스로 당신을 비하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능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에서 최고로 하나님다우신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이 한 여성의 태에서 열 달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죄 중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분의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성육신과 십자가는 하나님이 가장 낮아진 모습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당신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식이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자 그와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기독교를 창시한 위대한 인물로 존경 받아선 안 됩니다. 전 인류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구세주로 경배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사람이 결코 지을 수 없고 지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이 어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특성에 그분은 제한 받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명칭들 전부가 그분의 백성이 그분께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컨대 먼저 가서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 승리를 주시는 여호와 닛시, 치료하시는 여호와 삼마 등에서 보듯이 그분의 한 가지 속성만 대변하게 됩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스스로 당신의 이름을 계시해준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강림하신 여호와가 모세에게 가르쳐주었는데 사실상 그분의 이름도 아니었습니다.(출3:14)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내다“(I am), 더 정확히 하자면 ‘자존한다’(am)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소유 주관하시며 모든 것이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과 완벽한 섭리 아래에 있습니다. 세상 어느 것에도 구속은 물론 영향도 전혀 받지 않고 스스로 영원히 자존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주에서 이름이 없고 이름을 붙일 수 없고 붙여서도 안 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조금 어폐가 있지만 당신께서도 모세에게 ‘자존한다.’는 표현밖에는 해줄 수 없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예수님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체이므로 이름이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불경한 종교적 죄를 짓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만이 당신을 증명할 수 있으며 그것도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 인도하시는 행동으로만 증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그래서 머리로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개인적으로 체험적으로 교제 동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이 땅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인간사회에 통용되고 당신의 정체성과 일생을 대변하는 유대 식의 이름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읽어보면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22,23절)고 예언했고 모든 일이 그대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으니 천사가 요셉에게 이름을 임마누엘로 지으라고 해야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사야 이후 약 육백 년이 흐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것입니까? 아니면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과 요셉에게 천사를 보낸 하나님이 서로 다른 분입니까? 그럴 리는 절대 없습니다. 당신께서 이미 예언하신 임마누엘 대신에 유다에 흔한 여호수아로 짓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뜻은 간단합니다. 말 그대로 흔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평범한 남성의 모습으로 오셨고 또 그래서 이름도 특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만약 천사가 요셉더러 여호수아 대신 임마누엘로 이름을 짓게 했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합니다. 유대인들은 마태가 인용한 이사야의 예언을 메시아 강림의 의미로 받아들였고 ‘임마누엘’은 메시아의 별칭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럼 아기 임마누엘은 어려서부터 엄청난 박해나 놀림감의 대상이 될 것이며, 최대한 양보해도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하자면 한국의 ‘하’씨 성을 가진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나님’으로 붙이는 꼴입니다. 성인이 되도록 조롱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매일 집 앞에 와서 신성모독이니 이름을 바꾸라고 데모할 것입니다. 실제로 헤롯이 동방박사에게서 메시아 탄생을 통고받자마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다 죽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라는 당시 인간들이 널리 알고 있는 평범한 이름을 붙이게 함으로써 아무도 주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주님이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당신의 품에 숨겨서 보호하신 셈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짓는 데도 인간의 관습 문화 사고에 맞춰 당신께서 스스로 낮아지시는 성육신의 원리가 작용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평범한 이름에 예수님의 일생을 온전히 담아냈고, 특별히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을 정확히 계시했습니다.
수미상관(首尾相關)의 이름 임마누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는데 세계적인 신약학자 김세윤 박사가 분석한 내용입니다. 성경저자들이 자주 동원하는 수사법으로 처음에 강조한 주제를 마지막 결론에도 다시 강조하는 수미상관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자말로 머리와 꼬리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주제의 처음과 끝을 마치 괄호처럼 묶고서 그 중간은 그 주제를 설명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인클루시오’라고도 부릅니다.
이 복음서의 저자 마태는 유대인 독자를 대상으로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저작했습니다. 김박사는 마태복음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로 끝나는데 주목했습니다. 말하자면 임마누엘로 시작해서 임마누엘로 마쳤기에 김박사는 그런 인클루시오 안에 있는 복음서 전체도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설명하는 내용이라고 말했습니다.
김 박사의 이런 분석을 염두에 두고 본문 이사야의 예언을 다시 보십시오.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어라” 작명하라(name)고 하지 않고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부를(call)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비롯한 사람들이 예수의 일생을 그렇게 평가하리라는 뜻입니다. 저자 마태는 예수의 일생이 바로 이 예언에 완전히 부합될 뿐 아니라 예수님도 마지막 지상명령으로 강조했기에 서두에 인용하면서 임마누엘을 복음서 전체의 주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는 구태여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유대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도 하나님이 자기들과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을 도리어 과도하게 믿었지 않습니까? 그분이 택하여 거룩한 율법을 주었기에 자기 민족은 구원을 확보했고 그분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그분의 함께 하심에 대해 자신만만했지 않습니까?
아담과 이브가 그분을 거역 타락하여 공포와 수치에 떨며 숨기 바빴을 때도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가인이 아무 잘못 없는 친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현장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애굽에서 사백년간 노예 살이 하던 당신의 백성을 한 시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땅에 관영하여서 아브라함에게 기업을 주겠다고 약속한 시기가 되도록 기다려준 것뿐입니다.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걸어서 건너가게 했고 시내산에서 거룩한 율법도 수여했습니다. 온 백성이 가데스바네야에서 당신을 거역했어도 그들을 떠나지 않고 새로운 세대들로 기어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해주었습니다.
다윗 왕이 가나안의 사방 대적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평화 위에 굳건히 세우게 해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성전을 지으려했을 때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삼하7:6) 광야 방황 중에도 그들과 함께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바울도 그래서 광야에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고 그 점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가 임마누엘해도 구원과 심판으로 나눌 것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에 사방 대적을 패배시켜서 세상의 중심이 된 다윗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주리라고 잔뜩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온갖 기적을 베풀자 그런 큰 능력으로 로마도 무찔러 주리라고 기대하고 적극적으로 열광했으나 오히려 자기들더러 하나님을 거역하는 천하의 죄인이므로 회개하라고 촉구하니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이제 마태가 임마누엘을 주제로 정해 처음부터 강조한 의미가 분명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그 크고도 많은 은혜를 받고도 당신께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고 형식적 외식적 종교로 흐른 것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신 하나님이 그 잘못된 종교를 바로 잡으려고 아기 예수로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로부터 다른 민족이 알지도 못한 은혜를 받는 바람에 그분의 사랑을 독점했었습니다. 구원은 확정되었고 남은 일은 현실의 복을 받아내는 것뿐이었습니다. 현실의 복만 준다면 바알도 아세라도 음란하게 따랐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조차 영적인 시체가 되어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늘리려고 자기들도 지키지 못할 종교적 멍에를 백성들에게 덮어씌웠습니다. 자기들보다 더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배척 대적하여서 십자가에 죽이게끔 만든 이유도 바로 그 돈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목자 잃은 양 떼처럼 방황하며 소망을 잃고 사탄에 의해 완전히 조종 농간 당하며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렸습니다.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따랐고 세상 어느 민족보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선했지만 그들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소망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 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참 생명을 주어서 하나님의 참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메시아였습니다. 돈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을 죽음에서 건질 수 있음을 직접 오셔서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과 원수 된 죄에서 인류를 구원해주러 왔습니다. 여호수아와 임마누엘 둘은 예수님의 사역과 일생과 그 의미를 드러내는데 가장 적합하고 충분한 이름이었습니다. 또 이름 그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름
지금껏 설명 드린 내용은 사실은 신자라면 익히 배워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관해서 신자들이 간과해선 안 되는 진짜 비밀이 하나 더 숨겨져 있습니다. 성경 66권의 주제는 예수님이며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도록 주님에 대해서 점진적으로 조금씩 명료하고도 구체적으로 계시해 나갑니다. 그런 원리가 주님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에도 적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약 육백 년 전의 이사야 선지자는 구약백성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만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대에는 천사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구원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서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당신께서 직접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실체가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않는 신약시대 신자들, 바로 우리를 향해서 가장 강력한 약속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은혜의 말씀 아닙니까? 여러분 이 말씀에 실감을 하십니까?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체험하십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함께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강력한 파워를 의미하는, 그것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우주를 통치하는 그 권세로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젠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의 육신은 겨우 33년을 이 땅에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주님의 육신적 부모뿐 아니라 그 당대의 제자들은 그분을 거룩한 이름으로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온 참 빛을 육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모두가 요한 사도처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마태와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과 직접 대면하여 그들이 땅 끝까지 가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서 함께 해주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실현된 결과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자연 수명을 다 살다 죽은 요한 사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비참한 고통 가운데 순교했습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초대교회 신자들이 동일한 박해를 겪으며 대부분이 주님처럼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온갖 죽을병과 불구를 고쳐주자 열광하며 모인 백성들에게도 주님은 인간이 반드시 받아야 할 진짜 복이 따로 있는데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마5:3) 그 복도 실은 여덟 가지 복 중에 첫 단계에 불과했고 가장 큰 마지막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당신으로 인하여 욕을 먹고 모든 악한 말을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마5:10,11)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정확한 뜻을 아셔야 합니다. 모든 신자에게 모든 경우에 그러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족속에게 당신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라고 전제했습니다. 요컨대 주님과 같은 길을 가는 자로 제한했습니다. 팔 복 중에 최고의 복도 예수님으로 인해 핍박받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나중에 천국에서의 보상이 크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닙니다. 복음에는 세상의 거짓되고 썩어질 추악한 생명과는 정반대인 참 생명이 역사합니다. 순전하게만 전해지면 사탄에 미혹된 세상 사람들은 격렬히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어둠이 더 좋아서 참 빛을 너무나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도 그런 격렬한 저항을 받으면서도 그 길만이 참 생명을 실현하며 삶에서 자유와 평강이 넘치게 함을 체험으로 잘 알고 누리고 있기에 기꺼이 감사함으로 고난을 감수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은 심지어 순교를 권면하기까지 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제자들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 말씀대로 먼저 실현해보였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단순히 마음의 자세나 영적인 태도를 겸손히 낮추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 실제로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했으며 그 뜻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현실적으로 유효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당연히 성부와 성령 하나님도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럼 그분의 권세가 항상 함께 하는 신자들도 그분 따라 복음을 전하면서 십자가에 죽어야만 그 권세가 올바르게 실현되는 것 아닙니까? 주님도 제자들더러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했고 초대교인들은 그대로 삶에서 실천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직접 설명해준 임마누엘의 참된 의미입니다.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이제 성탄절에 주님을 어떻게 기념 회상해야 할지 분명해졌습니다. 성탄절은 알다시피 예수님의 생일이 아닙니다. 위인이나 존경하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듯이 보내선 안 됩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크리스마스트리, 성도들끼리 풍성한 선물 나눔 등이 나름대로 인간적 윤리적인 선을 행한다는 의미는 있지만 임마누엘 예수님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성탄절이 예수님을 축하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더러 그분이 임마누엘 하신 참 뜻에 자기를 비추어보며 기념 감사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천하 죄인의 괴수였는데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으로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된 은혜는 평생을 감사해도 모자랍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본문의 두 이름 중에 여호수아 반쪽의 예수님만 믿는 셈입니다. 주님이 직접 가르친 임마누엘 즉,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서 세상 끝 날까지, 세상 땅 끝까지 함께 하시는 그 은혜 안에 실제로 거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 그 은혜를 흑암의 세력에 묶여 참 빛을 보지 못하는 자기 주변에 나누며 실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결코 관념적 사고활동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주님을 따라가며 그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우리와 함께 한다면 그 권세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 중간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분과 나 사이에는 그분의 권세 오직 하나뿐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그 관계를 흔들 수 없고 아주 미세한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28,29) 바울은 실제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고 그 외에도 숱한 박해를 받았습니다.(고후11:24,25) 그 수많은 고난의 와중에도 주님이 결코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당신의 일을 당신께서 이루시어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바울이 책상머리에 앉아 있지만 않았습니다. 신자들 중에선 역사상 가장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지금 고난 자체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확신하는 진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었고 실제로 자신의 삶에 실현했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런 괴로움은 고통 축에도 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11:28,29)
그에게 정말로 괴로웠던 일은 자신의 육신의 고통보다 다른 사람의 약함과 실족이라고 합니다. 약함은 성도로서 믿음이 떨어지거나 고난 중에 있는 것이며 실족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로선 이웃의 아픔과 나아가 불신자가 사탄의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뜻입니다. 그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그의 심령에 충만히 함께 하시니까 주님의 마음이 그대로 자기 마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이 왜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참 생명만이 사탄에 미혹된 영혼과 죄로 타락한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신 계절에 올해 바울처럼 전도에 얼마나 열심을 다했는지, 또 이웃의 고통을 얼마나 성실히 덜어주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 앞에 자기들의 강함만 자랑하고 더 강하게 해줄 메시아만 임마누엘 하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임마누엘을 해석한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신자들이 잘 믿어서 복을 받았고 또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목사에게 충성하면 더 복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새벽마다 그 복을 더 많이 받아내려고 뜨겁게 기도합니다. 교회마다 십자가가 퇴색 변질 실종되었습니다. 주님이 임마누엘 하신 의미를 가장 정확히 깨닫고 그 의미를 세상 앞에 온전히 드러내야 할 성탄절조차 거꾸로 풍성한 종교적 파티로 변질되었습니다.
세상은 풍요를 하늘이라고 가난을 땅이라고 믿습니다. 신자더러 그런 하늘과 땅을 뒤집으라고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신자들은 돈으로 행복을 보장해주겠다는 로마 황제를 절대로 주인으로 모실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도 인간의 주인이 될 수 없는데 돈이 인간의 주인이 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초대 신자들은 돈이 결코 복을 보장하지 못하고 자칫 멸망으로 이끄는 사탄의 유혹임을 잘 알았습니다. 가난한 심령을 품고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핍박을 받는 것이 참 생명의 길임을 그들은 실제로 체험했기 때문에 거짓 생명을 끝까지 당당히 거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오늘날 신자들도 그들처럼 살고 있지 않으면 교회에서 성탄절을 아무리 경건하고 엄숙하게 보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로 그곳에는 주님이 임마누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여러 사정으로 전도와 섬김에 열심을 내지 못한다면 세상과 사람들과 죄악과 사망과 사탄의 세력 앞에 기죽지 않고 당당히 맞설 수는 있어야 합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고난 중에도 염려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주님과 교제 동행하는 기쁨과 감사를 빼앗기지 않아야만 주님은 임마누엘 하실 것입니다.
12/22/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