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하나님을 어떤 이유로 찬양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16-20)
기자는 먼저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겠다고 한다. 그 일이 기적을 일으켜 큰 복을 주었거나, 문제나 고난에서 구출해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꾸준히 하나님께 구하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없애주는 은혜가 아니다. 그는 “내 영혼을 위해” 행하신 일이라고 전제했다. 나의 육신과 내 주변 여건에 행하신 일에 감사하는 우리와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그는 마음으로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들어주지 않을 줄 알았다고 말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기도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죄를 씻어야 하며 정욕으로 쓰려는 동기로 구해선 안 된다.
문제와 환난에서의 구해달라는 우리의 일상적 기도도 그 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 또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새로운 다짐이 있은 다음에 간구해야 한다. 순서가 꼭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분의 은혜만 받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너무나 당연한 영적 원리로 기자도 충분히 그 원리를 숙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었고 그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다”고 한다.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앞에서의 진술과 반대되는 내용을 말하겠다는 뜻이다. 원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라는 의미까지 있다. 하나님이 마음에 죄악을 품고 하는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함에도 더 확실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참으로 놀랍고도 엄청난 진술이 아닌가?
그가 악한 짓을 도모할 예정인데 그 일을 도와달라고 간구했는데 하나님이 응답했다는 뜻은 절대 아닐 것이다. 대신에 우리 모두 그러하듯이 어떤 사람이 너무 싫고 미워서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나아가 대신 벌해달라고는 했을 수 있다. 세상에서 당한 여러 억울함을 갚아 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내 유익부터 계산하는 마음이 더 앞섰을 수도 있다. 심지어 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져도 좋다는 일말의 각오까지 했을 수 있다.
다윗의 여러 시편에서 보듯이 우리도 대체로 처음 기도하러 나올 때는 하나님께 의심, 원망, 불평, 심지어 불신을 지니고 있지 않는가? 그럴 때는 속에 묻어두지 말고 차라리 있는 그대로 주님께 아뢰어야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과 상처와 억울함과 눌림을 주는지, 왜 나의 대적은 그냥 두는지,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 받는지 등등을 솔직하게 가감 없이 토설해야 한다. 하나님께 불경해 보여도 된다.
물론 본 시편의 기자나 우리의 그런 불경한 생각은 엄격히 말해 마음으로 짓는 죄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하나님은 야단치지 않았다. 응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한 것도 아니다. 비유컨대 아버지에게 반항조로 심하게 대들듯이 뭘 해달라고 말했는데도 아무 꾸중하지 않고 그대로 다 들어주신 모습이다.
자식의 근본 마음에 부모를 미워하거나, 부모 취급하지 않거나, 부모에게 얻어낼 궁리만 하거나, 부모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식 입장에선 솔직히 정말 부모에게 화가 났거나 혹은 부모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부모를 부모로서 존경하지 않을 리는 없다. 단지 지금 이 경우에만 동의하지 못하고 이해도 안 되고 화가 난다는 뜻이다.
동전만 넣으면 자동적으로 원하는 물건이 나오듯이 간혹 기도만 하면 복을 주시는 기계적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신자가 있다. 또 그래서 급한 일에만 찾고 평소에는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 마치 밖에서 나쁜 짓을 실컷 하다가 돈 떨어질 때만 부모에게 찾아와 돈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망나니 아들 같다. 말하자면 기도라고는 평생토록 오직 자기 안일만 추구하는 신자에게는 본 시편에 기록된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베풀어지지 않는다.
평소 경건한 신앙생활을 성실히 행하지만 아주 가끔은 너무나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되고 전적으로 내 잘못과 허물이 아닌데도 세상에서 억울한 상처와 시련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에 그분에 대한 의심, 불평, 원망, 불신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기도했는데도 즉, 하나님은 당신에게 불경죄를 범한 기도에도 응답하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어서 앞뒤 사정은 물론, 구하는 내용이 개인적 욕심에서 기인한 것임도 모른 채 간구할 수 있다. 우리는 전혀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을 구하는 경우마저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러고도 기도하는 동안에는 그것이 의롭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물리치지 않고 당신의 뜻과 방식과 시기로 응해주신다고 한다. 잘못된 기도가 그대로 응답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도 귀 기울여 들으시고 당신만의 방식으로 합력하여 당신의 선으로 바꾸어주신다.
본 시편의 결론 격인 마지막 절을 보라.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잘못된 기도, 심지어 죄가 포함된 기도라도 물리치지 아니했다고 한다. 당신 백성을 향한 당신의 인자하심을 당신께선 결코 거두어 가지 않는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죄악으로 타락된 이 세상과 당신의 택한 백성들마저 당신과 원수 된 상황에도 당신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 대신 죽으신 십자가 복음이야말로 당신의 인자를 거두지 않으신다는 가장 크고도 명확한 증거이지 않는가? 주님을 향한 찬양이 어떤 내용이 들어가 있는가? 혹시 내 뜻대로 기도 응답이 되었을 때만 찬양하지는 않는가? 내 죄악과 탐욕에도 인자를 거두시지 않는 주님 그분을 찬양한 적이 있는가? 그런 체험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아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가?
11/8/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