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컷 두들겨 맞는(?) 인자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5-18)
작자 미상의 본 시편은 그 구조상 독특한 통일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총 24절로 이뤄진 시편은 각 절마다 먼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언급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후렴구로 모든 구절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가 따라 나옵니다. 유대 회당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릴 때 사용된 시편으로 성가대가 먼저 “~에게 감사하라”고 선창하면 회중들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화답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그분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찬양하려니 조금 미진한 구석이 남습니다. 하나님이 베푼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키고, 큰 왕들을 치고, 유명한 왕들을 죽이셨다니 너무 비정한 하나님 같지 않습니까? 자기 백성은 무조건 편애하고 다른 민족은 냉혹하게 차별한 것 아닙니까?
손자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아무 야단치지 않고 끝까지 귀여워해주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 인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방임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바로 잡으십니다. 또 그것이 참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방 왕들이 심판 받은 것은 이스라엘을 편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죄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런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사19:22) 애굽을 치신 것은 분명히 그들을 고쳐서 당신께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구원이 인종이나 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베풀어질 것이란 말씀이긴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이 지으신 당신의 백성으로 복이 있다고까지 선언합니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19:25)
하나님은 이방족속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냉혹한 분이 아닙니다. 역으로 말해 이스라엘도 잘못하면 마땅히 그분의 엄한 벌을 받았으며 또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인자에는 전혀 손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본문만 해도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선 “광야로 통과케”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떡과 고기가 없다고 불평하고 가데스바네야에서 당신의 뜻에 순종치 않은 죄의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만약 이스라엘이 지은 죄에 따라 벌 받는 것이 이방과 동일하다면 그들이 택함 받은 유익이 없는 것 아닙니까? 신자나 불신자에게 베풀어지는 인자가 동일하다면 구태여 믿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절대 냉혹하고 편애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한 것이지 이스라엘을 향한 인자의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보편적 원리를 말한 것뿐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인자는 분명히 그런 일반은총과는 다릅니다. 당신과 당신이 택한 백성과 맺은 언약관계에 바탕을 둔 인자(헤세드)입니다. 당신께서 언약을 반드시 지키면서 베푸시는 인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언약의 상대인 이스라엘이 그 언약대로 살지 못할지라도 당신만은 끝까지 어떤 타산, 변개, 가감, 왜곡, 포기 없이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는 것 자체가 인자입니다. 그 언약은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라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또 큰 민족을 이룰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방의 객이 되게 하지만 사백 년 후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겠다고 하나님은 맹세까지 했습니다.(창15:12-21) 실제로 그 언약을 단 하나의 차질 없이 이루셨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수장된 것도 복의 근원인 이스라엘을 저주했기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심지어 당신을 두고 “맹세한다.”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물론 모든 믿는 이와 맺으신 언약을 한 치의 어김없이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사45:23)
그럼 하나님이 신자를 결국 어떤 자리로 이끄신다는 뜻입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진짜로 완전히 떠난 자리입니다. 세상 것은 단 하나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당신만 전적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 땅의 썩어 없어질 것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포기케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중요치 않기에 현실 도피적 종말주의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소중하고 고귀합니다. 그 짧고도 한번 뿐인 아까운 삶을 더 아름답고 풍성하고 참되게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전, 만족, 행복, 의미, 가치를 세상에선 절대 얻을 수 없으니 당신께로만 구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진정으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께 받은 그 참된 복을 주위에 나눠주는 근원이 되게끔 당신께서 만들어주십니다. 그 일을 땅의 모든 족속 즉, 만나는 모든 이에게 때를 얻든 못 얻든 충성되게 순종하고 있으면 주위의 어떤 저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고 합니다. 신자의 수호신이 되어 불신자의 핍박이 아예 없도록 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 불신자가 신자를 저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또한 신자의 믿음 즉, 하나님과 맺은 그 언약에 동참했다는 뜻입니다. 최소한 신자의 밈음과 신자가 그 언약을 실행하는 모습이 옳고 선하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신자 주위에 그런 동참자나 옹호자들이 많이 나타나면 자연히 큰 민족을 이루게 되고 신자의 이름도 창대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신자의 의도, 형편, 자격, 조건, 능력, 심지어 믿음과 무관하게 반드시 그 언약을 끝까지 이루신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즐겁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그렇게 이끄실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둘째는 신자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억지로 끌림을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두들겨 패서라도 신자로 당신께서 계획하신 자리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본 시편의 3절에서도 여호와는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신다”고 합니다.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주권과 섭리로 신자로 반드시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디다. 또 그러기 위해 필요하다면 신자의 대적을 죽이시기도 하지만 신자로 광야를 통과케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인자는 솔직히 어떤 것입니까? 그저 끝까지 좋은 일만 생기고 내 뜻대로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무한한 방임입니다. 전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부르심을 받은 신자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는 그분의 참 인자를 결코 맛보지 못합니다. 요컨대 혹시라도 지금 하나님께 실컷 두들겨 맞고 있다면 그분의 가장 큰 인자 가운데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28/2012