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9:3-6)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마19:3-6)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새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결혼 후에 아내에게 하자가 있으면 이혼증서를 주고 내어보낼 수 있다는 율법의 규정(신24:1-4)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과 적용인지 정말로 알고 싶어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하여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이혼가능사유로는 배우자의 음행으로 한정했습니다. 반면에 힐렐 학파는 남편이 정말 아무 연고라도, 심지어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이유로도 내보낼 수 있다고 해석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두 학파 중에 어느 쪽 해석이 옳은지 판단을 내려달라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을 “시험하여 가로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시기 저주하여서 어떻게든 주님을 향한 일반 대중의 열렬한 지지 호응에 훼방을 놓고 율법을 명백히 위반했다는 꼬투리를 잡아서 처형시키려고 모의했습니다. 알다시피 끈질기게 주님을 찾아와 시험하는 질문들을 먼저 던졌으나 매번 주님의 신묘한 대꾸로 인해 입도 뻥긋 못하고 도리어 그들이 수치를 덮어쓴 채 돌아갔습니다.
이번 질문에도 동일한 모략이 숨겨져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아무 연고라도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하면 원수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평소의 가르침을 스스로 위반하는 것이라고 비난할 참입니다. 또 아무 연고라도 버리지 못한다고 대답하면 율법을 거역한다고 몰아붙일 작정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처리에 대한 질문의 숨은 의도와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시험을 너무나 간단하게 단번에 물리치는 모습을 보면 그 신령하고 예리한 지혜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 논쟁에서 이긴 결과만 보기에 언뜻 그런 대답들이 쉬울 것처럼 여겨지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신적인 통찰에 근거한 것입니다. 인간은 성령이 지혜를 주셔야, 그것도 어쩌다 한 번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주님처럼 매번 어린이 손가락 꺾듯이 응수하지 못합니다.
자청해서 주님께 시비를 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사들은 당시로선 최고 지성인이자 가장 경건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예배, 기도, 금식, 십일조는 물론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도 많이 했습니다. 상위 몇% 안에 드는 의인이자 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최고 수준의 인간이기에 그런 올무를 걸만한 질문도 궁리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간적 지식과 지혜는, 악의에 근원되었기에 더더욱 주님 앞에선 전혀 무용지물이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의 완악한 심령만 더 들어내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질문의 두 종류
그들의 주님을 시험하려 했던 모든 질문들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의 한계를 아주 분명하게 자증(自證)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대화법에서 질문을 가장 기본적으로 ‘닫힌 질문’과 ‘열린 질문’ 둘로 분류하는데, 그들의 질문은 한 결 같이 닫힌 질문이었습니다.
‘닫힌 질문’(Closed Question)이란 yes 혹은 no로만 대답해야 하거나, 몇 가지 옵션 중에 하나를 택해서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을 말합니다. 본문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도 ‘옳다’ 아니면 ‘그르다’라는 두 가지 대답만 전제한 것이므로 닫힌 질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옳다면 사랑이 없다, 그르다면 율법을 어겼다고 덮어씌울 작정이었습니다.
닫힌 질문은 그 논리적 흐름 상 다른 대답은 불가능하기에 닫힌 답변만 해야 합니다. 질문자가 알고 싶은 것은 오직 ‘예’ 혹은 ‘아니오’ 뿐이니까 대답하는 자도 원칙적으로 또 대화를 이어가려면 그 질문한 의도에 맞추어주어야 합니다. 바리새인으로선 그 질문에 합당한 대답은 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항상 둘 중 하나로 대답했으므로 당연히 예수님도 그러리라 기대했습니다.
반면에 ‘열린 질문’(Open Question)은 “예, 아니오.” 혹은 “옳다, 그르다” 식의 단 답(單答)이 아니라 서술형 대답을 요구하는 형식입니다. 본문의 질문을 열린 방식으로 간단히 바꿔봅시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왜 옳으니이까?” 왜라는 한 단어만 들어갔습니다. 그 대답은 모세 율법에 아내의 하자를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주고 내어보내도 된다고 허락했기 때문이라고 서술 형식의 문장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열린 질문은 열린 답변으로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보다시피 유대인들은 항상 주님에게 닫힌 질문으로 시험했습니다. 질문 자체가 이미 제한해 놓은 두 가지 답 중에 어떤 대답을 하던 꼬투리 잡을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율법위반의 죄로 고소하든지 최소한 주님의 명성에 크게 먹칠할 작정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시험을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상식적으로는 닫힌 답변만 해야 하는 닫힌 질문들임에도 인간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정확히 말해 영적 시체인 인간들로선 생각할 수도 없는 제 삼의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것도 열린 답변 형식으로 대답했습니다. 시험 걸려고 왔던 자들로선 꿈도 꾸지 못한 답변이었습니다. 인간적 지혜로는 도무지 짜낼 수 없었던 것이기에 그 자리에서 입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처리에 대한 답도 풀어주라, 돌로 쳐라 둘 중 하나인데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부터 먼저 치라고 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물었을 때도 옳다 그르다 둘 중 하나로 답해야 하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답했습니다. 시험하러 왔던 자들이 어찌 할 바를 몰라 도리어 시험에 들어버렸습니다.
본문의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답은 아무 연고 없이 버리는 것이 옳다 그르다 둘 중 하나여야 했으나 주님은 너희 마음이 완악함을 하나님이 미리 다 아시기에 여자의 권익을 그나마 최선을 다해 보호하기 위해 이혼 증서를 주라고 규정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또 그래야만 하는 이유로 하나님이 짝 지어준 관계를 결코 인간이 나눌 수 없다고 부연해서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너희는 율법의 문자적 규정만 따져서 지키지만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요컨대 이혼증서의 목적은 마음대로 아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아내가 음행하지 않는 이상 버리지 말라는 데 있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혼증서 규정을 지키되 음행한 아내도 보호해주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율법을 어기지도 않았고, 당신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의 예상은 산산조각 났고 준비해둔 올무는 던져보지도 못했습니다. 도리어 자기들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완악한 자로 주님께 정죄 받았습니다.
인간적 윤리의 자가 당착
주님을 시험하려 덤빈 그들의 꿍꿍이속은 아주 음흉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 질문에 자기모순의 함정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그들 스스로는 미처 아니 아예 몰랐습니다. 그런 닫힌 질문이 요구하는 닫힌 답변은 사실상 자기들이 지금 실제로 행하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아무 연고 없이 즉, 무슨 핑계를 대든 이혼 증서만 주고 아내를 내보내도 된다고 답하면 예수님을 원수를 사랑하라는 당신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몰아붙일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들이 지금 그렇게 행하고 있으니까 자기들도 똑같이 사랑이 없음을 자기들이 증명하는 꼴이 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도 주님이 그렇다고 대답하면 로마에 협력하는 민족반역자로 몰아붙일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지금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있으니 자기들도 민족반역자라는 점을 그 답변이 증명해주게 됩니다. 주님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해도 자기들이 실제로 그렇게 행하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자기들도 사랑이 없다고 자증하게 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인간 사회에 통용되는 윤리는 상대적일 뿐 아니라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힐렐 바리새인들은 아무 연고 없이도 아내를 버렸고 샴마이 바리새인들은 음행했을 때만 그랬습니다. 두 그룹 다 자기들이 옳다고 최소한 잘못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자기 엄마를 죽인 네로 황제도 자기가 의로운 일을 행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윤리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은 모든 인간 사회가 벌써부터 하나의 진리로 인정 시행하고 있습니다. 애완견을 식용으로 삼는 것은 동물학대죄라고 여기는가 하면 단순히 문화가 다를 뿐이라고 항변합니다. 여성이 가정 외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선으로 여겨지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성적인 차별이자 인권을 무시하는 죄라고 간주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이처럼 윤리가 상대적이니까 종교도 상대적이라고 여깁니다. 그전에 종교 자체부터 상대적이니까 윤리도 상대적으로 적용됩니다.
바꿔 말해 모든 사회의 모든 인간이 절대적인 선이 없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또 절대적인 진리를 계시하시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은 한 분으로 모든 이를 동일하게 사랑하고 구원한다고 하지만 실은 하나님을 상대적이고 불완전하고 부족한, 당연히 윤리적으로도 그런 존재로 인간들 스스로 자기들이 믿는 신을 격하시킵니다. 살펴본 대로 여성을 차별하는 신도 있듯이 말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도 이혼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상반되는 두 가지 모습으로 시행하고 있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적 존재로 스스로 격하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너희가 완악해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야단친 것입니다. 음행하지 않은 여자와는 결코 헤어지지 말아야 하는데 음행이란 단순히 도덕적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맺어준 것을 스스로 깨는 완악한 죄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혼증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 절대적인데도 너희가 상대적 의미로 바꿔버렸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율법의 정신을 일부 깨닫고 아내가 음행했을 때만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는 샴마이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큰 문제가 하나 남았습니다. 이미 그런 정답을 알고 그대로 시행하면서도 이런 식의 질문으로 주님을 시험하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조건 싫고 미우니까 어떻게든 옭아매어 핍박 혹은 처형하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닫힌 질문이 내포하는 둘째 자가당착은 신성한 종교로, 더 정확히 말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이익만 증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을 살인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이는 율법을 잘못 이해해서 잘못 적용하는 것보다 더 악랄하고 패역한 죄입니다. 율법을 그런대로 정확히 이해하면서도 자신들의 안일과 형통을 위해서 악용한 것입니다. 종교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고 경제적 이익까지 챙기려는 것입니다. 양 떼를 건강하게 양육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 보상만 챙기려는 거짓 삯꾼 목자로 양들의 생명을 오히려 죽이는 사탄의 종입니다.
요컨대 바리새인의 이 시험에 숨겨진 두 가지 뜻 모두가 인간은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는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성 종교성 영성만으로는 도무지 그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제 그 멍에를 벗겨주러 오신 구세주 예수님마저 사탄의 사주에 놀아나 거짓 선생, 이단의 괴수, 하나님을 모욕한다는 죄목을 붙여서 도리어 사슬로 묶으려 듭니다.
주님은 그마저 당신의 완벽한 구원계획에 포함시켜 당신의 주권과 섭리에 따라 기꺼이 십자가에 올라가 죽으셨습니다.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윤리만 통용되는 인간 세상에선 의인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한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여신 것입니다. 지금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질문으로 당신을 시험하려 했다가 기어이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바리새인들마저 포함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오늘날의 신자들
지금 이천 년 전의 바리새인들의 잘못만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온 오늘날의 신자들이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잘못을 지적하려는 뜻입니다. 그것도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주님을 시험하려드는 죄를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닫힌 질문으로 예수님께 닫힌 답변만 강요했습니다. 주님을 대하면서 사전에 자신들의 음흉하고 탐욕스런 음모를 갖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정해져있는 답에 따라 올무를 씌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이와 비슷한 양식으로 주님께 나오고 또 주님 주시는 말씀을 그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닫힌 질문만 하면서 닫힌 답변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일만을 기도하면서 그것이 응답되어야 할 때와 방식까지도 자기가 정한대로가 아니면 당장에 따져듭니다. 이 일을 이때까지 이렇게 해결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만에 하나라도 해결되면 자기가 기도를 뜨겁게 잘하고 평소에 잘 믿은 데에 공을 돌립니다. 반면에 그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격 능력 조건에 시비를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적용할 때에도 비슷합니다. 자기 생각에 도덕적으로 선한지 나쁜지, 종교적으로 경건한지 불경한지 둘로만 나눠서 그 중 하나로만 판단 결정 시행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행위나 의식을 많이 하면 믿음이 좋고 하나님도 기뻐하시며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그와 비례해서 더 많이 받아야만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그런 습성이 몸에 배여서 세상 사람들은 물론 교회 안의 성도들마저도 오로지 그런 식의 기준으로만 판단하여 차별 대우합니다. 한두 번의 사소한 윤리적인 잘못이나 종교적으로 조금만 나태해도 참아주지 못하고 비판 멸시 정죄합니다. 잘못을 범한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지긋이 기다려주는 법은 아예 없습니다. 나아가 그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도와서 성장시키고 고통을 함께 나눠질 생각은 거의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물론이고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과 겪는 사건들에도 닫힌 질문만 던져서 닫힌 답변만 요구하는 것입니다. 불신 세상과 흘러가는 세태에 대해서도 좌인지 우인지, 보수 혹은 진보, 친 기독교적이나 안티냐, 성경 계명대로인지 아닌지 등의 딱 둘로만 나눠서 대합니다. 주님을 닮아가야 할 신자에게서 그분의 조건 없는 용서와 긍휼의 시늉조차 눈 닦고 찾으려 해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도달할 종착지도 오직 문제나 환난을 기도로 응답 받느냐 마느냐, 교회에서의 모든 신앙 활동에 감정적 충만이 있느냐 없느냐 중에 좋은 쪽만 소원합니다. 성도들과 교제도 현실적으로 같은 클래스인지 아닌지, 정서적으로 자신과 어울리는지 상대하기 싫은지로 나눕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처럼 처음부터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고의적인 악의는 없으나 자기도 모르게 그들과 동일한 양태를 신앙생활 전반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나서 그분과 말씀과 기도로 일대일 인격적으로 교제하면서 그분만 따라서 외롭고 고달프지만 거룩한 길로 걸어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단순히 교회 생활에 성실히 임하고 목사 시키는 대로 잘하면 하나님께 복 받는 것이 믿음이 결코 아닙니다. 작금 그렇게 잘못 가르치고 있는 목사들의 잘못은 너무나 큽니다. 그런 목사들의 행태와 가르침은 엄밀히 말해 예수님 당대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다를 바 하나 없습니다.
하나님께 열린 질문을 통해 열린 답변을 얻으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로 사랑 관용 은총 능력 지성 주권 모든 면에서 광대하십니다. 인간의 얄팍한 이성으로는 도저히 측정도 못합니다. 그분은 절대로 인간의 닫힌 질문에 따른 닫힌 답변 안에 갇힐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 도덕성 종교성 영성의 울타리 안에 제한될 존재라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분의 광대하심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입니다. 그 때까지 어떤 종교도, 어떤 뛰어난 선각자도 꿈도 꾸지 못한 구원의 길입니다. 죄에 묶여 있는 인간 구원의 유일한 방도였습니다. 인류의 지성과 이성과 도덕성이 최고 수준으로 발전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베푸신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세대의 죄인들의 모든 죄악을 모두 담아서 용광로처럼 태워서 정금 같이 만드는 하나님만의 열린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장막 안에 들어가는데 인간적 외모로, 그것도 윤리적 종교적 기준에 따라 그 자격 여부가 결정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십자가에선 오직 열리신 하나님의 열리신 은혜만 있습니다.
예수 믿는 신자의 신앙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께 항상 열린 질문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분의 성품, 속성, 권능, 섭리, 주권, 의지, 계획, 등 모든 면을 아우르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분만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전권을 행사하신다는 전제 하에, 이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자 진리이므로, 그분을 그분의 입장에서 묵상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그(분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히 채워야”(엡3:19) 합니다. 특별히 그분이 골고다 십자가에서 베푸신 자비와 긍휼이 얼마나 충만했는지 헤아리는 일은 절대로 잊거나 게을리 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 열린 질문으로 다가가라는 것은 평소의 그분과 그분의 역사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은 물론이요 성경 공부를 통해 알고 있는 것까지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범사에서 오직 그분을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만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분은 신자 모두를 동일하게 대하는 법이 없을 뿐 아니라 신자 한명에게도 매번 같은 식으로만 보호 인도하는 법이 없습니다. 기계적이지 않고 인격적인 하나님이기에 신자 또한 자기 전인격을 걸고 그분을 찾아서 조금씩 인격적으로 알아나가야 합니다.
그분께 열린 질문으로 다가간다면 당연히 그분께 얻을 답변도 열린 답변이어야 합니다. 예스와 노, 이것 아니면 저것, 옳지 않으면 그른 것, 고난의 당장 중지가 아니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따지면 그분은 그야말로 축복자판기로 전락합니다. 그런 식의 접근으로는 그분의 공의는 아주 조금 실현될지 몰라도 긍휼과 자비가 작동될 여지는 없습니다.
그분의 공의가 작동되려 해도 신자 본인부터 의롭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그분의 공의에 따른 통치만 받아 만족할 수 있는 의인은 없습니다. 아니 우리의 자격 조건 능력 믿음이 그분의 공의의 수준에 아예 미치지 못하기에 공의의 통치로는 당장 모두 심판 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지금 당장 절실한 것은 그분의 긍휼뿐입니다. 그 긍휼은 온전히 아무런 차별 조건 없이 열려있는 그분에게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열린 답변을 얻는다고 우리가 영적으로 깊은 것을 깨달아서 아주 신령하고 경건해지리라 기대해선 안 됩니다. 그분께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서 전부 다 내어드리고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에스더처럼 그분이 죽으라고 하면 그 안에 단 하나의 불의도 없는 대신에 충만한 사랑만이 있기에 얼마든지 죽으리라는 심정과 각오와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언제 어디서나 한 결 같이 열려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성숙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로 자기 아들마저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입니다. 그분께 완전히 열린 자만이 참된 순종과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평소에 아무리 심각한 문제 환난 핍박이 외부에서 닥쳐도 자신의 내면을 기쁨과 감사와 자유와 평강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어지간해도 요동치 않게 됩니다. 나아가 열린 그분에게 자기를 완전히 열면 환난 중에도 그분에 대한 소망이 더 커져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그분을 향해 많이 열어야 그분께서도 더 유익하고 좋은 일로 더 많이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향해서도 열어라.
마지막이자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해야 할 영적 진리가 하나 남았습니다. 하나님에게 열린 믿음의 자세를 가진 신자만이 이웃에게도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열린 마음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외모로 전혀 차별하지 않았고 도리어 세상에서 외모로 차별 당하는 사람들과 더욱 친밀히 교제하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며 인간적 조건으로 제한을 받는다면 아예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의 열린 사랑을 온전히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 신자는 당연히 이웃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린 사랑을 자기 안에 충만하게 받아 누려서 충만하게 채워본 경험이 많은 열린 신자만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본인부터 하나님의 그 열린 사랑이 없다면 한 시도 온전히 살 수 없음을 절감하기에 자기 의로는 이웃을 절대 제대로 섬길 수 없음을 절감합니다. 자기 의로 섬기면 시기 질투 분노 저주가 필연적으로 따르지만 주님의 열린 마음으로 남을 대할 때는 그런 것들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주님의 열린 사랑을 전하는 통로로 쓰임 받는 것만으로 너무나 기쁘고 자신에게도 주님의 생명력이 넘침을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그럼 더더욱 이웃을 잘 섬길 수 있고 정말로 자기 오른 손이 한 일을 자기 왼 손이 모르게 됩니다.
열린 신자는 그래서 자기가 자신을 대하는 것부터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과 악으로 이분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결과로 이웃과 성도도 선과 악으로 이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못하며 그 자리에서 단번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음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최고도로 의롭고 경건하고 신령해도 침례 요한이 고백했듯이 주님의 십자가 발등상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모두가 그런 판국에 그분의 십자가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비방 판단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다시 강조하겠습니다. 우리 믿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성숙하고 주변에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려면 하나님을 닫힌 질문 안에 가두려는 시도를 지금 당장 그만 두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십자가 앞에 온전히 항복하여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열린 마음으로만 그분 앞에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께서도 하늘에 있는 당신의 은혜와 권능의 창고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4/2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