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9:1-3 자유인가 주인인가?

조회 수 256 추천 수 12 2011.10.28 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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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自由)인가? 주인(主人)인가?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시29:1-3)


치산치수 시설이나 과학기술의 발달이 미개했던 고대에는 천둥, 번개, 지진, 홍수,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인간에게 주는 공포감은 엄청났습니다. 아니 인간을 복제하고 우주를 정복하겠다고 거창하게 나서대는 현대에도 그 위력은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최근의 일본 쓰나미에 전 세계가 놀라 원자력 발전소를 폐지하려 들지 않습니까?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의 징조까지 늘어가니까 그 두려움은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이번 주 미국 동부, 중부의 지진에서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어도 사람들은 10년 전 911 테러를 연상하며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손에는 스마트폰 아이패드 같은 최첨단 전자기기를 들고 머리로는 주식시세를 열심히 가름하고 있어도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콩닥거린 것입니다. 키가 겨우 2 미터도 안 되는 주제에 수십 미터 높이의 쓰나미와, 체중은 100 kg도 채 안되니 집채도 날리는 토네이도에서 도무지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반면에 자연은 너무나 광대합니다. 자연재해를 겪음으로써 인간에겐 신에 대한 인식이 생겼습니다. 또 그런 재해가 한순간에 재산, 인명, 생활여건마저 몽땅 앗아가니까 뭔가 그것을 주관하는 신들이 화가 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원시종교가 신들의 노여움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연에 뭔가를 바치며 숭배하는 모습을 띄게 된 까닭입니다.  

본 시편에선 자연재해를 대하는 자세가 그런 일반적 모습과는 다릅니다. 자연을 주관하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자연재해를 단순히 잘못된 것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인간에게 마음이 상했거나 잘못에 벌을 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세히 전 편을 묵상하면 저자 다윗이 단순히 자연의 장엄함에 대해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여호와가 뇌성으로 백향목을 꺾었고, 암사슴으로 낙태케 했으며, 홍수 때에는 왕으로 좌정했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부정적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배후에 여호와의 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또 그 소리는 분명 선한 뜻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결론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절)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신(들)이 홍수를 일으킨 것까지는 세상의 여타 종교들과 같지만, 백성에게 힘을 주고 평강의 복을 준다는 면에선 정반대로 달라집니다.

쉽게 말해 자연재앙은 오히려 인간에게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들은 자연 재앙들이 지구를 정화(淨化)시키고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고 인정합니다. 과일나무로 치면 일종의 가지치기의 역할인 셈입니다. 예컨대 지구 대기 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질소는 근본적으로 본 시편이 예로 든 천둥 번개에 의해서 생산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불신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특별히 과학지식에 해박한 식자(識者)들은 인간에게 재앙만 안기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고 버티지 않습니까? 이 시편은 지금부터 근 3000년 전에 저작된 것인데 이미 뇌성 안에 하나님의 놀랍고도 은혜로운 소리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또 다른 확실한 증거입니다.

물론 다윗이 그런 과학적 연구나 확신의 바탕에서 저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자연재앙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되 그분은 바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장 천둥번개로 나무가 불에 타고 사슴이 놀라 낙태해도 그 안에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할 뿐 영원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소리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뇌성이 발해 연약한 우리의 가슴은 뛸지언정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일한 자연재해를 두고도 여호와를 겸비하게 경배하는 자와 그 반대로 거부 반발 비난하는 자로 나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불신자나 타종교인들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까지는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과 신성이 영영하고 완전하며 거룩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완전하고 거룩하지 않고는 절대로 영원할 수 없다는 간단한 진리도 미처 모르는 셈입니다.

이런 불의의(?) 자연 재해는 불신자들로 또 다른 곤혹에 빠트리게 만듭니다. 도대체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몰라서 미혹 속에서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이 땅에서 살게 되었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도무지 그 정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때는 거의 잊고 있다가 자연 재해가 닥쳐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들이 너무나 무력하게 죽는 것을 보니까 대체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스스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들에 답을 얻으면, 소위 말하는 자아를 발견하여 충족하게 실현하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자신을 제약하는 모든 것들을 벗어버려야 하는데 우선 자신부터 자기가 잘 모르겠으니 그부터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자아를 찾아야 하고, 자아를 찾기 위해서도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는 오직 어떤 존재로부터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에만 둡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유롭지 못한 자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겐 도무지 스스로도 제어 못하는 장애가 최소한 넷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탄생과 출생입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싶은 시기, 장소, 종족, 부모, 환경 등을 도무지 선택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차피 죽는 것은 정해져 있다 쳐도 수명, 죽음의 방식 등을 정하지 못합니다. 간혹 짹 소리라도 한번 지르고 죽겠다고 자살하는 자들이 나오긴 하지만 말입니다. 세 번째는 살펴본바 대로 자연 재해입니다. 쓰나미, 토네이도 등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덮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인정하기는 너무나 싫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생각은 바뀌고 하루에도 감정적으로 천국과 지옥을 수도 없이 오갑니다. 내 마음 나도 모를 때도 많으며 자기 생각과 전혀 반대인 일도 아무 거리낌 없이 저지릅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추하고 더러운 짓인데 그러며 나중에는 그 일을 신나게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깜짝 놀랍니다. 평생을 두고 자아를 발견하겠다고 노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동시에 아무리 그래도 실패하는 이유 또한 바로 이것입니다.

간단히 이 넷의 장해만 살펴봐도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완전한 자유는 아예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구조적으로 부자유한 자가 완전한 자유를 목적으로 한다면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로 나면서부터 장님이 첨단 의학으로도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데도 평생의 목표를 눈을 떠서 정상인처럼 보려고 노력하는 꼴입니다. 바로 그래서 성경이 불신자의 영적 상태를 나면서 장님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세대의 모든 불신자들이 자기 인생의 목표를 자아발견, 자아실현, 자아충족에 두고 있습니다. 모든 이가 소유하고 있는 자아 자체가 영적으로 장님인데 충족과 실현은커녕 자신을 올바르게 발견도 하지 못할 것은 너무나 빤합니다. 실제로 여전히 모든 이의 평생 목표는 되지만 제대로 성공했다는 소식은 없지 않습니까? 모든 불신자들이 인정하기는 너무나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진실입니다.  

결국 인간은 태생적으로 완전한 자유가 불가능하기에 바로 그 전제 하에서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부자유한 자기에게 묶여선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자유는 제한적 자유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절대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목표로 한다면 그 출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또 출생과 죽음은 물론, 자신의 마음조차 완전히 자기 것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의 진짜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전제 하에 자유를 찾아선 전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인생의 참 목표는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찾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주인이 자기가 아닌 이상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첫째 일은 주인을 찾아야 함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진짜로 참 주인을 만나야 합니다.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며 자유만 찾는 자에겐. 자연 재앙, 문제, 환난은 오직 제거해야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 자체 안에는 선한 뜻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단지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자유를 찾고 누리려는 스스로의 힘을 더 늘여주는 정도의 역할밖에 못합니다. 이 또한 인내심을 높이고 어려움에서 초연해지려는 자아실현에 속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체가 나쁠 것은 없지만 번개의 예에서 보았듯이 자연재해, 문제, 환난 안에도 여호와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음은 전혀 발견 못하고, 아니 안중에도 없으며 끝까지 정복해야할 악한 현상으로만 남을 뿐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 출현할 수 있었던 근거로는 창조와 진화의 두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만약 창조가 옳다면 당연히 창조주가 모든 인생의 주인입니다. 반면에 진화는 물질에서 우연히 출발하고 발달된 것이므로 그 출발부터 주인이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발견한다는 말 자체가 어리석다 못해 우스꽝스런 일입니다. 흙으로 아무리 본차이나를 굽어도 여전히 흙의 가공된 형태일 뿐입니다. 본차이나가 고급한 물건이 되었으니 나는 더 이상 물질이 아니며 나의 자아를 찾아야겠다고 나서는 꼴입니다.

요컨대 인간이 자유만을 추구해선 아무리 해도 참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인생의 참 주인을 찾아서 그 주인이 원래 자신에게 의도한 바를 온전히 충족시킬 수 있다면 자유로워지는 법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예수님은 아들이(당신께서) 자유케 해주어야만 참으로 자유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창조주를 부인하며 스스로 인생의 주인 되어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겸손하게 당신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어야만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불신자들을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미몽(迷夢)에서 스스로는 절대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사단이 미혹하여 그리스도의 광채가 비취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작 문제는 신자가 되고서도 여전히 불신자 시절의 버릇이 남아서 인생에서 자유와 주인을 찾는 싸움을 서로 혼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따로 있음은 분명 인정하지만, 주인의 뜻을 따라야만 자유로워진다는 진리는 아직도 온전히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환난이 닥치면 어떡하든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유로워지려고만 합니다. 그 환난 안에도 여호와의 거룩한 음성이 있음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자신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만 간주합니다.

물론 신자가 믿음으로 간구하면 하나님은 그 고난을 없애주십니다. 단 당신의 절대적 뜻과 계획을 실현하는 범위 안에서 그러합니다. 신자에겐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시되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고난에서 오로지 자유만 추구하면 오히려 들어주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난 중에 아무리 뜨겁게 오래 기도해도 사태가 더 악화되는 경우를 종종 겪지 않습니까?

신자는 고난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다윗이 번개와 뇌성 속에서도 여호와의 소리를 듣고 찬양했듯이 말입니다. 고난의 주인을 찾아야 합니다. 고난과 문제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내가 그분의 힘을 빌려서 스스로 해결하여 자유를 얻으려 해선 어쩌다 해결되어도 다음에 고난이 닥치면 그런 힘겨운 과정을 반복해서 거쳐야합니다.

모든 고난과 모든 문제 안에는 여호와의 거룩한 음성이 실려 있습니다. 범사의 주인은 오직 그분입니다. 그 주인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서 그 음성을 들으려 할 때에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자유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구호가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도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나와 함께 하시기에 두려워말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말씀을 이해하는 데도 여전히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고난에서 자유를 찾기 위해서 그분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한다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다른 부류는 고난의 주인도 바로 그분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주인이 맡기신 일이 설령 아주 힘들어도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영적전투, 신앙성숙, 영성훈련 등 어떤 고급한 용어로 포장해도 궁극적으로는 이 둘에서 어떤 관점을 택하느냐의 싸움일 뿐입니다. 자꾸만 자유만 추구하려는 옛 사람의 본성을 죽이는 것이 그 요체라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버릇이 나오는 것입니다. 대신에 범사에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끝까지 나의 손해와 희생만 아니 목숨까지 요구하는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생겨도, 그 일에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과연 어떠한 분이며, 나를 지금 이렇게 대하고 있는 본의(本意)가 무엇인지 제대로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러는 것이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첫 걸음입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는 어떻게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번개와 뇌성 가운데도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우리가 상상치도 못할 정도로 광대하며 완전하며 영원하며 신실하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자기 인생에서 자아실현 내지 자유를 추구합니까? 매일 아침마다 주인을 만나 그분께 지시 사항을 전해 듣고 그 하루도 그대로 살아가려 하십니까?

8/26/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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